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날 개봉한 두 편의 한국영화 <고고70>과 <모던보이>는 각각 군사정권과 일제 강점기라는 민감한 시대를 건드린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군화에 짓밟힌 70년대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음악영화’라는 장르를 충실히 따르며 순수한 쾌감을 전해주는 <고고70>이 시대를 다루는 기존 한국영화의 틀에서 한걸음 나아간 데 비해, 일제시대의 낭만을 부르짓는 <모던보이>는 원작소설과 결말을 달리 하면서까지 기존의 틀을 벗어나길 망설여하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그런지] <고고70>과 <모던보이>가 지난 10월 2일 동시에 개봉했는데요. 둘 다 하반기 한국영화 기대작이고, 시대극이라는 공통점이 있죠. 물론 작품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지만 말이죠.
[엄훠나] 이미 여러 블로그에서 두 영화를 비교한 글이 많이 나왔더군요.
[그런지] 둘 다 일제 강점기(<모던보이>)와 군사정권(<고고70>)이라는 민감한 시대를 다루고 있죠. 또한 두 영화 모두 오프닝을 자료화면으로 구성해 시대극의 클리셰를 따르고 있네요.
[이실직고] 경기 불황과 연관이 있는 듯 해요. 불경기에는 복고가 잘 팔리는 법이잖아요. 얼마 전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 '라디오 스타'에 나와서 "과거는 언제나 아름다"운 거라고 한 말마따나.ㅋ
[엄훠나] 그런데 복고 유행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잘 나갔던 한 때'를 추억하는 영화는 또 아니에요
[이실직고] 그건 어느 정도 성숙한 시선이 느껴지는 부분인 거 같아요.
[엄훠나] 특히 <고고70>에서는 폭압의 시대에 대해 꽤 날카롭게 들이대는 이야기니까요. <모던보이>는 다소 낭만화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서도.
[이실직고] 일단 영화의 겉모양이나 홍보는 과거의 화려함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후반에 들어 확실히 시대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구석이 있죠. 특히 <고고70> 같은 경우는 '이렇게 힘든 군사정권 시기도 악으로 깡으로 버텼는데 오늘도 그렇게 한번 견뎌보자'하는 메시지가 읽히는 측면이 있었어요.
[엄훠나] ㅋㅋ 너무 잔인한데..??
[이실직고] 그런 점 때문인지 저랑 따로 영화를 본 친구는 영화가 당시의 시대적 아픔을 너무 쉽게 낭만적으로 이겨내는 것처럼 묘사한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그 반대였는데 말이에요.
[엄훠나] <고고70>을 보면서 저도 그 점이 참 궁금했어요. 그 시대를 직접 체험한 세대들은 물론 공감이 컸겠지만, 촛불을 경험한 요즘 세대들도 영화 속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전경들이 데블즈의 리사이틀 공연장을 습격하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특히 순수한 놀이에 대한 열정을 공권력이 왜곡하고 억압하는 과정이 묘사되잖아요.
[이실직고] 네. 그게 꼭 거대한 집단 문화가 발현되는 지점처럼 보이기도 해요. 경찰과 대립하는 장면이라든가...
[엄훠나] 그리고 영화를 보면 은근히 현재와 맞물리는 부분이 꽤 많아요. 이를테면 국가가 음란 문화를 유포시킨다고 고고장을 모두 폐쇄시킨다던가 하는 부분은 몇 년전 공중파에서 벌어진 홍대 언더라운드 밴드의 성기 노출 사건을 계기로 홍대 공연장에 대대적인 단속이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하죠.
[그런지] 전 오히려 <고고70>이 폭압의 시대를 참 우회적으로 표현해서 좋았는데요. 왜냐하면 이건 ‘음악영화’지 ‘정치영화’가 아니니까요. 그런 점에서 <고고70>은 ‘진짜’ 100% 음악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데블스 멤버들이 경찰에 잡혀가서 빠따 몇 대 맞고 순순히 동료 뮤지션들 고자질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얘네들은 정말 음악만 하는 애들이구나, 라는 걸 느끼게 하죠.
