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OO> <여성OO> <레이디OO>…. 미용실에서 장시간 파마할 때 들춰보면 딱 좋은 잡지들이 있다. 여자의 일과 생활, 패션과 미용, 결혼과 육아, 그리고 불륜과 이혼 같은 가십들로 매달 두텁게 채워지는 일명 ‘여성지’. <내 친구의 사생활>은 여성지 같은 영화다. 여성지를 스크린 위에 펼쳐 놓는다면 딱 이럴 것이다. ‘The Women’이라는 단순명료한 원제목이 말해주듯 이 영화는 여성지에 나올 법한, 그리고 여성지를 읽을 법한 이 시대 ‘여자들’에 대해 딱 여성지만큼의 감성으로 이야기한다.
뉴욕 거리를 또각거리는 수많은 종류의 하이힐을 전시하며 문을 연 영화는 깐깐한 패션지 편집장 실비(아네트 베닝)의 눈에 비친 백화점 풍경으로 접어들면서 최신 유행 의상으로 채워진 커버와 화보로 시선을 잡아끄는 여성지를 펼치듯 시작된다. 그리고 여성들만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미용실 통신’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네일케어를 받던 실비는 엄청난 수다본능을 지닌 한 직원으로부터 베스트 프렌드인 메리(멕 라이언)의 남편이 백화점 향수 판매원 크리스탈(에바 멘데스)과 바람났다는 엄청난 사실을 듣게 된다. 이걸 알려야 하나, 그냥 모른 척 해야 하나 고민하던 실비는 에디(데브라 메싱)와 알렉스(제이다 핀켓 스미스)에 지원 요청을 한다는 명목으로 ‘내 친구의 사생활’을 여러 친구들에게 발설하고 만다. 그러나 오랜만에 머리하러 간 메리는 이미 자신만 모르고 있던 자신의 사생활을 낯선 미용실 통신원에게 전해 듣게 되고, 이때부터 패션 디자이너로서 성공하기보다 행복한 가정 꾸리기에 올인했던 메리의 좌절과 반란이 시작된다. 남편을 내쫒고, 다시 하이힐을 신고, 디자인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며.
중산층 가정주부 메리를 중심으로 결혼보단 일을 택한 패션지 편집장 실비, 임신과 육아의 달인 에디, 와일드한 레즈비언 작가 알렉스가 엮어가는 <내 친구의 사생활>은 왁자지껄 수다 같은, 그리고 여자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잔잔한 소동극이다. 조지 쿠커 감독의 1939년 작 <여인들>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21세기 여성들에겐 ‘뉴욕에 사는 4명의 여자 친구들’이라는 설정과 패션이 심히 부각된다는 점에서 <섹스 앤 더 시티>를 더 떠올리게 할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내 친구의 사생활>은 <섹스 앤 더 시티>의 영향 아래 있다. 그러나 ‘명품 전시장’에 지나지 않았던 <섹스 앤 더 시티> 극장판에 비해 <내 친구의 사생활>은 훨씬 유머러스하고 실용적인데다 감동적이다. <섹스 앤 더 시티> 극장판에 실망했던 이라면 <내 친구의 사생활>이 조금은 위안이 될 듯하다.
젊고 섹시한 여자와 바람 난 남편 때문에 인생 다시 찾은 주부 메리의 이야기가 ‘메인 특집’이라면, 알파우먼 실비의 독한 사회생활은 ‘서브 특집’이다. 결혼도 마다한 채 워커홀릭으로 성공했지만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자신을 언제 내칠지 모르는 상사에게 굽실거리느라 눈가에 주름만 늘어가던 실비는 메리와의 우정까지 흔들리는 위기를 겪다가 명품 수트를 벗어 던지고 진정 원하는 삶을 찾아 나선다. 이 밖에 딸 넷을 두고도 아들을 낳기 위해 임신에 매진하는 에디(남아선호 사상은 미국에서도 통한다), 남자보다 더 마초적인 레즈비언 알렉스, 돈 많은 중년남자 꼬셔서 팔자 고쳐보려는 악녀 크리스탈, 주름 제거 수술로 삶의 위안을 찾는 메리의 엄마, 다이어트로 삶이 피폐해진 패션모델, 패션모델처럼 비쩍 마르기를 희망하는 메리의 어린 딸 등 다채로운 여자들의 이야기가 톡톡 튀는 피처로 작용한다.
미용실 수다와 가십, 젊은 여성들로부터 위기를 느끼는 중년 여성, 성공과 우정의 균형 맞추기, 동지이자 적이며 연인이 되기도 하는 여성의 관계, 출산과 육아에 대한 즐거움과 강박.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 한번쯤 겪어봤을 문제들을 경쾌하게 담아낸 <내 친구의 사생활>이 무엇보다 특별한 이유는 영화 속에 오직 여자만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메리의 바람난 남편도, 실비의 목을 옥죄는 남자 보스도 스크린엔 머리카락 한 올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거리의 행인들에게서조차 ‘남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배우뿐만 아니라 각본과 연출을 맡은 다이앤 잉글리쉬 감독을 비롯해 주요 스탭드도 여성이다. 심지어 애완견까지 여성이라니 말 다했다. 그야말로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의 영화인 셈이다.
물론 ‘옥의 티’는 있다.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얼굴 제대로 비추는 남성이 한 명 있는데, 바로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에디의 막 태어난 아들이다. 남자 때문에 상처 받고 고생하고 또 즐거워하던 여자들은 세상에 또 한 명의 남자를 탄생시키면서 행복한 눈물을 흘린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세 친구가 함께한 에디의 출산 신은 지금껏 영화에서 묘사한 출산 장면 중 가장 폭발적인 에너지와 감동을 선사한다. 베테랑 임산부로서 아무렇지 않게 낳을 것처럼 당당하던 에디가 막상 올 것이 오자 미칠 듯한 괴로움으로 절규하는 모습은 다소 과장되고 코믹하긴 하지만 여성이 겪는 출산의 고통과 기쁨을 가감 없이 여성의 시각으로 그려냄으로써 격렬한 공감을 이끌어낸다. 기존 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이 출산 장면 하나로도 <내 친구의 사생활>을 볼 이유는 충분하다.
국내 개봉작으로는 오랜만에 만나는 멕 라이언의 로맨틱 코미디적 연기, 악바리 커리어우먼으로 색다른 모습을 보여 준 아네트 베닝, 그리고 유머러스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 데브라 메싱, 제이다 핀켓 스미스, 에바 멘데스, 캔디스 버겐, 또 깜짝 출연으로 큰 웃음 준 베트 미들러 등 개성 강한 할리우드 여배우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즐겁다. 정미래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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