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보니 노영석 감독님의 강렬한 첫인상이 생각나네요. 1차 끝나고, 2차 하러 가는 길에 ‘필름2.0’ 사무실에 와서 인터뷰하고 가셨죠. 자정이 다 된 시간에.(웃음)
아, 맞아요. 2차 가는 중이었어요. 딴 사람들하고 술 먹으러 가는 사이에...(웃음)
영화와 감독이 ‘혼연일체’의 경지에 이른 거죠. 그때 <낮술>은 감독의 경험에서 나왔을 거라 확신했습니다. 그때가 2007년 12월이었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낮술>이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에서 상영됐는데, 전주국제영화제(이하 ‘전주영화제’) 관계자가 보고 전주에서 틀게 됐어요. 전주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로카르노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가 정말 좋게 봐서 로카르노도 갔다 왔고요. 전주영화제에서 많이 보여준 거 같아요. 그 이후로 메일이 많이 왔어요. 영문 메일이라 스팸 메일인줄 알았는데 해외 영화제에서 온 것들이더라고요.(웃음)
해외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신기하게 다들 좋아하더라고요. 소주, 시장, 강원도 등 한국적인 요소가 있어 좋아할까 했는데,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웃는 장면도 상당히 비슷했어요. 토론토의 경우 전주영화제 이상으로 반응이 좋았어요. 또 그리스에선 한 부자가 찾아와 ‘여행 마지막 날에 이런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을 하기도 했어요. 술 취한 기분은 누구나 아는 거잖아요. 알딸딸한 기운과 남녀 간의 오묘한 관계는 사람이면 다 통하는 거 같더라고요.
이쯤 되면 독자들이 <낮술>이 어떤 영화기에 국내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을까 궁금할 거예요. 감독님이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낮술>은 우리 주변에서, 흔치는 않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들로 재밌는 상황을 만든 영화에요. 절대 심각한 영화 아니고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죠. 보신 분들이 홍상수 감독님 영화와 느낌이 비슷하다고 하는데, 전 장르적인 재미를 넣고 싶었어요. 로드무비이자 코미디 영화. 간혹 공포의 느낌이 있지만 상황자체가 웃음으로 바뀌죠.
<낮술>은 시나리오와 에피소드 구성이 돋보입니다. 어떻게 만들게 됐나요.
시나리오를 써서 공모전에 냈는데 계속 떨어졌어요. 나이는 계속 먹고, ‘이 상태로는 살 수 없다.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그래서 떨어져도 뭔가 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쓰고자 했어요. 낮에 방에 누워 공상을 하는데, 강원도 정선의 펜션이 생각나더라고요. 공모전 내려고 정선 가서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었거든요. 만약 옆방에 여자가 혼자 여행을 왔으면 어떻게 했을까. 놀고 싶지 않았을까. 근데 오히려 여자가 말을 걸어준다면... 남자의 로망이죠.(웃음) 그런 걸 상상해 보다가 버스 정류장에 혼자 않아 있는데 여자가 술을 사달라고 하면 어떨까도 생각해 봤어요. 완전 ‘나이스’죠. 제가 밖에서 술 먹는 거 좋아하거든요. 시원해서. 그런 생각을 하다 이걸 엮으면 재밌겠다 싶어서 시나리오로 발전시켰어요.
매우 공감이 되네요. 실제로 작품을 보면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고요. 감독님 경험에서 나온 에피소드들이 있나요.