[이실직고] 네. 저도 그 점에 공감해요. 영화에서 보듯 또 우리가 피부로 느끼듯, 사회정치적인 문제가 꼭 사회정치적인 부분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잖아요.
[엄훠나] 맞아요.
[이실직고] 그게 결국은 국민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문화적인 부분에까지 마수를 뻗치기 마련이죠. 그러니까 그런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이 꼭 짱돌 들고 데모하는 식의 정치적인 행동에 국한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촛불시위가 새로운 차원의 시민 운동으로 주목받았던 것도 사회정치적인 저항을 하나의 비폭력 문화행사로 승화시켰기 때문이잖아요. 그런 점 때문에 기존의 집회 문화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국민들까지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거고요. 정말이지 <고고70>은 1970년대만이 아니라 바로 어제오늘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어요. 영화 기획 단계부터 이런 점들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기획 포인트였을 거예요.
[엄훠나] 그럴까요? 영화는 촛불집회 꽤 이전에 만들어진 것 같던데..
[이실직고] 꼭 촛불집회가 계기가 되지 않았다고 해도 '왜 지금 1970년대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려 하는가, 이 이야기가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점에 관한 치열한 고민이 있었을 거라고 봐요.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현재와의 접점을 만들려는 목적의식이 분명하지 않다면 추억의 한담을 늘어놓는 듯한 느낌밖에 줄 수가 없어요.
[엄훠나] 전 굳이 지금의 한국적 정치, 문화적 시대 상황을 기획 포인트로 잡았다기 보다는 최호 감독이 대중 예술이란 게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 시절을 다시 한번 복기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싶었어요
[그런지] 아무튼, <고고70>은 데블스라는 실제 록 밴드를 다룬 영화고 시대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는 작품이지만, 재미있는 음악영화라는 정체성을 잘 지켜낸 것 같아요.
[이실직고] 정말 세련된 전략이죠.
[그런지] 만약 데블스 멤버들이 고고장 폐쇄에 반대해 데모하고 나서는 장면 들어갔다면, 어후.. 그저 그런 영화가 됐을 듯 ㅋ
[엄훠나] 우린 딴따라라 뭣도 없지만, 그래도 우린 질러볼거다 뭐 이런 극한까지 몰린 자의 자의식이랄까..
[이실직고] 그 자의식이란 게 잘나고 멋지고 똑똑한 자의 자의식이 아니라 정말 뭐 하나 똑똑하고 잘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순수하게 '로큰롤'을 좋아하는, '똘기' 충만한 젊음에게서 나온 '에라, 모르겠다'식의 자의식이라 더 좋았어요.
[엄훠나] 그렇죠. 자의식은 함부로 질러대면 주변 사람들이 대략난감해짐
[이실직고] 맞아요.
[그런지] 정말 순수함이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공연 장면도 정말 잘 찍었구요. 카메라 워크부터 사운드까지. 엔딩 크레딧 보니까 공연 장면마다 촬영팀이 굉장히 세분화 되어 있는 것이 정말 공을 많이 들였구나 싶더군요.
[엄훠나] 촬영도 정말 얘기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실직고] 공연 장면은 정말 이 영화의 백미!
[엄훠나] 라이브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현란한 카메라 워크! ㅋㅋㅋ
[이실직고] 사전 연구를 철저히 한 것 같아요.
[엄훠나] 뭘 보여줘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한 확신이 느껴져요
[그런지] 음악영화는 음악이, 공연 장면이 좋아야 된다, 라는 당연한 말이 새삼 강하게 와 닿더군요. 사실 그동안 한국에서 제대로 된 음악영화 만나기 쉽지 않았죠. 그런 점에서 <고고70>은 굉장히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실직고] 전 개인적으로 <님은 먼곳에>를 보면서 공연 장면이 정말 안타까웠거든요.
[그런지] <님은 먼곳에>는 음악영화가 아니다에 한 표!
[이실직고] 군인들이 순이의 공연을 보면서 한 눈에 '뻑이 가는' 걸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데 빼빼 마른 순이의 소심한 공연을 보고 뭐가 좋다고 저 난리인지 당췌 이해할 수 없었다는.
