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아이돌의 역사
특별한 사람들만 모인 연예계에서도 ‘아이돌’은 특별한 존재다. 지금의 대중문화에서 아이돌이 차지하는 의미를 설명하기에 사전의 뜻풀이는 역부족이다. 아이돌은 원래 특정 분야에 관계없이 우상으로 받들어지는 인기인을 가리키는 말. 1990년대 들어 국내 연예계의 판도가 기획사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연예 기획사의 역사가 일찍 시작된 일본에서 지금의 아이돌이란 용어가 수입돼 쓰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아이돌은 그 조직, 준비 단계부터 등장, 활동에 이르기까지 기획사의 치밀한 계획이 밑받침된 인기 가수를 지칭하는 말이 됐다. 특히 가요 시장의 주 소비층으로 떠오른 10대 청소년들의 관심과 사랑은 아이돌의 존재 이유로 여겨진다. 10대 청소년들의 기호를 고려해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어린 인물로 구성되는데 요즘은 15, 16세에 데뷔하는 아이돌도 속속 생기고 있다. 솔로나 혼성 그룹보다는 남성 그룹이나 여성 그룹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가수로 데뷔한 후 가요계뿐 아니라 연기, MC, 예능 프로그램 등 여러 방면에서 멤버 개개인이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것이 관례로 자리 잡고 있다. 한 마디로 아이돌은 지금까지 연예계가 만들어낸 최고의 ‘종합선물세트’인 셈이다.
우리나라 가요계에서 아이돌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996년 ‘H.O.T.’가 데뷔하면서부터. 이에 앞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역할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1992년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10대 청소년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며 국내 가요시장에 10대 청소년 중심의 팬덤 문화를 형성했다. 여기에 연예 기획사의 전문 기획력이 더해지면서 본격적인 아이돌 시대가 열렸다. H.O.T.가 데뷔와 함께 10대 청소년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데 이어 1년 후 6인조 남성 아이돌 ‘젝스키스’가 등장해 H.O.T.와 경쟁 구도를 이루며 활발히 활동했다. 곧 이어 여성 아이돌의 맞수 체제도 생겼다. 3인조 여성 아이돌 ‘S.E.S’가 1997년 데뷔한 후 1998년, 4인조 여성 아이돌 ‘핑클’이 등장한 것. H.O.T.와 젝스키스, S.E.S와 핑클의 라이벌 구도에 힘입어 아이돌은 국내 가요계에서 맹위를 떨쳤다. 이들의 인기를 이어받은 이는 ‘신화(1998년 데뷔)’와 ‘god(1999년 데뷔)’. 2000년과 2001년 각각 젝스키스와 H.O.T.가 해체한 이후 신화와 god의 전성기가 이어졌다.
1990년대 데뷔한 아이돌을 ‘아이돌 1세대’로 이름 붙인다면 2000년대 데뷔한 ‘아이돌 2세대’의 활약 역시 계속되고 있다. ‘보아(2000년 데뷔)’, ‘비(2002년 데뷔)’ ‘세븐(2003년 데뷔)’ 등의 솔로 아이돌은 국내 가요계뿐 아니라 해외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뒤이어 2004년 ‘동방신기(5인조 남성 아이돌)’, 2005년 ‘SS501(5인조 남성 아이돌)’, 2005년 ‘슈퍼주니어(13인조 남성 아이돌)’, 2006년 ‘빅뱅(5인조 남성 아이돌)’, 2007년 ‘원더걸스(5인조 여성 아이돌)’, ‘소녀시대(9인조 여성 아이돌)’, 2008년 ‘샤이니(5인조 남성 아이돌)’ 등 여러 아이돌 그룹이 끊임없이 등장했다. 더욱이 지금은 각 아이돌 그룹마다 다양한 개성과 특기를 개발해, 이른바 아이돌 세력의 군웅할거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소년 소녀의 아름다움을 벗고 지혜로운 생활인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약 10년 동안 실로 뛰어난 용모에 끼 많은 청춘들이 아이돌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돌은 대중문화의 한복판에서 소년 소녀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젊은 육체로 무대 위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선보이는 그들은 그러나 무대 밖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수줍게 웃는다. 그들의 싱싱한 청춘과 멋쩍은 순수함은 시대를 떠나 언제나 아름답다. 아이돌은 꼭 새파란 청춘이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화수분에 붙여진 이름 같다.
하지만 아이돌도 나이를 먹는다. 밥 대신 이슬만 먹을 것 같고, 자고 일어나도 눈곱 하나 끼지 않을 것 같고, 화장실 한번 가지 않을 것 같은 특별한 청춘들도 세월을 피해가지 못한다. 야속한 세월 앞에 우리나라 아이돌 1세대는 어느덧 서른 언저리에 이르렀다. 학창시절 그들을 향해 “언니!”, “오빠!”를 외치던 내가 이제는 아이돌을 향해 “사랑하는 동생들!”을 외치는 나이가 됐으니 당연한 얘기다.
10년 세월은 아이돌 1세대에게서 소년 소녀의 아름다움을 빼앗아갔다. 푸른 젊음을 전면에 내세워 활동했던 그들에게 이 점은 커다란 약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은 야속할지언정 그냥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공명정대하다. 누구 하나 봐주는 법 없고 빼앗아가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만큼 남기고 가는 것이 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1세대 아이돌 스타에게 청춘을 빼앗아간 대신 그만한 경험과 지혜를 남겼다.