당연하죠. 기차를 타고 정선에 가는데 눈이 엄청 많이 왔어요. 경치가 너무 좋았어요. 근데 옆에 계신 아주머니가 자꾸 말을 거는 거예요. 난 시나리오 구성을 하고 싶고, 시간은 한정돼 있는데. 그런 게 란희(이란희) 씨의 모습에 들어갔어요. 근데 그때 말을 건 사람이 예쁜 여자라면 ‘과연 귀찮았을까’하는 간사한 마음도 들더라고요.(웃음) 그리고 실제로 정선에서 펜션까지 걸어갔었어요. 걷는 걸 너무 좋아하고, 펜션 가서 당장 할 일도 없고. 걷는데 눈이 정말 많이 왔어요. 차도 안다니고, 적막하고 너무 좋았죠. 근데 산을 하나 넘어야 해서 정상쯤 가는데 무섭더라고요. 뭐가 나올 거 같고. 2004년 정도에 홍천 쪽에서 호랑이 발자국이 발견되고, 일가족이 호랑이를 목격했다는 뉴스가 있었어요. 호랑이가 날 잡아가면 완전 개죽음이잖아요. 내가 여기 온 거 아무도 모르는데. 그 경험이 슈퍼 할머니가 ‘호랑이 나올 수도 있는데’라는 대사로 들어갔어요. 음 그리고...
그리고?
예전에 술 먹고 놀이터에 있었는데 한 아저씨가 와서 쓸데없는 얘기하다가 속내를 비치더라고요. 자기 2만원 밖에 없는데 줄 테니까 같이 놀자고. 황당했죠.(웃음)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내용도 시나리오에 넣었어요. 또, 제가 야외나 눈밭에서 술 먹는 거 좋아합니다.
혁진(송삼동)이 뛰어든 강원도의 배경이 작품의 힘을 배가시킨 거 같아요. 때론 아름답고, 때론 으스스한 게 혁진의 여행을 더욱 다이나믹하게 만들어요.
제가 경험한 폭설이 내린 강원도를 예쁜 그림으로 담고 싶었어요. 근데 촬영한 때가 따뜻한 겨울이었어요. 눈도 많이 안 오고, 입김도 잘 안 나오고. 그래서 눈이 오면 찍고 했는데, 눈이 녹고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근데 그런 풍경도 좋았어요. 너무 예쁘게만 그려지지 않고 황량하기도 한 게 현실감이 있더라고요. 가식적이지 않은 거죠. 실제 여행가면 예쁜 데도 있지만 그냥 그런데도 있잖아요.
예쁜 건 혁진의 여행과 거리가 너무 멀죠. 배우들의 연기가 무척 자연스러운 것도 <낮술>의 장점이라 생각해요. 그냥 스크린 위에서 생활을 한다는 느낌?
배우들이 편하게 연기하길 바랐어요. 경험이 많지 않은 배우들이라 긴장하면 어떻게 틀어질지 모르거든요. 돈, 시간이 한정돼 있고, 그 시간 속에서 최대한의 효과를 뽑아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얘기를 했어요. 배우, 스탭들과 친해지기 위해 어울려 놀고, 술도 먹었어요. 연기하다 힘들면 실제로 술을 먹고 촬영을 했어요.
배우들이 먹는 건 괜찮은데, 감독님도 드셨잖아요. 그리고 촬영도 하고.
한두 잔은 술이 아니죠.(웃음) 먹는 거 보니까 맛있겠더라고요. ‘배우, 스탭 모두 술을 먹으면 찍은 영화’라고 홍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어요. 내세울 게 별로 없으니까.(웃음) 먹기 싫은 사람이 있어도 ‘한 잔은 먹어라’ 했어요. 그래야 거짓말이 안 되니까. 근데 절대 만취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홍보할 게 왜 없어요. 시나리오, 연출, 촬영, 편집, 음악까지 ‘원맨쇼’를 펼쳤잖아요. 재능을 과시하려고 한건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요.
확실히 해낼 수 있는 스탭이 있으면 맡겼겠죠. 근데 연출을 지망하는 제 친구들을 스탭으로 꾸려서 하다 보니 현장 경험이 별로 없는 분들이 많았어요. 다른 스탭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요. 정해진 시간에 빨리 끝내야 하는데 유대감 없는 촬영감독과 할 수는 없잖아요.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괜히 싸우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 나거든요. 위험 요소를 줄이고자 제가 한 거예요. 아쉬움이 남죠. 사람들과 토론하고 아이디어도 짜면서 찍고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으니까. 음악은 전에 제가 한 적이 있어서 ‘내가 커버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한 거예요. 절대 과시 아닙니다.
