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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는 내게 미지의 대륙이다. 아직껏 그곳의 땅 한 번 밟지 못했고 문화나 역사를 제대로 탐구해본 적도 없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를 ‘정열의 대륙’이라고 부른다는 것쯤은 귀동냥으로 알고 있다. ‘라틴아메리카’라는 말도 수수께끼 같은데 ‘라틴아메리카의 정열’은 또 무어란 말인가. 그저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땀 흘려 일하는 구릿빛 피부의 사람들이나 요염하고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고 삼바축제에서 격렬하게 춤추는 무희를 떠올릴 뿐이다. 판에 박은 그림 속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정열’의 정체를 건져 올리기 쉬울 리 없다.


‘라틴아메리카의 정열’이라는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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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네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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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대학 2학년 때던가. 시 쓰기 수업에서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강의 백일몽>과 파블로 네루다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과제를 내준 적이 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라틴아메리카 시인의 시집을 잡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시집을 살 때만 해도 이번에야말로 세계적인 문호의 탁월한 관찰력과 표현력을 빌어 ‘라틴아메리카의 정열’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시집 속에 펼쳐진 라틴아메리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특히 네루다의 시는 더 했다. 뭐랄까 라틴아메리카의 풍요로운 대자연을 배경으로 인간의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과 온갖 욕망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노래한다는 인상을 받긴 했다. 한데 이십 평생 늘 남의 눈치를 살피며 점잖은 ‘척’ 살아온 내가 모든 감정과 욕망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네루다의 시를 이해하기란 역부족이었다. 한 구절, 한 구절 무슨 말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벌써부터 친구들에게 네루다를 읽었다고 뻐길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뻐기기는커녕 과제가 걱정이었다. 급기야 과제 제출 날짜를 하루 남기고 인터넷을 뒤져 거짓 감상을 지어내다 포기한 후 이실직고하는 심정으로 ‘아무리 읽어도 모르겠다’는 내용의 독후감을 썼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이미 내게 ‘라틴아메리카의 정열’은 미지의 단계를 넘어 어떤 신비의 대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은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였다. 이번에는 로르카와 네루다 대신 라틴아메리카가 자랑하는 유명한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를 믿어보기로 했다. 과연 그들은 내게 ‘라틴아메리카의 정열’이라는 신비의 정체를 속 시원히 발가벗겨 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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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더위의 햇볕과 초가을의 바람이 만난 2008년 9월의 어느 날, 덕수궁미술관을 찾았다. 라틴아메리카의 뜨거운 정열과 만나기 위해 조용한 고궁 안으로 들어선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미술관에 들어서기 앞서 벤치에 앉아 잠시 호젓한 기분을 즐기고 싶은 마음을 누를 수 없을 만큼 9월의 덕수궁은 고즈넉했다. 나무 그늘에서 설핏 졸다가 본격적인 전시회 관람에 나섰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건져 올리는 보라

전시는 192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벽화운동에서 시작해 그들의 역사와 정체성을 고민한 작품들을 거쳐 20세기 라틴아메리카 회화의 초현실주의 경향을 살핀 후 구성주의 및 옵아트 작품들을 둘러보는 순서로 짜여 있었다. 첫 번째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강렬한 색채 감각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라틴아메리카의 화려한 색채 감각은 풍요로운 자연 자원 위에 꽃핀 마야왕국, 아스텍왕국, 잉카제국 등의 위대한 고대문명과 에스파냐의 오랜 식민지로 있는 동안 아프리카 등지에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흘러들어 뒤섞인 데 따른 것이라고 안내문은 설명하고 있었다.