사회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본 이라면 안다. 한 분야에서 10년 세월을 버틴다는 게 얼마나 녹록지 않은 일인지. 처음에야 꿈을 이룰 수 있다면 어떤 역경이든 참고 견딜 수 있을 것 같지만 먹고 사는 일이 어디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된단 말인가. 그것도 인기라는 뜬구름을 좇아 전국의 날고 기는 재간꾼들이 다 모인 연예계에서 10년을 살아남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이었겠는가. 사람이 먹고 살려고 하는 일 중에 알고 보면 매정한 구석 없는 일이 없지만 연예계처럼 눈 깜빡할 새 성패가 갈리고 그 명암이 하늘과 땅 차이인 곳도 없을 것이다. 제아무리 재능과 실력이 있다 해도 알아봐주는 이 없으면 쥐구멍 볕 들 날만 기다려야 하고, 운 좋게 빛을 본다 해도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대중의 입맛에 맞춰 하루하루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사생활은 포기한다 해도 아니 땐 굴뚝에 나는 연기까지 조심해야 하는 곳. 거기다 잘 되든 못 되든 매일같이 전 국민의 입방아에 불려다니는 것은 물론이요, 신기술로 무장한 누리꾼들 무서워 밤이나 낮이나 말 한마디, 표정 하나 단속해야 하고, 나이 먹는 것 갖고도 손가락질을 받아야하니 그게 어디 사람 답게 사는 것이겠는가. 인기는 달콤하고 화려하지만 그에 따르는 희생은 쓰고 냉엄하다.
대한민국 아이돌 1세대는 지난 10년 동안 그 점을 몸소 겪었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지금의 활동이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인 동시에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특별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대신에 그들은 지혜로운 생활인이 되었다. 살아남는 법을 깨우친 생활인 말이다. 폼에 살고 폼에 죽던 젝스키스의 리더 은지원은 까까머리 ‘은초딩’이 되어 둘리 표정을 흉내 낸다. 긴 생머리를 날리며 요정처럼 춤추고 노래하던 핑클의 이효리는 시골 마을에서 자다 깬 얼굴로 나와 껄껄대며 웃는 ‘육오걸’이 됐다.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춤추던 신화의 전진은 개그맨들과 함께 넘어지고 뒹구는 ‘잔진’으로 활약 중이다. 10년 전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우리들의 우상은 이제 천상의 계단을 내려와 우리 곁에 좀 더 가까이 섰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밥을 먹고,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붓고, 하루에도 여러 번 화장실을 드나든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서른, 잔치는 계속된다
아이돌 1세대는 10년 사이에 신비감을 벗고 생활인의 인간미를 입었다. 소년 소녀의 아름다움도 위력적이지만 세월에 깃든 지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아름답다. 그들은 여러 가지 상황에 능숙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알고, 기획사의 눈치를 살피는 대신 자신의 고집을 내세울 줄 알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돋보이는 요령을 안다. 이 모든 것이 10년 세월의 결과물이다. 인생의 달고 쓴 맛을 모두 겪은 생활인의 넓은 아량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래서 난 ‘은초딩’ 은지원이 빅뱅의 탑만큼 멋있고, 원더걸스의 소희만큼이나 ‘육오걸’ 이효리를 닮고 싶고, ‘잔진’ 전진이 ‘샤이니’의 민호만큼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지난 7월 이효리가 3집 앨범으로 컴백할 때다. 2집 앨범의 표절 논란과 연기 도전 실패, 서른이라는 나이를 들어 언론은 이효리의 인기가 침체 위기에 빠졌다고 평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3집 앨범을 발표하는 그에게 대중 매체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지사. 드디어 앨범이 공개되고 이효리가 컴백 무대에 섰다. 음악을 듣고 컴백 무대를 보고 나니 괜히 내 마음 한 구석이 뻐근해졌다. 현재 가요계 유행에 편승하는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힙합 음악으로 앨범을 꾸민 고집이나 컴백 무대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몇날며칠 들인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가 냉정한 대중의 평가를 앞두고 자신이 한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인지 얼마나 큰 부담을 느꼈을까 생각하니 눈물을 쏟을 뻔 했다. 급기야 이효리가 잘 알고 지내는 언니처럼 친근하게 느껴져 전화를 걸어 축하인사를 전해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친구 말마따나 이게 다 내가 오지랖 넓은 걸로 치면 금메달을 따고도 남을 푼수라 그런 것이리라.
하지만 오대양 넓이의 오지랖을 자랑하는 푼수로 남는다 해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나의 첫 번째 우상들과 내가 세월의 풍파를 함께 헤치고 나가는 동병상련의 처지라는 사실 말이다. 나도 그들을 따라 지혜로운 생활인이 되고 싶다. 공자님 말씀대로 서른은 뜻이 확고히 서는 나이(而立)가 아니던가. 이토록 경사스런 나이에 잔치를 끝내는 건 당찮은 일이다. 광대를 부르고 풍악을 울려서 잔치를 계속해야 마땅하다. 이제부터는 우상들의 잔치가 아니라 새옹지마 인생사를 온몸으로 이겨나가는 생활인들의 잔치다. 얼씨구나절씨구나, 지화자, 좋다! 장성란 기자 (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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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가는 글 잘 보고 갑니다.
2008/09/02 23:51그들을 보고 자라고, 그들과 함께 늙어가는 처지라 더 그런거 같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