어려움이 있었겠어요.
다 찍고 보니 포커스가 안 맞은 부분이 있어요. 필름룩으로 찍어보려고 35mm 카메라 렌즈에 어댑터를 끼고 촬영을 했거든요. 투영된 영상을 줌으로 당겨서 찍어야 하는 작업인데, 이중으로 맞춰야 하니 포커스를 맞추기가 힘들었어요. 무식하니까 용감했던 거죠. 모니터도 안가지고 갔었어요. 카메라 액정만 보고 ‘이 정도면 맞았구나’ 했었죠. 촬영 끝나고 집에 와서 편집하려고 보니 으, 죽고 싶었어요. 편집이고 뭐고 보기도 싫었으니까. 한 달 정도 아무 생각 없이 술 먹고 사람들하고 놀았어요. 할 마음이 안 생겨서 편집도 안하고요.
서독제에서 상영될 때 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지적이 있었죠.
당시 어떤 분께 HD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어요. ‘할 수 있다’고 해서 맡긴 건데 나오기로 한 날 정전이 됐다나. 하여튼 고생 끝에 받았어요. 근데 제가 HD 데크가 없으니까 확인할 길이 없었죠. 서독제에서 틀었는데 앞부분 사운드는 일그러지고, 인물의 움직임은 왕가위의 <중경삼림>같이 ‘칙칙칙’ 지나가는 것처럼 늘어졌죠. 그래서 두 번째는 DVD로 틀었어요. 화질 엄청 안 좋았죠. 포커스가 안 맞은 건 수정이 불가능하지만 다른 문제들은 다시 마스터링해서 수정했어요.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영화가 힘을 갖는 건 온전히 시나리오의 힘 같아요. 에피소드 전개가 지루하지 않고 방향성을 갖고 있어, 제작 규모와 상관없이 재미있게 볼 수 있으니까. 같은 시나리오로 해외에서 리메이크 되면 어떨까 생각도 해봤어요.
지금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리메이크 제의가 들어왔었어요. 이탈리아에서 연락이 온 거 같은데, 그러면 이탈리아 말을 하면서 와인 먹고 다니지 않겠어요. 또 따뜻한 지역이고. 어떤 영화가 나올지 궁금해요.
북유럽이나 러시아에서 보드카 먹으면서 다니는 것도 재밌을 거 같네요. 작품을 만들면서 ‘이것만은 지키겠다’고 한 게 있나요.
완성하겠다. 완성을 위해 조명도 안 썼어요. 조명이 들어오면 장비, 인원이 늘어나는 건 물론 팀이 무거워져서 기동력이 없어져요. 그런 걸 배제해고 최대한 햇빛, 자연광을 활용했어요.
촬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영화에 슈퍼 할머니가 나오시는데, 제가 거기까지는 헌팅을 못했었어요. 그래서 촬영하는 동안 연출부가 가서 헌팅을 했는데, 할아버지는 오케이 하셨는데 할머니가 탐탁치않아 하셨어요. 불편한 마음으로 촬영지로 갔죠. 근데 할머니께서 곱게 화장하고 계시더라고요.(웃음) 예쁘게 화장하고 연기도 직접 해주셨어요. 찍으면서도 즐거워하셨고요.
감독님이 직접 제작비를 마련한 걸로 아는데, 포스터를 보니 투자자가 있어요. ‘투자 문혜숙’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분은 누군가요.
저희 어머니세요. 어머니한테 도와달라고 그랬죠. 그래서 1천만원이란 거금을 빌려주셨어요. 근데 아직 못 갚았어요.(웃음) 빚 안지는 게 목적이긴 하지만 이번에 개봉해서 흥행 성적이 좋으면 더 드리고 싶어요.