[그런지] 그야말로 감독의 판타지죠..;;
[이실직고] 그에 비하면 정말 <고고70>의 공연장면은 극장에 앚아있던 저의 엉덩이마저 '고고'하게 만든 멋진 장면이었어요.
[엄훠나] 음악영화에는 음악에도 프로페셔널인 배우들이 출연해줘야 한다는..?
[그런지] 맞아요. 조승우! 음악영화라면 저래야죠.
[이실직고] 차승우도 좋던걸요.
[그런지] 차승우도 기대 이상으로 ‘연기’란 걸 했더군요. 그러고보니 이름이 둘 다 승우네. ㅋㅋ 캐스팅 참 잘했어요. 차승우가 영화 찍는다는 얘기 듣고는 인기 좀 얻고 싶어서 영화계에 발 들이나보다 싶은 생각에 좀 배신감이 들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까 그가 왜 출연했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음악가가 제대로 된 음악영화에 출연하는 거니까.
[이실직고] 신민아의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생명력도 스크린에 그대로 투사된 거 같아요.
[그런지] 신민아는 정말 <고고70>에서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 몸 사리지 않는 연기 멋집니다. 진작 그랬어야죠. 눈빛이 살아 있더군요 정말.
[이실직고] 신민아와 카메라 사이에 있던 어떤 막 하나가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어요.
[엄훠나] 사족인데, 전 리사이틀 공연 장면 끝자락에 신민아의 춤이 무척 지쳐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더 맛이 간 듯이 춤을 춰주리라 생각했건만
[이실직고] 그거 몇 번 째 테이크일까요? 라이브로 몇 번 갔다면 지칠 수밖에 없었을 듯.
[엄훠나] 그렇겠죠
[그런지] 혹시 최루탄 때문에 지쳐 보이는 거라는 설정?
[이실직고] 막춤을 추는 설정이라 나중에 슬로우 장면으로 보여질 땐 좀 느슨해지는 면이 있었지만 전 오히려 막춤의 사실성이 드러나는 것 같아 좋았어요.ㅋ
[엄훠나] 아무튼, <고고70>이 신민아의 재발견인 것만은 확실하네요
[그런지] 그래서 <고고70> 시사회 보고 나자 마자, 이거 관객 좀 들겠구나 생각 했는데, 놀랍게도 <모던보이>가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죠.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2008/10/03 ~ 2008/10/05 [2008/10/11 09:09:00 집계기준])에 따르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모던보이>가 2배 가까운 관객수로 <고고70>을 앞서고 있네요. 개봉한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라 입소문이 관객동원에 영향을 미칠 텐데 좀 많이 의아하군요..;;
[엄훠나] 저도 좀 놀랐어요
[그런지] <모던 보이>는 기대했던 거 치곤 참 싱겁던데 말이죠. 이렇게까지 흥행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엄훠나] <모던보이>가 의외로 최루성 멜로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서 전 요즘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영화일까 생각했거든요. 흥행 여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만. <모던보이>는 다들 어떻게 보셨는지?
[그런지] 지루했죠. 최루성 멜로긴 하지만 좀 난해하지 않던가요? 전개도 불친절하고. 전 원작을 안 읽어서 모르겠지만, 감독이 쓸 데 없이 힘을 많이 들인 느낌도 들구요.
[엄훠나] 제 주변 사람들은 <모던보이>를 두고 "야마(핵심, 주제)가 없는 영화"라고들 평하더군요. 그래도 정지우 감독이 야마를 아니 잡진 않았을 것 같아요. 뚜렷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영화의 결말로 볼 때, "친일파 자손 이해명은 왜 독립투사가 됐나" 뭐 이런게 아니었을지.. 이 영화의 야마는 뭐였을까요?
[그런지] 야마라.. 독립군과 친일파의 사랑? 야마가 뭔지는 대충 알겠는데.. 왜 그렇게 재미 없게 표현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쓸데 없이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지 궁금. 원래 정지우 감독 스타일이 쉽게 가는 게 아닌 지는 알고 있었지만, 전작들은 흥미로웠던 데 반해 <모던보이>는 어딘가 모르게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더군요.
