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과서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 내내 나라를 빼앗긴 설움에 눈물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고 언제나 불굴의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맞는 말이다. 치욕의 역사를 겪는 민족의 심정이 어찌 억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강산이 세 번 변하고도 남을 36년 세월 동안 개개인의 삶이 줄곧 억울하고 슬프고 분노에 차 있기만 했을 리 없다. 때때로 순이와 철수의 하루하루는 민족의 운명과 별개로 개인적인 사랑과 이별, 우정과 배신, 성공과 실패, 인간애와 고독에 울고 웃었을 것이다.
2008년 한국영화는 일제강점기에 눈을 돌렸다.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한 <라듸오 데이즈> <원스 어폰 어 타임> <모던보이>를 비롯해 같은 시기 만주를 배경으로 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이하 <다찌마와 리 2008>)까지 총 5편의 시대극을 선보인 것. 흥미로운 것은 5편의 영화가 일제히 ‘교과서 밖의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대극에 ‘교과서 밖의 상상력’을 허하라
<장군의 아들> 시리즈(1990~1992) <사의 찬미>(1991) <금홍아 금홍아>(1995) <아나키스트>(2000) 등 기존의 일제강점기 시대극은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이라는 교과서적 역사 해석에 충실했다. 시종일관 나라와 민족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대는 늘 심각하고 암울하게 그려졌으며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은 나라와 민족의 그림자를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일제강점기를 이야기할 때면 마땅히 갖춰야 하는 자세처럼 여겨졌다.
2008년 한국영화는 그런 강박에서 과감히 벗어났다. 2008년 일제강점기 시대극은 모두 경쾌한 분위기로 시대를 묘사하고 나선다. <라듸오 데이즈>는 조선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 제작 과정을 그린 코미디. <원스 어폰 어 타임> 또한 전설의 보물 ‘동방의 빛’을 둘러싼 쟁탈전을 소재로 한 액션 코미디다. <놈놈놈>은 청나라의 보물지도를 차지하기 위해 만주 무법자들이 벌이는 추격전을 서부활극 형식으로 펼치는데 그 기저에 역시 코미디가 자리 잡고 있다. <다찌마와 리 2008>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최정예 비밀 요원 ‘다찌마와 리(임원희)’의 활약상을 내용으로 하는 코믹 액션. 단편 인터넷영화 <다찌마와 리>(2000)의 배경을 일제강점기로 옮겨 리메이크했다. <모던보이>는 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를 원작으로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 해명(박해일)이 정체불명의 여인 난실(김혜수)을 사랑하게 되면서 벌이는 사건을 그린 미스터리 멜로드라마다. 코미디는 아니지만 원작 자체가 이례적으로 일제강점기를 무대로 개인의 사랑과 욕망에 주목해 관심을 모았던 만큼 영화 역시 일제강점기와 주인공 해명을 발랄하게 표현하고 있다. 개화기 이후 새롭게 유입된 근대 문물, 그 중에서도 특히 ‘자유연애’를 강조하고 있는 것.
조선의 전통문화와 서양의 근대 문물이 공존했던 당시의 풍경을 영화 전면에 배치하는 것은 2008년 일제강점기 시대극의 공통점이다. 사실적인 재현보다 볼거리로서 장식성을 강조하는 데 프로덕션 디자인의 초점을 맞춘 것. 경성을 배경으로 한 <라듸오 데이즈> <원스 어폰 어 타임> <모던 보이>가 화려한 양장 패션과 전차, 재즈 등의 신문물을 활용한다면 <놈놈놈>과 <다찌마와 리>는 가지각색의 의상과 기차, 시장의 풍경을 통해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들끓었던 당시 만주의 풍경을 시각화한다.
이는 2000년대 시대극의 새로운 경향을 잘 보여주는 점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왕조 중심의 정사를 다룬 정통 사극이나 위인의 일대기를 교훈적으로 조명한 작품들이 시대극의 주류를 이뤘다. 비슷한 소재와 분위기가 반복되면서 시대극이 대중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적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 들어 달라지기 시작했다. <YMCA 야구단>(2002)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2003) <청연>(2005) <음란서생>(2006) 등의 시대극영화와 <경성스캔들>(2007) 등의 TV 사극이 ‘교과서 밖의 상상력’으로 다양화를 꾀하기 시작한 것. 실화를 끌어 오기보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늘고 실존 인물이나 실화를 바탕으로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에 얽매이는 대신 자유자재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작품이 많아졌다. 2000년대 시대극은 점차 궁궐을 벗어나 민초들의 규방과 부엌을 기웃거렸고 저잣거리를 드나들며 음담패설과 춘화를 찾아 나섰다. 엄숙한 체면 아래 숨겨진 발칙하고 뻔뻔한 욕정을 들춰냈고 나라의 슬픔에 목 놓아 울기보다 새로운 욕망에 사로잡힌 개인의 심정을 솔직하게 그렸다.
