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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


부모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복수심 사이에서 방황하던 웨인(크리스찬 베일)은 마침내 배트맨의 가면을 통해 해답을 얻는다. <배트맨 비긴즈>(2005)는 그렇게 웨인의 방황이 끝나고 배트맨의 활약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막을 내린다. 이제 배트맨이 고담시의 지붕을 뛰어다니며 악당을 소탕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새로운 배트맨 시리즈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생각은 달랐다. 놀란은 새로운 배트맨 시리즈의 2편인 <다크 나이트>에서 화려한 영웅 놀음 대신 새로운 고민에 직면한 배트맨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놀란의 다른 영화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배트맨 또한 치명적인 혼란 속에서 치열한 자기 검증의 과제를 부여받는다. 과연 배트맨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NOLAN's MISSION 1. 혼란의 바다를 헤엄쳐라


그곳이 가상의 도시 ‘고담’이든(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20세기 말 런던이든(프레스티지, 2006), 백야가 계속되는 알래스카(인썸니아, 2002)든 상관없다. 언제 어디서건 놀란은 영화 속 주인공들을 거대한 혼란의 바다에 빠뜨린다. 그 속에서 용케 헤어 나오는 자는 영웅이 되고, 반대로 강박관념에 발목이 잡힌 자는 처절히 파멸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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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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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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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썸니아>

<메멘토>(2000) <인썸니아> <프레스티지>의 주인공들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하나같이 확고한 신념을 자랑한다. <메멘토>의 레너드(가이 피어스)는 메모, 문신, 습관과 같은 체계를 통해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는 장애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테디(조 판토리아노)가 수차례에 걸쳐 그 체계의 허점을 지적하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는다. <인썸니아>의 도머 형사(알 파치노) 역시 마찬가지다. 도머는 자신의 경험과 느낌에 따라 단호하게 수사를 진행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는 믿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프레스티지>의 앤지어(휴 잭맨)는 아내 줄리아(파이퍼 페라보) 앞에서 맹세한다. “나는 (마술 때문에) 가족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겠어.”


놀란은 이들의 확신에 작은 균열을 일으킨다. 레너드는 자신의 체계에 따라 아내를 죽인 범인을 추적하지만 자꾸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와 죄책감에 휩싸인다(메멘토). 희뿌연 안개 속에서 용의자를 쫓아가던 도머는 동료 햅(마틴 도노반)을 사살한다. 도머의 비리와 관련해 내사과의 조사를 받고 있던 햅. 도머는 자신이 햅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이 고의인지 실수인지 확신하지 못한다(인썸니아). 앤지어 역시 줄리아의 죽음이 마술 중에 매듭을 잘못 묶은 보든(크리스찬 베일)의 책임이라 생각하고 복수심에 불탄다(프레스티지).


NOLAN's MISSION 2. 혼란 속에서도 현실에 발 붙여라


위기 속에서 이들은 점점 더 강박관념에 매달린다. <메멘토>의 레너드는 일이 꼬일수록 아내를 죽인 범인을 찾는 데 몰두하고 <인썸니아>의 도머는 그날의 일을 감추기 위해 사건을 조작한다. <프레스티지>의 앤지어는 보든보다 나은 마술을 선보이기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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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행>


강박관념은 놀란의 영화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기호다. 그의 단편 <타란텔라>(1989) <절도>(1996) <두들버그>(1997)와 장편 데뷔작 <미행>(1998) 역시 정신적 혼란 상태를 그리고 있다. 특히 <두들버그>의 카메라는 방안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남자의 뒤를 쫓는다. 남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쫓아 그것을 죽이고자 한다. 놀란은 영화 전체를 누군가의 시점 쇼트로 처리해 방안에 가득 찬 광기를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토론토영화제, 로테르담영화제에서 호평 받은 <미행> 역시 놀란의 관심사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미행>은 사람들을 미행하는 데 집착하는 아마추어 작가 빌(제레미 테오발트)의 이야기를 다룬다. 콥(알렉스 호)의 뒤를 쫓던 빌은 그가 강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둘은 서로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그때부터 함께 다른 사람의 집에 침입한다.