[엄훠나] 전 조난실이란 캐릭터에 조금 실망스러웠는데..
[그런지] 맞아요. 매우 실망스럽더군요. 아니, 김혜수를 데리고 그렇게 밖에 안 되나..?
[엄훠나] 여성 테러리스트를 무슨 신화 속 여신처럼 그려놔서 일단 전혀 그들의 사랑이 어떤 위험을 안고 있는지 공감이 안 가요
[그런지] 그것 역시 정지우 감독의 판타지? 테러리스튼데 섹시하고 순수하고 미스터리하기까지 하다..;;
[엄훠나] 이해명은 나름 있을 법 하고 재미도 있는 인물인데, 희대의 모던보이(=거의 바람둥이와 동의어처럼 그려지죠)가 치명적인 사랑에 빠지려면 조금 더 설득력있는 상황을 보여줬으면 했거든요
[그런지] 그런데 문제는, 이해명이 조난실에게 뻑이 가는 이유가 전혀 공감이 안 간다는 거죠. 조난실의 공연 장면이 그렇게 임팩트 있지도 않던데 말이죠. 대체 이해명은 왜 조난실에게 반했는가? 이게 납득이 안 되니까 그 뒤로도 쭉 공감이 안 되는 거지. 묻지마 사랑도 아니고 말이죠.
[엄훠나] 그렇죠. 그리고 조난실 때문에 고문도 당하고 쫓기기도 하는데 이게 이상하게도 별 걱정스럽지가 않거든요
[그런지] 설득력 없이 무조건 상황을 이어가니까 짜증이 나는 거죠.
[엄훠나] 저러다 풀려나겠지 싶으니까, 이해명이 목숨걸고 조난실을 쫓아다닐 명분도 함께 사라지는.. 그냥, "일제시대니까 독립운동하면 어떻게 되는지 다들 아시죠?" 이런 설정을 깔고 가는 것 같아요
[그런지] 풉...
[엄훠나] 혹은 "이런 시대에 독립 운동하면 어떻게 사는지 다들 알고 계시죠?"라던가.. 그러니까, 내적 논리로는 그 둘의 사랑이 무척 위험하고 그래서 더 치명적이고 아름답긴 해요 그런데 그 논리가 외부로는 잘 안 와닿죠. 그런데 또 제가 영화에 너무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반성하게 됩니다 ㅋ
[그런지] 설명을 요구하지 않도록 만들었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마지막에 조난실이 자폭하는 부분에서 갑자기 최루성 멜로로 돌변하는 것도 심히 당혹스럽더군요.
[엄훠나] 최루성 멜로로 드라마를 너무 단순화 시킨 것이 안타까웠어요
[그런지] 맞아요. 단지 최루성 멜로로 남고자 한 영화는 아닐텐데 말이죠.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이해명과 자폭을 앞둔 조난실의 눈물콧물 짜내는 이별 장면이라니... 아, 재미있는 거 하나 있네요. 이해명이 “난 테러의 화신이다!”라고 헛소리하는 장면 ㅋㅋ 이건 좀 웃겼음. 인정.
[엄훠나] 극중에서 이해명의 친구인 신스케(김남길)이 뭔가 좀 더 역할을 해줬더라면
[그런지] 맞아요. 박해명이 조난실을 만나게 되는 다리 역할밖에 한 게 없죠. 그런 점에서 김남길이란 배우는 참 아까워요. 이 영화에서 너무 존재감이 약하죠.
[엄훠나] 초반에 조난실과 이해명을 연결시켜 주는 흥미로운 역할을 해주다가 중간 이후 슬쩍 빠지고, 다시 뜬금없이 등장해서 모든 상황을 정리해 버리니.. 인물이 필요에 의해 동원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그러니까 결국 최루성 멜로 밖에 남지 않는..
[그런지] 영화주간지 평점을 보니 씨네21은 대체로 안 좋고, 필름2.0은 대체로 좋네요.
