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 미국 LA의 할리우드 포에버 공동묘지. 백파이프가 울리고 검은색 정장을 갖춰 입은 침통한 표정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소중한 이에게 조의를 표합니다.” 추모사도 이어진다. 어, 그런데 좀 이상하다. 장례식 참석자들이 애도를 표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자동차’다. 그것도 전기자동차. 생산된 지 몇 년도 안 돼 정책에 의해 강제로 사라져야 했던 전기자동차의 장례식에서 사람들은 검은 천을 덮은 차에 꽃을 올려놓으며 친한 친구를 떠나보내듯 슬퍼한다.
전대미문의 ‘자동차 장례식’이 치러지게 된 배경은 이렇다. 1996년 캘리포니아에 전기자동차가 출시됐다. 미국의 자동차기업 제너럴 모터스(이하 GM)가 개발한 최초의 근대식 전기자동차 EV1. ‘죽음의 구름’이라 불리는 매연과 주민들의 건강 악화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자취를 감춘 전기자동차를 부활시키기에 이른다. 가솔린을 동력으로 했던 기존의 자동차 못지않게 날쌘데다 유지비도 대등하고 소음과 배기가스 배출량은 현지히 적은 EV1은 순식간에 운전자들을 매혹시켰다. 주유소 가는 번거로움은 사라지고 간편하게 플러그만 꽂으면 되는 전기자동차는 스타들의 지지를 얻으며 환경오염을 막는 미래형 자동차로서 각광받기 시작했다. 멜 깁슨은 인터뷰를 통해 “마치 배트맨 차를 타는 느낌”이라며 흥분했고, 톰 행크스는 <데이빗 레터맨 쇼>에 출연해 “전기자동차로 미국을 구하자”고 외쳤다. 기술력이 갖춰지고 지지자들이 늘어나면서 전기자동차는 대중차로도 양산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후 전기자동차는 제대로 알려지기도 전에 미국에서 자취를 감춰야만 했다. GM사는 소리 없이 EV1 생산 라인을 폐쇄하고 영업진을 해체했다. 정부의 명령에 따라 소비자로부터 EV1을 전량 회수한 뒤 멀쩡하게 굴러가는 차를 무참히 폐기시켰다. 자기 돈으로 구입해 잘 타고 있던 EV1 운전자들은 하루아침에 자동차를 강제로 빼앗겼고, EV1 부서 직원들은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EV1 개발에 젊음을 바친 엔지니어들은 ‘금쪽같은 내 새끼’가 폐차장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전기자동차의 느닷없는 떼죽음에 이들은 GM사 건물 앞에서 “EV1 파기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했으며, 수갑을 차고 경찰차에 올라야 했다. 결국 2006년 캘리포니아엔 단 한 대의 EV1도 남아있지 않게 됐다. 도대체 전기자동차는 왜 사라져야 했을까?
크리스 페인 감독의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나>(Who Killed The Electronic Car?, 2006)는 전기자동차의 몰락과 그 이면에 도사린 음모를 파헤친 다큐멘터리다. 배우 마틴 쉰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전기자동차가 지배적이었던 100여 년 전의 과거를 회상한 뒤, 빠르고 힘 센 가솔린차의 등장으로 근대 자동차시대가 도래하면서 전기자동차가 사라졌다가 1996년 EV1을 통해 근대형 전기자동차가 부활했으나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살해’당한 상황을 추적하며 ‘용의자’를 가려낸다. 가장 직접적인 용의자는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석유 회사와 변화를 두려워한 자동차회사들이다. 그리고 이 같은 외압에 갈대처럼 흔들린 GM사, 석유 산업과 자동차 산업에 대한 통제력이 부재한 정부, 마지막으로 환경보호보다는 SUV를 택한 대부분의 소비자도 전기자동차의 죽음에 한몫했다고 말한다.
멀쩡하다 못해 반짝반짝 광택마저 도는 EV1이 폐차장에서 찌그러지는 장면과 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어떤 비극보다 강렬한 슬픔을 전달한다. 그들이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건 자그마한 전기자동차뿐만이 아니다. GM이라는 거대한 자동차기업에 맞서, 또 정부까지 쥐고 흔드는 석유 산업과 자동차 산업, 통제력 없는 정부와 새로운 것을 거부하는 다수의 소비자들에 맞서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고자 했다. 다윗은 일단 골리앗에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기자동차를 사랑하는 이들, 환경을 지키고 싶은 사람들은 석유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여전히 전기자동차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2006년 선댄스영화제와 트라이베카영화제에서 상영된 바 있는 다큐멘터리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나>가 며칠 전 DVD로 출시됐다. 유가가 급등하고 환경오염이 날로 심각해져가고 있는 지금 미래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묻는 작품이다. 본편에 미처 담지 못한 여러 인터뷰와 전기자동차에 관한 다양한 정보가 부가영상으로 담겨 있다. 청소년에게 교육용 영화로도 손색없는 ‘전체 관람가’ 작품이지만, 어이없게도 DVD의 등급이 ‘청소년 관람불가’다. 이유는 이거다. 소니픽쳐스 홈엔터테인먼트 코리아의 다른 영화 예고편이 부가영상으로 실려 있는데, 그 영화들이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기 때문이란다. 다시 한 번 대한민국 영상물등급위원회의 대단한 심의기준에 탄복해본다.주유소에서 “가득이요”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 요즘이다. 주유소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역한 휘발유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는 자동차. 휴대폰이나 아이팟처럼 하룻밤 충전으로 소음과 배기가스 없이 달리는 자동차.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나> DVD를 보고 나니 이런 전기자동차 하나 갖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정미래 기자(FILMON)
소셜웹 반응글
'CULTURE 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베토벤 바이러스> - 꿈꿔라, 이름 없는 자들이여 (0) | 2008/09/26 |
|---|---|
| ‘라틴아메리카의 정열’이라는 수수께끼 -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을 다녀와서 (2) | 2008/09/13 |
|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나> DVD - 석유로부터의 독립선언 (1) | 2008/08/26 |
| [’08 나만의 순결한 여름아이템③] 영산도에서 보낸 한 주 (6) | 2008/08/12 |
| The Script <The Script> - 아일랜드를 뛰쳐나온 아이리시 보이 (0) | 2008/08/07 |
| [’08 나만의 순결한 여름아이템②] 디저트 천국, 패스트푸드점에서 즐기는 천원의 만찬 (1) | 2008/08/04 |






댓글을 달아 주세요
나날이 여름이 길어지고 있는 지금, 누구나 꼭 한 번쯤을 봐야 하는 영화네요.
2008/08/26 21:57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은 캐안습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