이들이 겪는 정신적 혼란은 때때로 초현실적인 영역까지 나아간다. 그들은 극심한 혼란에 빠진 나머지 불면증에 시달리고 환영을 보고 악몽을 꾼다. 자신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린 주인공들의 자아는 곧 분열한다. 놀란은 여기서 주인공의 어지러운 정신세계를 분할해 그것을 각각 다른 인물에 투영한다. 바로 이것이 놀란의 영화가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정신세계, 초현실적인 영역을 탐구하는 방식이다. “나는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그리 훌륭한 학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문학을 전공하는 동시에 영화 학회에서 활동하면서 얻은 것이 하나 있다. 그건 수세기 동안 작가들이 누렸던 내러티브의 자유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나는 영화 제작자들 역시 그런 자유를 충분히 즐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놀란의 말대로 그의 영화는 내러티브의 자유를 마음껏 활용한다. 교차편집과 회상 장면을 즐겨 사용하기 때문에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작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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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썸니아>_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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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썸니아>_핀치


놀란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주물러 주인공의 내적 혼란을 바깥 세계의 갈등으로 형상화한다. 놀란의 영화가 초현실적인 정신세계를 심도 깊게 탐구하면서도 끝까지 현실감을 잃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썸니아>에서 햅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의 선의를 확신할 수 없게 된 도머 형사는 두 명의 유사 자아와 대면한다. 그를 자신의 우상으로 여기며 착실하게 수사에 임하는 신참 형사 앨리(힐러리 스웽크)는 도머의 양심을, 도머가 햅을 사살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을 빌미로 자신에게 협력할 것을 제안하는 살인범 핀치(로빈 윌리엄스)는 도머의 비양심을 상징한다. 도머는 이 두 유사 자아 사이에서 길을 잃고 방황한다. 그렇게 놀란은 주인공의 오래 된 신념을 시험한다.


NOLAN's MISSION 3. 신념을 검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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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

놀란은 말했다. “이미 체계화되고 몸에 밴 것은 그것이 처음 생겨났을 때 가졌던 힘과 의미를 상실한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좀 더 본디 뜻에 가까운 등가물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는 놀란이 자신의 주인공들의 신념을 끊임없이 무너뜨리고 그것을 시험하는 이유다. 놀란은 신념이 변질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자신의 주인공들에게 치열한 자기 검증의 과정을 요구한다.


놀란의 시험대 위에서 그의 주인공 몇몇은 끝까지 신념을 지켰고 몇몇은 변질을 들켰다. <메멘토>의 레너드는 허무를 이기기 위해 자신의 기억과 사실을 조작했고 결말에 가서 비양심적인 살인자로 낙인찍힌다. <인썸니아>의 도머 형사는 마침내 모든 사실을 밝히고 앨리의 편에 서지만 방황의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프레스티지>의 앤지어는 초심을 잃고 손을 더럽히면서까지 ‘최고의 마술’을 펼쳐 보든을 이기겠다는 집념을 불태운다. 결국 앤지어는 자기 꾀에 넘어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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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비긴즈>


놀란은 슈퍼 히어로라고 특별대우를 해주지 않는다. 웨인은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죄책감,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다. 그 기억에서 이제 그만 자유로워지고 싶지만 두려움을 떨칠 수 없다. 부모님을 죽인 범인에게 복수함으로써 죄책감을 떨치려 하는 웨인. 그러나 범죄를 저지르기에는 무서운 마음이 든다. 웨인은 이 모든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을 떠나 범죄의 세계를 탐험한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공포에서 벗어나 새로운 목표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거기서 그는 라스 알 굴(켄 와타나베)을 만나고 내면의 공포에 직면하는 법을 배운다. 공포에서 벗어난 웨인은 정의를 위해 싸우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NOLAN's MISSION 4. 새로운 신념을 세워라


중요한 건 여기부터다. 놀란은 자신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웨인을 신념의 시험대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순히 주인공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념을 검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배트맨 비긴즈>는 웨인이 새로운 신념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검증하고 완성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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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비긴즈>_집사 알프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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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비긴즈>_핸리 듀카드


