농촌총각, 시네마천국을 가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1993년작 <칼리토>(Carlito's Way)는 주인공 칼리토 브리간테(알 파치노)가 천국행 열차를 타기위해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다. 한때 잘나가는 갱이었던 그는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사랑하는 여인 게일(넬로페 앤 밀러)과 파라다이스에서의 삶을 꿈꾼다. 과거의 기억과 결별한 채 아름다운 석양, 투명한 쪽빛 바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 거기에 사랑하는 이와 함께할 수 있다니, 이 어찌 천국이 아니겠는가.
농촌총각은 상상해본다. 이 더운 여름, 내가 갈 수 있는 파라다이스는 없을까. 그 때 기억 저편에서 ‘자료원, 자료원’이라는 메아리가 들려온다. ‘뭐, 자료원?’ 귀를 기울여보니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상자료원’)이란다. ‘맞다, 그곳에는 수많은 DVD, 영화음악, 영화서적이 있지!’ 망설임 없이 상암동 DMC 단지에 있는 영상자료원을 향해 출발한다. 수만 가지 표정의 영화(물론 무료), 그리고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그곳은 여름 무더위를 식혀주고, 수많은 영화 속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볼 수 있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파라다이스로 향하는 길은 늘 먼 것인가. 미군이 많았던 경기 북부의 한 도시에 사는 농촌총각은 영상자료원에 도착하기 위해 만만치 않은 여정을 거쳐야 했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종로에 가서 271번 버스를 갈아탔다.(영상자료원에 가는 다양한 방법이 있으니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1시간 반. 천국까지 걸리는 시간.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자란 농촌총각은 시간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귀를 즐겁게 해줄 음악만 있으면 전국 어디라도 즐겁게 갈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너무 덥잖아.’ 버스를 갈아타는 위해 기다리는 동안 그의 등판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도시의 여름은 너무 더워’라고 불평을 한 마디 할 찰나 칼리토 형님이 말하신다. ‘천국행이 그리 쉬운 줄 알았냐? 난 총까지 맞았어. 걍 닥치고 가라규!’,
한국영화 역사, 한 번에 뽀개기!
상암동 DMC 문화콘텐츠센터 안에 위치한 영상자료원에 들어가자 시원한 기운이 ‘왔어?(What's up?)’라며 반갑게 인사한다. ‘땀을 식힐 곳이 필요해’라고 농촌총각이 헉헉대자, ‘영화박물관에서 한 숨 돌려’라며 1층 영화박물관으로 초대한다. 지난 5월 개관한 영화박물관은 아직 한국영화가 만들어지기 이전인 활동사진의 시대(1900년~1923년)에서 출발, 조선인 자본과 스탭만으로 제작된 최초의 영화 <장화홍련전>(1924),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1960년대(1969년에는 2백 편이 넘는 영화가 제작) 등을 거쳐 현재까지 한국영화 역사, 에피소드 등을 시대별로 보기 쉽게 정리해 놨다.
시간 여행을 하다보면 눈길을 사로잡는 ‘아이템’들이 발길을 붙잡는다. 프랑스 데브리사에서 1928년 생산한 파르보 카메라, 일제시대 발행된 영화잡지 <영화시대>, 옛 단성사, 동양극장 등에서 사용된 프로그램북 등 다양한 문헌, 1950년대에 사용된 시나리오와 촬영 일정표 등 오늘날 한국영화를 만든 소중한 자료들이 고이 모셔져 있다. ‘곰 두 마리’도 만날 수 있다. 제11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마부>가 받은 은곰상 트로피와 2005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이 수상한 명예황금곰상(평생 공로상) 트로피가 그것인데, TV 브라운관에서 볼 때보다 훨씬 친근하다. (영화박물관은 올해 12월까지 무료다.)