과연 설명대로 그림마다 기름진 흙빛과 신비로운 하늘빛이 선명하게 서려 있었다. 누구보다 비옥한 토양을 밟고 푸른 하늘을 이고 살아가는 민족이기 때문이리라. 디에고 리베라의 ‘티완테펙의 목욕하는 사람’에서 흙빛을 닮은 살빛의 인디오 여인은 푸른 잎사귀에 둘러싸인 채 허리를 구부려 머리를 감는다. 젖가슴의 풍만한 곡선이 유려하게 아래로 흐르고 그 주위를 신비한 보랏빛이 감돌고 있다. 그 보랏빛은 특별하다. 분명 목욕하는 여인을 신비롭게 비추고 있지만 결코 보는 이를 압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디오 여인의 아름다움이 저 멀리 손에 닿지 않는 천상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이 땅 위의 것임을 투명하고 은은하게 설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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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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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완테펙의 목욕하는 사람

에두아도르 킹맨의 ‘무제’도 보랏빛이 두드러지는 그림이다. 동냥하듯 빈 그릇을 내미는 퀭한 눈의 누군가. 푸른 보랏빛이 그 사람의 슬픈 표정을 에워싼다. 여기서 보랏빛은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현실을 가만히 끌어안는다. 보랏빛은 이 땅의 현실에서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건져 올리는 그물과 같다. 그 그물을 통하면 라틴아메리카의 착취당한 역사와 가난한 현실을 직시한 채 그들의 검붉은 살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라틴아메리카의 모더니즘 화가들이 “원주민 문화에 기초한 새로운 민중예술을 구현”하려는 바람에서 다양한 문화의 결합에 주목함으로써 “자신들이 누구인지 묻고, 이를 풍부한 색채 감각과 원초적인 조형미를 통해” 표현했다는 설명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는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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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흑인 누드

라틴아메리카의 자연에서 대상과 배경은 따로 있지 않다. 후안 비센테 파비아니의 ‘누드-흑인 누드’, 에우랄리오 톨레도 도바르의 ‘나라의 열매들’, 호세 안토니오 벨라스케스의 ‘산 안토니오 데 오리엔테 풍경’을 보라. 육중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알몸의 흑인 여성 뒤로 강렬한 선과 색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누드-흑인 누드). 세 여인과 옥수수, 커피, 카카오나무 중에 어느 것이 주인공이고 어느 것이 배경인지 구분할 수 없다(나라의 열매들). 사람과 마을과 자연이 한 데 섞여 원근감조차 희미할 정도다(산 안토니오 데 오리엔테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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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열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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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안토니오 데 오리엔테 풍경

이 그림들 속에서 인간과 자연은 하나다. 인간이 자연을 우선하지 않고, 자연 역시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때문에 인간의 모든 감정과 욕망은 낮과 밤이 번갈아 오고 때가 되면 비가 내리는 대자연의 섭리 안에서 그 자체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라틴아메리카 화가들은 익살스러운 방식으로 그러한 깨달음을 화폭에 옮겼다. 막스 히메네스 우에테의 ‘창가의 여인’과 페르난도 보테로의 ‘브래지어 차는 여자’는 표정 하나로 인간 감정의 찰나를 기가 막히게 포착한다.

창가에 기대어 두 눈을 치켜뜨고 있는 여인(창가의 여인). 애써 꾸밈없는 표정이 신랄하다. 창가의 분홍색과 실내의 검정색, 여인의 거대한 몸집이 주는 포근한 느낌과 작은 얼굴에 드러난 뾰족한 표정의 대비 효과가 절묘하다. 계속해서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삶의 순간순간 서로 다른 것들이 한 자리에 어울려있는 것을 목격할 때의 기분이 든다. 귀여운 꼬마 아이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잠자리 날개를 뜯고 있는 모습이라든가 분장을 반쯤 지운 찰리 채플린의 얼굴에서 슬픈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의 기분 말이다. 인간의 삶은, 더 나아가 자연은 늘 한 가지 줄기로 정돈되어 있지 않다. 따뜻한가 하면 차갑고, 추한가 하면 아름답고, 즐거운가 싶으면 금방 슬퍼지게 마련이다. ‘창가의 여인’의 두 눈동자는 자연의 복합적인 생리가 드러난 찰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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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지어 차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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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여인