웨인은 <배트맨 비긴즈>에서 두 명의 본보기를 만난다. 한 명은 라스 알 굴(켄 와타나베)―더 정확히 말하자면 핸리 듀카드(리암 니슨)―이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아버지 토머스(라이너스 로체)다. 라스 알 굴의 뒤를 따르려 했던 웨인은 그러나 복수를 강요하는 그의 방법을 거부한다. 집으로 돌아온 웨인은 집사 알프레드(마이클 케인)의 도움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고담시의 정의를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을 재발견한다(알프레드는 웨인의 곁에서 끊임없이 그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결국 웨인은 라스 알 굴(正)과 자신의 아버지(反)의 방법을 변증법적으로 발전시킨다. 그 해답이 바로 배트맨(合)이다. 배트맨은 라스 알 굴이 말한 대로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하는 ‘어둠의 존재’가 되지만 고담시를 파괴하려는 라스 알 굴의 계획을 저지하고자 한다. 그는 고담시의 정의를 수호하던 아버지의 이상을 계승한다. 놀란의 주인공들이 겪은 무수한 자기 검증은 <배트맨 비긴즈>에 와서 비로소 새로운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그러나 웨인의 신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배트맨은 <다크 나이트>에서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지고 그의 신념은 또 다시 시험에 든다. <다크 나이트>에서 웨인은 두 명의 유사 자아와 대면한다. 한 명은 하비 던트(애런 에크하트)고, 다른 한 명은 조커(히스 레저)다. 고담시의 정의 수호를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웨인은 하비 던트와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웨인이 고담시의 정의를 지키는 방법은 하비 던트와 다르다. 하비 던트가 합법적인 방법을 통한다면 웨인은 배트맨의 가면을 쓰고 법체계의 빈틈을 누비는 어둠의 존재다. 가면과 화장에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의 공포심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배트맨은 조커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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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_조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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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_하비 덴트


이제 배트맨은 <인썸니아>의 도머 반장처럼 두 유사 자아 사이에서 방황한다. 고민 끝에 웨인은 영웅의 자리를 하비에게 넘기려한다. 그가 가진 합법적인 힘에 손을 들어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양자택일은 이번에도 배트맨의 몫이 아니다. 하비(正)의 정의감은 레이첼(제이크 질렌할)의 죽음 앞에 무너진다. 하비의 변절 앞에 조커(反)는 배트맨의 정의감을 비웃는다. 결국 배트맨은 <배트맨 비긴즈>에서와 마찬가지로 변증법적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새롭게 수정한다. 배트맨은 영웅의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 범죄자의 누명을 씀으로써 끝까지 고담시의 정의와 희망을 수호한다(合). 놀란의 세계에서 배트맨은 슈퍼 히어로의 껍데기를 버리고 정의라는 알맹이를 챙긴다.


NOLAN's MISSION 5. 이 땅의 영웅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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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에서 신념의 검증을 받는 대상은 배트맨만이 아니다. 조커는 범죄자들이 탄 배와 시민들이 탄 배에 각각 폭탄을 설치하고 범죄자와 시민들에게 상대 배의 폭탄 스위치를 넘겨준다. 자정이 될 때까지 두 척의 배가 모두 무사하면 자신이 두 배의 폭탄 스위치를 누르겠다고 협박한다. 고담시의 시민들은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궁지에 놓인다.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결국 두 쪽 다 스위치를 누르지 못한다. 조커는 자신의 예상과 다른 결과에 당황한다. 놀란은 시민들의 신념을 검증함으로써 조커를 무력화시키고 땅에 떨어진 고담시의 희망을 곧추세운다.      


<다크 나이트>는 ‘놀란식의 영웅’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놀란식의 영웅’의 정체성은 신기한 초능력을 발휘하는 데 있지 않다. 대신 놀란은 끊임없이 고뇌하고 치열한 반성을 통해 나날이 신념을 수정하고 완성해가는 진행형의 영웅을 선보인다. “아침에 일어날 때 우리는 그날을 그동안 살아왔던 방식대로 계속해서 살아가길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작은 부분에서 전과 다르게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배트맨과 같은 인물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점이다. 그는 우리의 갈등을 훨씬 크고 강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아마 새로운 <배트맨> 시리즈의 3편에서 배트맨은 또 한 번 치명적인 혼란과 맞닥뜨릴 것이다. 놀란은 할리우드의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던 슈퍼 히어로를 우리와 함께 숨 쉬고 고민하는 이 땅 위의 존재로 ‘실현’시켰다. 놀란의 배트맨은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놀란의 영화 세계가 배트맨과 함께 언제까지나 치열한 ‘미완성’의 세계에 머무르기를 기원한다. 장성란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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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실직고 2008/08/20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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