풍덩! 영화의 바다에 빠져봐
어느덧 등줄기의 땀은 다 식었고, 도시의 열기는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상쾌해진 마음으로 2층 영상자료실 문을 연다. 일단 짐을 사물함에 넣고, 일일회원증을 받아 본격적인 영화 서핑을 시작했다. 영상자료실은 국내에 출시된 대부분의 비디오테이프와 DVD를 갖추고 있다. 또 칸, 베를린, 베니스 등 세계 3대 영화제 수상작 컬렉션, 1천여 편 규모의 독립영화 아카이브, 고전영화 160편을 볼 수 있는 온라인 VOD채널을 갖추고 있다. 왼편 영화감상실에서 이를 감상할 수 있다. 오른쪽에는 한국 영화주간지는 물론 해외 영상 관련 잡지, 각종 영화ㆍ애니메이션 서적, 영화 관련 논문, 국내외 시나리오가 있다. 그 중간에는 영화음악 CD까지 있으니 이곳이야 말고 ‘영화의 바다’다.
‘뭘 먼저 볼까’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DVD를 보면 책이 울 것 같고, 책을 보자니 영화음악이 아우성을 칠 것 같다. 책과 음악을 살살 달래고, 먼저 DVD를 선택한다. 오늘은 두기봉 감독의 2004년작 <대사건>을 선택했다. 이 작품은 8월 1일부터 필름포럼에서 열리는 ‘액션 마스터 두기봉 특별전’에서 상영되지 않는다. 사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지난 밤 늦게까지 라디오를 듣느라 잠이 부족한 탓에 러닝타임이 길지 않으면서 눈이 시원한 액션영화가 끌린다. 이제 쇼타임. 자리에 앉아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가장 편한 자세로 ‘PLAY’를 눌렀다.
<대사건>. 지난 주 씨네21과 필름2.0에 나온 두기봉 감독 기사를 보고 심히 가슴이 요동쳤던 기대에는 못 미치는 영화였다. 영화는 건물 안에 갇힌 갱단과 그와 대치하고 있는 경찰의 한 판 승부를 보여준다. 특이한 것은 양측 모두 방송을 통해 그 사건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다는 점이다.(이 작품의 영어 제목은 <Breaking News>다) 영화 곳곳에서 벌어지는 액션 장면은 액션 마스터로서의 두기봉 감독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지만 방송이라는 줄기를 타고 이어지는 인물과 스토리는 평범해 긴장감이 잘 생기지 않는다. 두기봉 감독의 매력은 특별전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해야겠다.
우연히 발견한 김지운 감독과 농촌총각의 공통점
<대사건>을 보고난 뒤 농촌총각은 갑작스런 피로를 느낀다. 수면부족과 과다 수분방출로 인한 노곤함이다. 그는 한 숨 자기 위해(?) 마이클 니만이 음악감독을 맡은 <피아노>를 선택한다. 음반을 들고 음악 감상 공간으로 가는데 서가의 책들이 부른다. ‘그냥 가게?’ 괜히 미안한 마음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지난 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재밌게 본 기억에 김지운 감독이 직접 쓴 책 <김지운의 숏컷>이란 책을 꺼낸다.
영상자료실 오른쪽 맨 끝에 위치한 음악 감상 공간으로 간다. ‘와!’ 넓고 편안한 소파가 절로 탄성을 내뱉게 한다. 책은 무슨, 한 숨 자기 딱이다. CD를 넣고 책을 펴려는 순간,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To the edge of the earth’가 귀를 사로잡는다. ‘지구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반복적이면서도 격정적인 현악기의 선율은 심장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그리고 절정에서 멈추는 모든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은 싹 사라졌다. 하지만 예의상 그럴 수 없어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정말 몰랐다. 김지운 감독과 농촌총각의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는. 김지운 감독은 군대를 포함, 34살까지 10년 가까이 백수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백수생활이 1~2개월이 힘들지, 2년 정도 지나면 리듬이 생긴다. 백수리듬을 타게 되면 사람이 참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진다. 성취욕, 그런게 없으니까. 특별히 급할 것도 화낼 것도 없다’고. 아, 아름다운 깨달음이여! 화낼 것도 없다니. 이는 최근 농촌총각이 지인들에게 ‘나 화가 잘 안 나’라며 설파하고 있는 ‘화 없는 삶(Life without anger)’의 다른 표현 아닌가. 농촌총각 또한 최근 백수생활을 즐기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묘한 동질의식이 느껴진다.