‘브래지어 차는 여자’는 또 어떤가. 아직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남자를 앞에 두고 서서 위풍당당하게 브래지어를 차는 여자의 거대한 뒷모습. 여자가 눈꺼풀을 내리깐 채 아무 것도 모르는 얼굴로 잠들어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얼마나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안 봐도 눈에 선하다. 눈에 보이는 장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재치를 끄집어내는 솜씨에 무릎을 치게 되는 그림이다. 전시회를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브래지어 차는 여자’의 표정을 흉내 내고 있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정열’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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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실컷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결과적으로 이번 전시는 로르카와 네루다가 내게 ‘라틴아메리카의 정열’에 대해 가르쳐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여준 셈이 됐다. 아니다. 그들이 내게 보여준 것이 아니라 내가 이번 전시를 통해 비로소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됐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니까 ‘라틴아메리카의 정열’은 애초부터 어떤 ‘신비’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 ‘신비’의 껍질을 벗긴 뒤에라야 그 실체를 정확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허구한 날 점잖은 척 하며 아는 것을 으스대려했던 내가 ‘라틴아메리카의 정열’이 무엇인지 쉽게 알 리 있었겠는가. 막연히 열대의 태양 아래 땀을 흘리고 손바닥만 한 옷을 입고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그대로 인간의 모습을 인정하고 숱한 감정과 욕망의 용광로 안에서 자연과 함께 뒤섞여 살아가는 것이 바로 ‘라틴아메리카의 정열’의 근본이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적어도 라틴아메리카가 솔직하지 못한 꽁생원에게 그 정열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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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네루다

집에 돌아와 책장에서 <강의 백일몽>과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다시 꺼냈다. 괜히 로르카와 네루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읽어볼 참이다. 보물을 찾으려는 탐욕스런 해적의 눈빛을 거두고 느껴지는 대로 시구를 따라 읽어 내려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다 반짝이는 옥수수 알을 줍는다 해도 이번에는 절대 으스댈 궁리를 하지 않으리라. 네루다의 ‘책에 부치는 노래 I’을 읽으니 그랬다가는 그에게 호되게 혼날 것 같다. 장성란 기자(FILMON)


                                                (상략)


                                           어떤 책도 나를

                                           종이로 쌀 수 없었고,

                                           인쇄로

                                           나를 채울 수 없으며,

                                           거룩한 간기(刊記)로도 채울 수 없고,

                                           여태껏 내 눈을

                                           덮지도 못했다.

                                           나는 책에서 나와 과수원으로 살러 간다

                                           내 목쉰 노래 일족(一族)과 함께,

                                           달아오르는 금속 일을 하러 가고

                                           산 속 난롯가에서

                                           훈제 쇠고기를 먹으러 간다.


                                                 (중략)


                                           신발에는 먼지가 낀 채

                                           나는 가는 중이다

                                           신화에서 자유롭게 :

                                           책들은 서가로 보내자,

                                           나는 거리로 나가련다.

                                           나는 삶 자체에서

                                           삶을 배웠고,

                                           단 한 번의 키스에서 사랑을 배웠으며

                                           사람들과 함께 싸우고

                                           그들의 말을 내 노래 속에서 말하며

                                           그들과 더불어 산 거 말고는
                                           누구한테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었다. 


- 파블로 네루다의 시 ‘책에 부치는 노래 I’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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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foog.com BlogIcon foog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성스러운 포스팅 잘 봤습니다. 한번 가봐야겠네요. 저 풍경화 특히 맘에 드는군요. :)

    2008/09/13 14:16
  2. Favicon of http://whispersweetnothings.tistory.com BlogIcon 이실직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foog님은 전시를 어떻게 보실지 궁금하네요. ^-^

    2008/09/14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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