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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슬러> - 동정? 개나 줘 버려라!

REVIEW ON 2009/03/03 13:01 Posted by 농촌총각


기억 홍수의 시대다. 사진, 영상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저마다 기억을 저장하는 창고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기억을 붙잡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기억을 상품화하는 상업적 이용과 연결되어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미니홈피, 블로그가 그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억과 이미지가 증가하면서, 기억의 크기는 점점 작아진다.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기억을 업데이트 하고, 지난 기억을 폐기한다. 폐기된 기억, 폐기된 인간. 미키 루크가 한물 간 레슬러로 분한 <더 레슬러>는 이런 폐기된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랜디 더 램(미키 루크)은 198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프로 레슬러다. 1989년 은퇴할 때까지 그는 언제나 최정상의 자리에 우뚝 섰고, 관중들은 그의 ‘램잼’에 열광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컨테이너로 된 싸구려 집의 집세도 못 낼 만큼 가난하고, 그 돈을 벌만한 마땅한 직업도 없다. 남은 거라고는 보청기와 각종 약이 필요한, 쉴 새 없이 마른기침을 하는 늙어버린 몸뚱이와 그의 연기에 박수를 보내는 젊은 레슬러들의 존경의 시선 정도다.

무대의 중심에서 세상을 호령하던 젊은 영웅에서 세상에 의지할 곳 하나 없는 한물 간 레슬러로 전락해버린 랜디 더 램. 하지만 그가 맞닥뜨린 가장 심각한 문제는 외로움이다. 랜디 더 램에게 막연한 향수를 가지고 있던 팬들은 그에게 다가오지만, 그것은 그에 대한 존경이 아니라 단순한 자기만족이다. 또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단골 술집의 스트리퍼 캐시디(마리사 토메이)는 고객과 스트리퍼 이상의 관계를 부담스러워하고, 유일한 혈육인 딸 스테파니(에반 레이첼 우드)에게는 무책임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만이 가득하다. 그런 딸에게 “날 사랑해주기를 바라지 않아. 단지 미워하지만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형용할 수 없는 외로움이 배어 있다.

정상에서 바닥으로 추락한 한 영웅의 삶, 랜디 더 램의 이야기는 작품 전편에 흐르는 헤비메탈 음악과 닮아 있다. 하늘을 날아 램잼을 작렬하고, 강한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할 때 내품는 강렬한 에너지는 헤비메탈의 그것과 똑같다. 그가 무대에 섰을 때나 운전을 할 때 끊임없이 나오는 헤비메탈 음악은 그의 삶을 청각적으로 형상화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그의 삶에 에너지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헤비메탈 음악도 갑작스럽게 중단된다. 차의 시동을 끄면 갑자기 사라지는 강렬한 사운드, 불현듯 밀려오는 공허감은 노구를 더욱 시리게 만든다.

이쯤 되면 많은 관객들은 그에게 따뜻한 사랑과 지난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를 바랄 거다. 그것이 우리가 그동안 숱하게 보았던 할리우드 영화의 공식이며, 소위 말하는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섣부른 화해를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선택한 삶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 강렬한 욕망을 보여주면서, 주인공에 대한 동정어린 시선을 일축시킨다. 만약 그가 동정을 받으면서 행복한 늙은이로 죽어간다면, 자신 스스로 ‘패배자’임을 인정하는 셈이 될 테니까. 랜디 더 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폐기되는 것을 끝내 거부한다. 비록 그것이 처절하게 외롭다고 하더라도. 이런 랜디 더 램의 삶은 미키 루크의 혼신의 연기, 잔인한 정도로 리얼한 레슬링 장면만큼이나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안효원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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