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법이 관건이다
<황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으로 건너간 영국인 종군기자 조지 호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전쟁 드라마. 호그(조나단 리스 메이어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의 실상을 취재하다 일본군에 붙잡힌다. 총살되려는 찰나, 잭(주윤발)이 이끄는 중국 유격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호그. 최전선을 취재하기 위해 잭을 따라가려 하지만 잭은 호그를 ‘황시’에 데려다 놓는다. 황시는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 열악한 환경과 아이들의 적대적인 태도 때문에 하루 빨리 황시를 떠날 생각을 하던 호그는 적십자사 간호사 리(라다 미첼)의 도움으로 아이들에게 애정을 갖게 되면서 황시에 남기로 결심한다. 이후 호그는 아이들과 힘을 합쳐 황시의 환경을 개선해 나간다. 그러나 좋은 시간도 잠시, 아이들이 징병 위기에 처하자 호그는 만리장성 서쪽 끝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다는 계획 아래 아이들을 데리고 험한 산맥과 사막을 건넌다.
<더 걸>은 자신이 살고 있는 ‘파사우’ 시의 숨겨진 역사를 파헤친 서독 여성 안자 로스무스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 총명하고 명랑한 소냐(레나 스톨체)는 어릴 때부터 ‘필징’ 마을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2차세계대전 시절의 내 고향’이란 주제의 에세이 공모전에 응모하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던 소냐는 히틀러에게 저항했던 것으로 알려진 ‘필징’ 시의 성직자와 지역신문 편집장이 친히틀러 세력으로 활동하며 유대인 차별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학 진학 후에도 계속해서 필징의 역사를 파헤치는 소냐. 이에 필징 시는 자료 조사를 방해하고 시민들은 소냐의 가족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급기야 노골적인 협박과 폭력이 계속되자 소냐는 가족의 안전과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고민한다. 결국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로 결심한 소냐는 필징 시를 상대로 한 재판에서 승소함으로써 필징 시의 역사를 바로잡는다.
<황시>가 전쟁의 참극 속에 피어난 감동 실화를 소재로 삼았다면 <더 걸>은 로스무스의 실화를 통해 독일 사회의 위선을 고발한다. 간단히 말해서 <황시>는 아름다운 역사를, <더 걸>은 부끄러운 역사를 요리의 재료로 삼은 셈이다. 재료가 다른 만큼 두 영화의 요리법 또한 다르다. <황시>는 역사 속 미담을 대중적인 감동 드라마로 풀어낸다. 조나단 리스 메이어스, 주윤발, 양자경 같은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는 것은 물론이요, 전쟁의 참상을 묘사한 전반부를 지나 호그와 아이들 사이에 국적을 뛰어넘은 우정이 싹트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 익히 봐온 전쟁 드라마의 문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 <더 걸>은 위선의 역사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과정을 코미디로 그린다. <더 걸>은 시작부터 재치 넘치는 상황 묘사와 편집으로 소냐의 성장 과정을 집약한다. 라틴어 선생님이 소냐에게 시험 문제를 적은 쪽지를 미리 건네주는 일화를 통해 소냐가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았다는 사실을, 교생 선생님이 등굣길에 소냐를 태워주는 장면을 통해 둘 사이에 싹트는 사랑을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초반의 리듬감과 익살스러운 분위기는 소냐가 본격적으로 파징 시의 역사를 파헤치기 시작한 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영화가 다루는 역사는 무겁지만 영화의 분위기는 결코 침울하지 않다.
<황시>와 <더 걸>의 요리법은 각각 설득력이 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아이들을 구한 조지 호그의 실화는 그야말로 대중적인 감동 드라마로 각색하기에 안성맞춤인 소재. <쉰들러 리스트>(1993) <호텔 르완다>(2004)에서 보듯 인간성을 상실한 전쟁터에서 인간애를 지켜낸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더욱이 <쉰들러 리스트> <호텔 르완다> <황시>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그 감동은 배가 된다. <더 걸>은 보다 참신한 방법을 택했다. 안자 로스무스의 실화를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 그것도 코미디로 완성한 것. 영화는 코미디의 재치를 빌려 민감한 역사 문제를 좀 더 유연하게 풀어낸다.