[엄훠나] 그 중 재미있는 단평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그런지] 씨네21 문석 '내러티브가 웰메이드의 신화에 발목잡혔다' 이말에 좀 공감.
[엄훠나] 흠 그런데 언제부터 '휴머니즘'이 '웰메이드'의 필요조건이 되었을까요? <추격자>는 휴머니즘이 없어도 웰메이든데..
[이실직고] 추격자는 김윤석의 땀 그 자체가 휴머니즘이잖아요.
[엄훠나] ㅋㅋㅋ
[이실직고] 기존 한국영화의 '신파적' 휴머니즘과 달리 김윤석의 땀이 하루 종일 뛰어다니는 주인공과 그 뒤를 바짝 쫓는 카메라에 생생하게 잡히면서 생동감을 얻죠.
[엄훠나] 그래도 그 영화는 성선설의 판타지를 완전히 깨준다는..
[이실직고] 확실히 <모던보이>가 소설의 결말을 뒤집은 데서 어떤 강박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에요. 소설에서는 결말을 모호하게 처리하는데 대체적으로 해명이 마지막 순간에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터뜨리러 가지 않고 집에 가는 전차를 탔다고 해석해요. "나는 결국 조난실과 한패가 될 수는 없었다. 공범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는 구절이 나오거든요. 그것 때문에 결말이 허무해서 실망했다는 독자들도 있어요.
[엄훠나] 아하..
[이실직고] 전 소설 쪽이 애초 나라와 민족보다 개인의 욕망에 솔직한 해명의 캐릭터에 부합하는 결말이라고 생각해요.
[엄훠나] 그렇군요. 그래서 영화가 좀 엇나간 느낌이 들었나..
[이실직고] 소설에서 이해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개인주의자로 남는데 영화는 소설의 결말을 뒤집는 바람에 그 반대가 되죠. 결국 무거운 역사의식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거예요.
[엄훠나] 그런데 조난실 때문에 독립투사가 되어 폭탄 테러를 감행한다, 그 결과에 모두 공감하기 어려워지는 거죠.
[그런지] 그렇군요.
[엄훠나] <모던보이>는 한국의 애국주의 블록버스터의 전형적인 냄새가 나긴 해요. 이것도 강우석 효과인가..?
[이실직고]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솔직히 좀 연관 있다고 생각해요.-_-a
[그런지] 근데 <모던 보이>를 칭찬하는 글엔 정교한 시대 재현에 대한 게 많던데, 사실 영화 보면서 정교한 시대 재현의 느낌은 별로 못 받았는데.. 대사들도 그렇고. 너무 현대적이잖아요. 김혜수가 남자 와이셔츠 입고 있는 장면은 <섹스 앤 더 시티> 저리 가라더군요..;;
[이실직고] 전 이 영화가 시대를 얼마나 정밀하게 '재현'했는가 하는 점을 따지는 건 의미 없다고 생각해요. 그 부분에 관해서는 TV 드라마 <다모> 방영 때 인터넷 게시판에서 뜨겁게 논란이 된 적이 있었잖아요. 솔직히 영화나 드라마가 과거를 100퍼센트 완벽히 재현할 수 없는 거고, 실화를 재현하는 작품이 아닌 이상 현대적인 해석을 강조하는 쪽이 현명한 거 같아요. '의상이나 세트를 얼마나 사실적으로 재현하는가'보다는, '그 시대를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그 점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엄훠나] 시대를 드라마를 위한 편의적 해석으로 바라보면 고증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질 수 있죠.
[그런지] 그러니까 <모던 보이> 칭찬은 해야겠는데 딱히 할 건 없어서 정교한 시대 재현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정교한 시대 재현이 <모던 보이>의 강점은 아니었다는 거죠.
[이실직고] '아마도 정교한 시대 재현'이라는 평은 매끈한 CG와 아름다운 세트 및 의상에 근거한 미술적 완성도를 평가하는 게 아닐까요?
[엄훠나] 맞아요. 세트와 의상이 아름다웠다 라고 해야 할 것을 편의적으로 '시대 고증이 잘 되었다'고 쓰고 있는지도.
