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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크면 삶이 고달프다. 마찬가지로 포장된 영화와 그 실체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관객의 한숨은 커진다. 영화가 예고편에 미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중 소위 ‘18금(禁) 영화’에서 실망과 좌절의 경향은 더욱 뚜렷하다. ‘뭔가 보여주겠다’며 관객을 불러 모은 후, 맛배기는 커녕 ‘절제의 미학’을 실천하고 있는 영화들은 얄밉기 짝이 없다. 핵심 포인트(?)를 절묘하게 은폐시키는 어두침침한 조명, 교묘한 카메라 워크 등, 관객은 침만 삼키다 가란 말인가.

그런 면에서 <미인도>(전윤수)는 18금 영화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스크린이란 화폭에 펼쳐진 윤복(김민선)과 강무(김남길), 홍도(김영호)와 설화(추자현)의 정사신은 강렬하며, 중국 춘화를 재현한 무희들의 다양한 체위는 신기에 가까울 정도다. 이쯤에서 혹자는 ‘영화가 야하면 다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겠다. 물론 아니다. 야하기만 한 영화는 온라인상에 수없이 존재하며, 지금도 많은 관객들이 모니터 앞에서 관음증의 향연을 벌이고 있다.


<미인도>에서 적나라한 정사신이 매력적인 이유는 각자의 내러티브를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복과 강무가 정사를 벌일 때 둘은 더 없이 환희에 찬 표정을 짓는다. 이는 두 남녀의 몸과 마음이 온전히 하나가 됨을 보여준다. 특히 윤복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첫 경험은 그동안 자신을 억압하던 것들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 크다. 여자라는 한계, 윤복을 바라보던 집안의 시선, 어린 시절 자신이 오빠를 죽였다는 트라우마까지. 윤복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속박이 풀린 옷고름처럼 하나둘 사라진다. 물론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윤복은 타자의 시선에 갇힌 존재가 아닌 주체로서의 자아를 획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와 대비되는 것이 잠시 후 펼쳐지는 홍도와 설화의 정사신이다. 윤복의 뒤를 조심스레 밟던 홍도는 윤복과 강무의 정사와 윤복의 얼굴에 서린 환희의 빛을 본다. 지난 10년 동안 윤복을 사모하면서도 말할 수 없었던 감정이 철저히 찢어지는 순간이다. 그 이후 홍도는 기방을 찾아 설화와 정사를 나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는 건조하고, 폭력적인 정사다. 이는 윤복과 강무가 펼친 정사와 대비된다. 앞의 것이 결합의 의미였다면, 뒤의 것은 홍도의 상처와 울분의 표현일 뿐이다. 또 그 과정에서 홍도를 사모하던 설화는 상처를 입게 된다. 설화는 이미 홍도가 자신을 머릿속에 그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통해 마음을 얻기 위해 거친 손길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홍도는 설화에게 그 어떤 기회를 주지 않고 떠나버림으로써 설화는 쓸쓸히 홀로 남는다. 

정사가 펼쳐진 공간의 의미를 더해 생각해 보면 장시간 인물들을 잡아내는 카메라를 이해하기 쉽다. 윤복과 강무가 정사를 펼치는 곳은 한 거상의 창고다. 세상의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모여 있는 곳, 이 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는 곳이다. 윤복은 정사를 나누면서 그 공간에 끊임없이 시선을 둔다. 이는 타자의 시선에서 벋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감을 보여준다. 천창을 향해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그녀는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만약 이곳에서의 정사가 짧게 끝났다면, 변화하는 윤복의 심리를 잘 포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홍도의 입장에서 볼 때 빨리 눈앞에서 사라지길 원하던 광경이 오랜 시간 지속되면서 그의 고통은 더욱 깊어진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림밖에 없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구나”라는 낮은 읊조림은 이런 고통이 없었다면 쉽게 나올 수 없다. 이처럼 <미인도>의 정사신은 인물의 변화는 물론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인간의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즉 삶의 희노애락을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미인도> 빠질 수 없는 것이 중국 춘화를 재현한 무희들의 다양한 체위가 펼쳐지는 장면이다. 밤 깊은 시각 홍등가에서 펼쳐지는 이 장면은 당시 많은 관객들이 낮은 탄성을 지르게 만들었던 것처럼 강렬하다. 이 때 카메라는 두 무희는 물론 시시각각 변하는 관객들의 표정과 행위를 샅샅이 담는다. 마치 윤복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을 예리하게 관찰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속에서 윤복은 가식을 벗어난 인간의 본성을 만나고,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결국 이 장면은 ‘그려오던 것’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리겠다는 윤복의 마음을 보여준다. 만약 이 장면에서 보여줌에 거리낌이 있었다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자유스러움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 됐을 터. <미인도>는 순수하게 관객에게 성적 판타지를 제공하려고 만든 장면조차 작품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후에 윤복과 홍도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도화서 관리는 윤복의 그림을 보고 그녀를 크게 꾸짖는다. 이에 홍도는 정조 앞에서 윤복의 그림은 비뚤어진 양반과 세상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윤복은 스승의 항변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녀는 누구를 조롱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유혹하고 흔들리는... 그 아름다운 마음을 그렸습니다”라는 것이 그녀가 붓을 잡는 이유이다. 

사랑과 질투, 상처를 통해 윤복과 <미인도>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은 물론, 몸의 해방을 이룬다. 이처럼 작품은 거리낌 없이 사람의 몸을 보여줌으로써 관음증적인 시선에 당당하고,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것을 강렬하게 전달한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대사가 많아지고, 초중반에 보여주었던 강렬한 이미지가 흐릿해지는 것은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인도>가 반가운 것은 뚜렷한 정체성을 갖고 용감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한국 여배우들이 노출을 꺼리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노출 연기를 하면 이미지 손상이 오고, 그로 인해 CF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중심으로 생각해 볼 때 배우의 노출 연기는 수많은 연기 중 하나이다. 만약 <색, 계>에서 탕웨이의 연기가 없었다면 그 영화가 가능했겠는가. 현재 한국영화계에서 좋은 여배우라 인정받는 배우들은 전도연, 문소리, 김혜수 등 연기를 연기로 받아들일 줄 아는 배우들이다. 이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본다면 그 관객이야 말로 불순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미인도>를 위해 혼신의 연기를 펼친 김민선과 추자현 등 여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안효원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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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촌총각 2008/11/1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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