요리법에 충실했나?
<황시>와 <더 걸> 모두 재료에 맞는 요리법을 택했지만 그 요리법에 충실했느냐 하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황시>는 호그의 심경이 변화하는 계기를 주도면밀하게 그리는 데 실패한다. 무엇보다 종군 기자로서 취재 열기에 불타던 호그가 왜 순식간에 황시에 남기로 마음을 바꾸는지 설명이 부족하다. 거기다 호그와 아이들 간의 갈등과 우정, 호그-리-잭의 삼각관계 등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도 문제다. 때문에 감동 드라마에 필수적인 극적인 얼개가 부실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더 걸>의 코미디는 놀라운 효과를 거둔다. <더 걸>의 익살스러운 화법은 로스무스의 실화가 던지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독일 사회의 위선을 풍자하며 영화의 주제의식을 부각시키는 데 이바지한다. 과연 1990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수상작다운 요리법이다.
두 영화를 비교할 대목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주인공을 그리는 방식이다. <황시>의 호그는 한마디로 영웅이다. 물론 영화 초반, 황시의 아이들을 돌보기보다 개인의 취재 욕심을 채우려하는 호그의 모습이 그려지긴 한다. 하지만 황시에 남기로 결심하고부터 호그는 결코 흔들림 없는 영웅으로 돌변한다. 힘든 상황에서도 기지를 발휘해 황시의 아이들을 배부르게 하고, 위기의 순간 과감한 결단을 내리고 주변의 두려움을 진정시킨다. 후반으로 갈수록 황시의 아이들뿐 아니라 영화 자체가 맹목적으로 호그를 믿고 따른다는 느낌이다. 여기에는 걸출한 아시아 배우 주윤발, 양자경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지만 드라마의 얼개가 엉성한 나머지 배역의 무게에 걸맞은 역할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도 한몫한다. 영화가 호그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최고의 순간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순간이다. 실존 인물의 인터뷰 영상 속에서 호그는 일거수일투족이 예사롭지 않은 영웅으로 박제된다.
온갖 협박과 폭력을 무릅쓰고 끈질기게 역사의 진실을 밝힌 로스무스도 호그 못지않은 영웅이다. 그러나 <더 걸>의 소냐는 <황시>의 호그와 다르다. 때때로 두려움을 느끼고 고민하는 소냐는 우리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의 용기가 더욱 값지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역시 <더 걸>의 마지막 장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 걸>의 마지막 장면, 소냐가 국제 사회의 인정을 받자 필징 시는 태도를 바꿔 소냐의 흉상을 시청에 전시하기로 한다. 흉상 제막식 날 소냐는 시민들로부터 박수 받기를 거부하며 “나더러 그만 하라는 거냐!”고 소리친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호의 작전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뿐 아니라 소냐가 갖고 있는 피해의식과 불안을 동시에 보여주는 명장면. 인간 현실의 복잡다단한 면이 그대로 전해진다.
두 영화의 인상을 요리에 비하자면 <황시>는 주재료 외에 어떤 부재료나 양념이 들어가지 않은 소금구이와 비슷하다. 그나마 제 때 뒤집지 않아 설익은 맛이 나는 것이 안타깝다. 그에 비해 <더 걸>은 달고 쓴 맛이 골고루 살아있어 감칠맛 나는 산나물 비빔밥 같다고 할까. 반찬이 따로 필요 없는 훌륭한 한 그릇 음식이다. 제대로 굽기만 하면 소금구이도 산나물 비빔밥 못지않은 산해진미가 될 수 있다. 앞으로 더욱 맛있는 ‘역사 요리’를 맛보게 되길 기대한다. 재료에 걸맞은 요리법을 제대로 따랐다면 소금구이도, 산나물 비빔밥도, 아니면 또 다른 요리도 언제든 환영이다. 장성란 기자 (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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