기존 시대극에서 찾아볼 수 없던 역사 속 개인이 서서히 스크린과 브라운관 위로 떠오른 데는 영화, TV 드라마보다 한 발 앞서 교과서 밖의 상상력을 탑재한 역사소설의 영향도 컸다. 이선미의 <경성애사>, 이지형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 이정명의 <바람의 화원> 같은 소설은 각각 TV 드라마 <경성스캔들>, 영화 <모던보이>, 동명의 TV 드라마(2008)로 옮겨졌다.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현재 시대극은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2008년 들어 일제강점기 시대극만 무려 5편이 쏟아진 점이나 몇 년 전부터 퓨전사극이 안방극장의 인기를 독차지한 점만 봐도 시대극의 인기를 쉽게 가늠할 수 있다.
민족을 멀리하거나 등지지 않고 끝맺을 수 있겠니
그러나 제아무리 교과서 밖의 상상력을 발휘한 시대극이라 해도 ‘시대’라는 숙제를 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떤 삶도 나라와 민족이 처한 시대적 운명과 완전히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제강점기는 유쾌한 시각으로 풀기에 참으로 까다로운 시대일 수밖에 없다.
2008년 일제강점기 시대극 역시 나름의 방법으로 난국의 정세를 드러낸다. 5편 모두 독립군과 일본군이 등장하는데 <놈놈놈>을 제외한 4편에서 그 존재가 비중 있게 그려지고 있다. 특히 <라듸오 데이즈> <원스 어폰 어 타임> <다찌마와 리 2008>은 기존 영화에 비해 훨씬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로 독립군과 일본군을 묘사한다. <라듸오 데이즈>와 <원스 어폰 어 타임>은 작전 한 번 제대로 성공시킨 적 없이 우왕좌왕하는 독립군의 허술한 모습을 통해 웃음을 유발한다. 반대로 <다찌마와 리 2008>은 임시정부 최정예요원 다찌마와 리를 대단한 영웅으로 그리는 허무맹랑한 과장법으로 코미디를 끌어간다.
<라듸오 데이즈>, 무기력에서 영웅으로
하지만 ‘경쾌한 분위기와 민족적 슬픔을 어떻게 버무릴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해 5편은 각각 다른 선택을 내린다. <라듸오 데이즈>는 코미디를 표방하면서도 시대의 밑바닥에 깔린 짙은 패배의식을 똑똑히 응시한다. 개봉 당시 여러 홍보 문구에서 주인공 로이드는 “타고난 한량”으로 소개됐지만 사실 그의 모습은 정확히 말해 ‘무력감에 빠진 지식인’에 가깝다. 라디오 드라마의 연출을 맡은 그는 아무리 큰 경사를 맞아도 놀라는 일이 없고 어떤 곤경에 닥쳐도 도무지 심각해지는 법이 없다. 시종일관 그저 엷은 웃음을 흘릴 뿐이다. 그는 “어수선한 세상”을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그저 일본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웃고 있다. “어수선한 세상, 난 그냥 생긴 대로 살라고.” 매일같이 카페에 모여 시간을 때우는 예술가들의 푸념에서도 그러한 시대적 무력감을 감지할 수 있다.
주인공이 대동아화합건설에 가담하는 쪽으로 라디오 드라마를 결말지으라는 방침에 로이드가 반발하자 방송국 사장이 소리친다. “네가 무슨 실력이 있어서 그걸 시킨 줄 알아? 제일 만만해 보여서 시킨 거야. 이 빠가! 천하에 쓸모없는 놈팡이가 뭐 대단한 공이라도 들인 양 거들먹거리는 꼬락서니 하고는. 주제 파악이 몹시도 아쉬워.” 계속해서 자조적인 패배의식을 드러내던 영화는 이 사건을 계기로 급히 방향을 바꿔 조국과 민족에 대한 책임의식을 불태운다. 로이드와 제작진이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라디오 드라마의 두 주인공이 사랑을 이루는 결말로 방송을 끝맺은 것. 시대의 무력감에 빠져있던 로이드가 갑작스레 영웅적 행동으로 돌아서는 과정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개인과 민족 사이에서 - 2008년 일제강점기 시대극의 역사의식 (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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