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 편의 영화를 기억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조 라이트 감독의 <오만과 편견>(2005) 또한 그렇다. 혹자는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와 다아시(매튜 맥파든)의 운명적인 사랑을, 혹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아름다운 풍광이나 영화 전편에 흐르는 클래식 음악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건 엘리자베스의 어린 동생들의 모습이다. 낙엽 굴러가는 모습만 봐도 웃음을 터뜨리는 소녀들의 모습은 순수 그 자체다. 극중에서 사고뭉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이었지만 보는 것만으로 유쾌하다. 누군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그 소녀들의 모습으로 활짝 웃고 있을 것이다.
최근 첫 앨범 <Bird>를 발표한 재즈 보컬리스트 아일(isle)의 목소리를 들으면 <오만과 편견>의 소녀들이 떠오른다. 수줍은 소녀의 행복한 목소리랄까. 프랑스 파리에서 재즈 보컬 트레이닝을 받은 아일은 맑고 청량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 총 8곡이 수록돼 있는 <Bird>엔 그녀의 음색에 딱 맞는 달콤한 사랑 노래로 가득하다. 1번 트랙 ‘속삭임’은 “내게 사랑을 속삭여 그대 넌 아름다운 음악 행복한 속삭임”을 노래하고 있고, 4번 트랙 ‘사과향기’는 “남몰래 감춰놓은 사과 나의 사랑 부르는 너의 향기”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무엇이 이토록 그녀로 하여금 사랑을 노래하게 했을까. 힌트는 앨범 제목 ‘Bird’에 있다.
버드(Bird)는 1940년대 재즈의 새로운 형식인 비밥을 창시한 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의 애칭이다. 닭튀김을 좋아해 버드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는 설도 있고, 차에 치여 죽은 닭을 요리해달라고 해서 그렇다는 설도 있다. 또 기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음악을 해 얻은 별명이라는 설도 있는데, 확실한 것은 찰리 파커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음악을 했다는 사실이다. 찰리 파커는 멜로디, 리듬, 화성에 변화를 주면서 기존의 고전 재즈나 스윙의 틀에서 벗어나 재즈를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시켰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찰리 파커는 술과 마약으로 인해 34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를 추모하는 공연이 있던 날 하늘에서 하얀 깃털이 내려 왔다고 전해진다.
아일이 노래한 것은 찰리 파커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낀 첫사랑의 감정이다. 찰리 파커의 음악을 듣고 기존에 전공하던 클래식 소프라노를 포기하고 재즈 보컬리스트의 길을 걷게 됐을 정도로 아일의 버드 사랑은 각별하다.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아일은 찰리 파커의 원곡들을 재편곡한 곡들로 1집 <Bird>를 구성했다. ‘lover man’ ‘donna lee’ 등 찰리 파커의 명곡이 동명 제목으로 새롭게 편곡됐고, ‘perhaps’ ‘barbados’ 등은 ‘속삭임' ‘동화 속의 찰리 파커’ 등으로 변신했다. 여기에 그녀가 경험했던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의 기억을 버드의 선율에 녹임으로써 수십 년 전 세상을 떠난,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 숨 쉬는 찰리 파커를 향한 헌사를 완성했다.
<Bird>에 수록된 아일의 음악은 찰리 파커의 원곡들과는 사뭇 다르다. 이번 앨범에는 찰리 파커의 악기인 색소폰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아일의 밝고 투명한 목소리가 그 자리를 채움으로써 밝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일 보컬의 큰 특징은 스캣(scat, 가사 대신 아무 뜻 없는 소리로 노래하는 창법)이다. 아일은 스캣을 통해 음악 자체의 느낌에 빠져 노래하며 우리를 재즈, 버드 그리고 아일의 세계로 안내한다.
찰리 파커와 그의 동료들이 보여줬던 화려한 테크닉의 향연 또한 쉽게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아일의 보컬과 피아노, 베이스, 드럼이 대화를 나누는 듯이 서로 멜로디와 음악을 주고받으며 버드의 음악에 새로운 색을 채운다. 아일의 보컬과 유성희의 피아노는 숲 속에서 아침을 맞는 듯 한 착각을 들게 할 정도로 상쾌하며, 최은창의 베이스와 포레스트 뮤서의 드럼은 깔끔하면서도 그루브(Groove)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아일의 소녀적 감수성을 물씬 느낄 수 있는 앨범 <Bird>, 이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바람과 함께 들으면 더없이 좋은 음악이다. 안효원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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