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08 베이징 올림픽 중계방송
하지만 색정 넘치는 변덕쟁이 처녀를 감동시킨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멋있는 ‘오빠’도 귀여운 ‘연하남’도 이 사람을 제치지는 못했다. 내게 베이징 올림픽 최고의 영웅은 다름 아닌 MBC 핸드볼 해설위원 임오경 ‘언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중계방송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남자 수영 400m 결승전을 중계하던 SBS 배기완 캐스터는 박태환이 1위로 들어오자 연신 “울어도 좋아요”라고 외치며 정말 울어버렸고 SBS 레슬링 중계석에 앉은 심권호의 막말 해설은 질타를 받았다. MBC는 유도 중계방송에 추성훈을 객원 해설위원으로 초대한 반면 야구 해설을 두고 강병규와 소란을 빚기도 했다. 허구연 MBC 야구 해설위원과 캐스터가 나눈 사담이 전파를 타는 사고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 멤버들이 올림픽 중계방송에 도전한 결과 정형돈, 노홍철, 유재석이 여자 핸드볼과 남자 체조 결승전 중계방송에서 객원 해설위원으로 마이크를 잡아 화제가 됐다.
역대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대거 중계방송의 해설위원으로 나섰다는 점도 이번 올림픽의 이야깃거리 중 하나였다. 전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 임오경 해설위원 역시 올림픽 메달리스트 출신의 스타 해설위원. 특히 임 위원은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하 <우생순>)의 실제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우리나라 여자 핸드볼 팀의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실화를 바탕으로 한 <우생순>이 올해 초 흥행을 기록하면서 여자 핸드볼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관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우생순>의 전설 때문에 임오경 해설위원을 나의 올림픽 영웅으로 꼽은 것은 물론 아니다. 사실 임 위원의 해설은 시청자가 듣기에 그리 편안한 해설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말이 빠르고 발음이 불명확했다. 첫 해설에 나선 지난 8월9일 러시아전 때는 더욱 그랬다. 임 위원은 중계석에 앉아 점잖게 경기를 지켜보는 ‘해설위원’이라기보다 경기장 벤치에 서서 뛰고 있는 선수들에게 실시간으로 움직임을 코치하는 ‘선배’요, ‘언니’ 같았다. 바로 그 점이 임 위원을 나의 올림픽 영웅, 나의 ‘언니’로 만들었다.
‘언니’는 엄격하고 치사하다
‘언니’는 엄격했다. 캐스터가 “어떤 나라와의 경기가 우리에게 좀 더 수월할까요?”라고 물으면 “쉬운 경기 없습니다. 모든 경기가 다 똑같이 어렵습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또 다시 캐스터가 체격이 큰 유럽 선수들이 우리 선수들을 너무 거칠게 몰아세우는 거 아니냐고 안타까워하면 그럴수록 우리 선수들이 빠른 발을 이용해서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언니’는 동정이나 연민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 선수들이 힘든 상황에서도 ‘언니’는 가혹하리만치 냉정했다. 부상도 핑계가 될 수 없었다. ‘언니’는 동정이나 연민이 승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언니’는 언제나 “~해줘야 합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때때로 우리 선수들이 지쳐 있으면 “지금 (선수들) 발이 가만있습니다.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줘야 합니다.”라고 채찍질을 했다. 오심이 나오면 그것을 물고 늘어지면서 안타까워하기보다 심판 성향을 빨리 파악해서 경기에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나가라고 조언했다. 우리 팀이 큰 점수 차로 이기고 있을 때나 한두 점 차의 접전을 벌이고 있을 때나 ‘언니’의 주문은 늘 한결 같았다. 수비 하나 잘 하고 공격 하나 성공하라는 것. 실수는 빨리 잊고 차분하게 기회를 엿보라는 것. 상대가 체격이 좋고 힘이 셀수록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 방심은 언제나 금물이라는 것.