대괴수 용가리를 만나다
김지운 감독이 긴 백수생활을 마치고 영화 잘 찍는 감독이 된 것처럼 농촌총각도 언젠가 기사를 잘 쓰는 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유쾌한 상상을 하며 영상자료실을 나온다.(영상자료실은 7시까지 이용할 수 있다.) 이제 천국 생활이 끝? 아니다. 영화 보는 재미의 최고봉, 극장에서 영화보기가 남아있지 않은가. 때마침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는 ‘괴수대백과-한국 괴수가 온다’ 기획전을 하고 있다.(기획전은 7월 29일부터 8월 5일까지 총 11편의 괴수영화 상영한다.) 농촌총각은 괴수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1960, 70년대 괴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지하 1층 시네마테크 KOFA에 들어간다.
기획전 첫날 프라임 타임을 차지한 영광의 영화는 김기덕 감독의 1967년작 <대괴수 용가리>다. 이번 기획전에서 <대괴수 용가리>는 두 버전(러닝타임 48분의 불완전판 DVCAM과 78분 영어더빙판 DVD)으로 상영되는데 농촌총각이 본 것은 48분 불완전판이다. 스크린에는, 세월의 흔적을 느껴지는, 비가 내렸고, 대사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을 정도의 환상적인(?) 점프 컷이 시종일관 등장했다.
하지만 50여 년 전의 괴수영화를 보는 재미는 의외로 쏠쏠했다. 용가리, 탱크, 우주선, 서울 중심가 등을 미니어처로 제작한 당시 최첨단 특수효과는 정겨웠고, 힘겨운 싸움 끝에 무력화 한 용가리를 죽이지 말고 우주선에 태워 외계로 보내자는 결말은 윗세대의 따뜻한 감성을 보여줬다. 특히 펑키 리듬의 아리랑 연주에 맞춰 남산 위에서 춤추는 용가리의 모습은 강력한 웃음을 유발하는 명장면이다.
극장 안의 불이 켜지고, 이제 농촌총각도 집에 갈 시간이다. 햇빛이 쨍쨍 내려쬐고 있을 때 이곳에 도착했는데, 지금 건물 밖은 칠흑 같은 어둠이다. 앞으로 펼쳐질 긴 여정에 한숨이 나올 법도 하지만, ‘오늘 하루 잘 놀았구나’하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누군가 물어본다면 ‘시네마천국’을 다녀왔다고 말하리라. 안효원 기자(FILMON)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 http://www.koreafilm.or.kr/
소셜웹 반응글
'CULTURE 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 [’08 나만의 순결한 여름아이템②] 디저트 천국, 패스트푸드점에서 즐기는 천원의 만찬 (1) | 2008/08/04 |
|---|---|
| 아일 1집 <Bird> - 수줍은 소녀의 가장 행복한 목소리 (0) | 2008/08/03 |
| [’08 나만의 순결한 여름아이템①] 무더위 피해 시네마천국 가자고! - 영상자료원에서 놀기 (2) | 2008/07/30 |
| <마고 앳 더 웨딩> DVD - 이 자매가 사는 법 (1) | 2008/07/20 |
| 엔비 <Insomniac doze> - 현해탄 건너 이모코어가 온다 (3) | 2008/07/10 |
| 雜誌魅惑잡지매혹 잡지, 잡지 디자인 展 - 현대 대중문화 압축의 장 (1) | 2008/07/01 |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아니 지금도 잘 쓰시는데(...)
2008/07/31 18:14뭐 이거... 진정한 천국이 따로 없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작년에 처음 갔을 때 완전 고생해서 찾아간 게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주변이 왠걸 공사판이었......던지라 바로 못 찾은 대략 안습의 일이;; 지금은 정리가 좀 됐으려나요.)
오랜만에 영상자료원에 다시 가고 싶어졌어요. 이제는 쉽게 찾아갈 수 있으니 :-)
크허~ 글에서 한량 냄새가 물씬 풍기시는구려.
2008/08/01 1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