<낮술>은 가족이 함께 만든 영화네요. 근데 영화한다고 했을 때 구박 안 받으셨나요.
전 응원 받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할 거라고 얘기했는데 절 믿어주셨어요. 몇 년 동안 백수로 지내서 조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오히려 ‘천천히 가라’고 하셨어요. 다 때가 있다면서 응원해 주신 거죠.
정말 훈훈한 얘기네요. 하지만 작품은 술과 여자에 대한 얘기라는 거.(웃음) 예능 프로 '라디오 스타' 형식으로 질문해볼게요. 감독님에게 술이란?
어려운 질문인데요.(웃음) 뭐라고 얘기하지. 인간관계를 좀 쉽게 할 수 있는 거? 제가 잘 놀지 못하거든요. 남자들끼리 커피 마시면서 얘기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술 한 잔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얘기도 하고. 음, 제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네요. 커피 대신 술 정도? 근데 요즘엔 커피도 맛있더라고요. 뭔가 다른 세계랄까? 커피 마시며 낮에 사람들 만나서 대화하는 것도 재밌더라고요. 맛있는 커피도 있고.
자판기 커피가 최고죠.
정말 좋아하죠. 제일 맛있죠. 담배에 제일 잘 어울리는 커피. 못 먹겠으면 남겨도 되고.
꽁초도 버릴 수 있죠. 앞으로 많은 영화작업 하실 거잖아요. 감독님에게 영화란?
제가 뭔가를 표현하는 수단이요. 감정은 하나인 거 같아요. 외로움이 있으면 그걸 미술로,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죠. 그게 영상과 음악이 같이 들어갔을 때 증폭효과가 생기는 거 같아요. 더 직접적이고. 예전에 미술과 음악으로 표현했다면 이제는 영화로 표현하는 거죠. 그러니까 영화란, 지금 내가 하고 싶은 표현 방법이네요.
꼭 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있죠. 공모전에서 떨어졌던 것들은 저예산으로 찍으려고 했던 거고, 예전부터 생각했던 것들이 있어요. 예산이 좀 들어가는 영화. 성장영화이면서 로드무비인 것도 있고, SF 애니메이션도 있어요. 호러도 해봤으면 좋겠어요. 제가 장르영화를 좋아하거든요. 근데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은 정말 하기 힘든 분야잖아요. 그거 하려면 제가 정말 유명해져야겠죠.(웃음)
꼭 유명해져서 하고 싶은 작품 다 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필름온 독자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제가 처음 인터뷰를 했던 안효원 기자님을 만나서 반갑고, 그 덕분이 이렇게 필름온 독자 여러분과 만날 수 있어 기분이 좋습니다. 앞으로 필름온이 더 잘나갈 수 있게 많이 사랑해주세요.
아니, 영화 얘기 하셔야죠. 안 그러면 홍보팀한테 혼나요.(웃음)
아, 그런가.(웃음) 해외 영화제 갔다고 해서 심각한 예술영화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낮술>은 그런 영화 아닙니다. 가볍고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니까 많이 보러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분 나쁘지 않으실 겁니다. 제목 때문에 ‘그런 저런 남자들 얘기 아냐’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남자는 물론 여자분들이 좋아하실 요소가 많은 영화입니다. 영화 보시고 입소문 많이 내주세요.(웃음)
에필로그. 애초 이 인터뷰는 ‘낮술 인터뷰’로 기획됐다. 하지만 노영석 감독이 다른 일정이 있는 관계로 그 계획은 아쉽게 무산됐다. 오랜만에 만나 술과 영화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술 생각이 간절해 졌다. 그래서 <낮술>이 10만 관객을 돌파하면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기로 약속했다. 그 자리는 필름온 독자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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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보러가서 예고편을 봤는데
2009/02/02 15:42굉장히 재밌을것 같더라구요.
꼭 챙겨보겠습니다 ^^
이제야 이 영화를 봤네요.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감독님의 다재다능함이 놀랍네요.
2009/06/18 0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