‘언니’는 치사했다. ‘언니’는 상대방이 잘 하는 건 잘 한다고 인정했다. 상대팀 선수가 뛰어난 선수란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얄미운 마음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언니는 당연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해설위원의 권위를 빌려 점잔을 피우지도 않았다. “(러시아 팀의) 아나 카리에바 선수, 얼굴에 큰 점이 있어서 우리끼리 점박이라고 부릅니다.” “(상대팀) 골키퍼가 저렇게 잘 막을 때는 일부러 얼굴이라도 맞추라고 그럽니다.” 언니는 치사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언니’는 정 많고 지혜롭다
‘언니’는 동생들이 자랑스러웠다. ‘언니’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같이 경기장을 누비던 선수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선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질 때마다 ‘언니’는 신이 나서 동생들을 자랑했다. “이제 우리 선수들 보고 몸싸움에 약하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 선수들 열심히 했기 때문에 저런 플레이가 나오는 겁니다.” “오성옥 선수, 핸드볼도 잘 하고 살림도 잘 합니다!” “김온아 선수 슛도 잘 쏘고 얼굴까지 귀엽습니다. 내려가서 안아주고 싶습니다.” ‘언니’가 엄격한 건 다 동생들을 위하는 마음에서였다. 그건 경기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선수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언니’의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중계석과 경기장 사이의 이심전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언니’는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알고 있었다. ‘언니’는 승리를 위해 국가를 들먹이지 않았다. 명예나 복수, 기록 달성 같은 커다란 말이 선수들에게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언니’는 알고 있었다. 대신 ‘언니’는 말했다. “제가 뛸 때는 몰랐는데 여기서 보니까 경기장에서 뛰던 순간이 제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선수들도 그걸 생각하면서 열심히 뛰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언니’는 진짜 스포츠 정신이 무엇인지, 진짜 올림픽 정신이 무엇인지, 진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발목이 시큰거리고, 얼굴에 땀이 흐르고, 팔다리가 천근만근 느껴지는 그 순간, 눈앞의 한 점을 향해서 온 정신을 집중하고 악을 쓰는 그 순간이야말로 네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고 ‘언니’는 부르짖었다. 나한테는 그 말이 “독도를 넘겼네요. 대마도까지 갔어요.”란 말(야구 4강 일본전에서 승리의 주춧돌이 된 이승엽의 홈런을 두고 MBC 허구연 해설위원이 한 말)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었다.
‘언니’의 그 말 앞에서 우리나라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 팀은 또 하나의 ‘우생순’ 신화를 낳았다. 최고의 순간을 만들어낸 선수들 앞에 더 이상 오심 논란도, 승패도, 메달 색깔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스포츠 정신과 올림픽 정신 앞에서 진정으로 아름답게 승리했다. 승리의 순간, ‘언니’는 마침내 울었다. 엄격한 채찍마저 내려놓은 채 온전히 그들의 ‘언니’가 되어 펑펑 울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여자 핸드볼을 사랑합니다.”
저의 ‘언니’가 되어주세요
여자 핸드볼 경기를 지켜보면서 나는 배가 아플 정도로 우리 팀 선수들한테 질투가 났다. 그들에게 ‘언니’는 한둘이 아니었다. ‘언니’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동메달 결정전이었던 헝가리 전 종료 1분을 앞두고 뜻밖의 작전 타임을 신청해 선수들을 불러 모은 임영철 감독. 경기 내내 심각한 표정을 지키고 있던 임영철 감독이 한 명 한 명 딸자식 같은 선수들의 이름을 불렀다. “영란이, 성옥이, 순영이, 정호, 정희, 필희, 정화 뛰어라.” 그는 고참 선수들에게 마지막이 될 올림픽 경기의 대미를 선물했다. 임오경 ‘언니’를 비롯해 임영철 ‘아빠’까지 팀 전체가 한 가족이었다.
아무리 남정네의 온기가 그리워도 희노애락을 같이 하는 인생 지원군의 소중함을 모르지 않는다. 임영철 ‘아빠’에 가족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부디 내게도 임오경 ‘언니’만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 임오경 ‘언니’라면 내가 세상사에 지쳐 울고 있을 때마다 호통 쳐 일으켜 세울 텐데. 그리고 밥을 먹이고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낼 텐데. 그리고 저녁 때쯤 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제야 눈물을 닦아주면서 꼭 안아줄 텐데. 임오경 ‘언니’라면 내 마음이 연약해질 때마다 늘 내 편에서 신속하고 현명한 처방전을 내려줄 것 같다.
임오경 ‘언니’, 동생 한 마리 더 안 키우시겠어요? 핸드볼 못 하면 동생으로 안 받아주시나요? 그럼 이제부터라도 핸드볼을 배워볼까 해요. 살림도 못하고 생김새도 김온아 선수만큼 귀엽진 않아요. ‘언니’는 그런 거 따지지 않고 저의 ‘언니’가 되어 주실 거죠? ‘언니’ 사랑해요. ‘언니’는 저의 2008 베이징 올림픽 최고의 영웅이랍니다. ‘언니’가 최고에요. ‘언니’라서 최고에요! 장성란 기자 (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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