[이실직고] CG로 재현한 서울 풍경은 좋던걸요? 이 영화의 정신이 압축된 부분은 확실히 첫 장면에 등장하는 해명의 출근 풍경인 거 같아요. 오렌지 빛 조명이 도는 이층집에서 연분홍 양복을 차려입고 서양식 아침 식사에 클래식한 자동차를 몰고 나오는 모습이 꼭 근대 유럽의 풍경 같았어요.
[엄훠나] ㅋㅋ 근데 결국 그 근사한 식민지 시대의 풍경이 영화의 발목을 잡았다는..
[이실직고] 딱 그런 장식적인 측면으로 일제강점기를 바라봤다는 게 이 영화의 정수란 말이죠. 그 새로운 시선 때문에 원작 소설도 주목을 받은 거고. <모던보이>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느꼈는데 한국영화가 1990년대 후반 르네상스를 경험하면서 자꾸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만의 공식'에 갇힌 것 같아요.
[엄훠나] 흠..
[이실직고] '한국 관객은 신파를 좋아한다', '한국 관객은 민족주의에 끌린다' 등등의 흥행 공식이 세워지고 그게 어느새 영화 제작의 확고한 지침처럼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엄훠나] 잘은 모르겠으나 어렴풋이 공감.. 대중적 영화에 대한 기준이 세워진거죠. 그런데 그 기준을 철저히 따르는 영화일수록 굉장히 지루해진다는..
[이실직고] 몇몇 흥행작들의 특성을 토대로 한 공식이 만들어지고 한국영화 전체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
[엄훠나] 새로운 기준을 아직 터득하진 못한 듯..
[이실직고] 네. 지금이야말로 그 틀을 깨고 나와야 할 시기인 거 같아요. 하지만 과도기라 기존의 틀 안에서 안전하게 가려 하거나 기존의 강박과 새로운 시도가 뒤섞이는 경우도 있는 거 같고요.
[엄훠나] 그런 면에서 <고고70>과 <모던보이>는 묘하게 기준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는 작품인 것 같네요. <고고70>은 살짝 벗어나 있고 <모던보이>는 살짝 들어가있고. 하나는 묘하게 흥미롭고 하나는 묘하게 심심하고.
[그런지] 그렇네요. <고고70>은 ‘한국 음악영화는 흥행 안 될 거야’라는 틀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용기있게 만든 영화라고 봄. <고고70> 격하게 지지합니다!!
[이실직고] 모든 영화가 다 골머리 앓아가면서 만든 작품들일 텐데 이런 얘기하면 섭섭하겠지만, 지금과 같은 시기야말로 '관객'을 생각하면서 계산적으로 영화를 만들기보다 말 그대로 <고고70>의 로큰롤 정신처럼 그들 스스로 하고 싶은 거 다 지르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런지] <고고70>의 그 쿨함이란.
[엄훠나] 전 이실직고 님의 말을 살짝 비틀어서 '흥행을 염두하지 말고 관객을 염두하자' 뭐 이 정도는 어떨까 싶어요.
[이실직고] 맞아요! 제 얘기가 그 얘기. 아, 속 시원해. 짝짝짝.ㅋ
[그런지] 그 말이 정답이네. 틀을 벗어 던지고 재미있는 영화 좀 보여달라고요. 쫌.
[이실직고] 그런 의미에서 다음 메신저 토크로 얘기할 <미쓰 홍당무>가 이 시점에서 꼭 주목할 영화라고 생각해요. 히히
[엄훠나] 그럼 다음 메신저 토크 예고하는 것으로 마무리 할까요?
[이실직고] 그럴까요?
[엄훠나] 다음 주제는? 두구두구두구두구
[그런지] 예고까지야..
[엄훠나] 푸핫! 기대를 저버리는 싱거운 결말..
[그런지] 궁금한 채로 만나는 게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ㅋㅋ 다음엔 <미쓰 홍당무>와 또 한 편의 영화에 대해 화기애애하게 토크해 보기로 하죠. 그럼 오늘은 여기서 이만~
[이실직고] 그래요. 아름다운 밤이에요! 여러분 사랑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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