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왓치맨>은 <스피릿>의 작가 윌 아이스너가 ‘코믹스’에 대한 기존의 관념과 자신의 작품을 차별화시키기 위해 ‘그래픽노블’이란 단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이래 등장한 가장 위대한 그래픽노블 중 하나다. 모든 양질의 콘텐츠는 결국 할리우드로 흐르기 마련인 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서도 걸작 <왓치맨>이 그동안 쉽사리 영화화되지 못한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다. 슈퍼히어로들의 우울한 초상을 끝도 없이 늘어놓으며 여기에 완전무결한 세계평화를 꿈꾸는 악마적 표상과 영웅의 몰락, 그리고 세기말이 내포하는 절망감을 세밀히 직조해 낸 이 작품은 만화라는 성역 위에 만화라는 독자적인 언어로 이뤄낸 경지였다. 영상 표현의 한계를 무한대로 바꿔버린 오늘날 영화 기술이 <왓치맨>의 실사화 프로젝트에 좀 더 힘을 더한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영화 <왓치맨>에 대해 기대와 우려가 교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칸과 칸 사이 자유로이 횡행하는 시공간을 영화적 서사의 틀로 정립시키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수많은 에피소드 하나하나마다 무수한 의미를 새겨넣은 스토리작가 앨런 무어의 지독한 중층 구조물은 곧 만화 <왓치맨>의 뼈대이자 본질이었던 것이다.
안티 히어로, 다크 히어로즈 <왓치맨>의 히어로들은 고담시의 밤을 관할하는 어둠의 기사가 범죄에 대한 강박과 트라우마로 마스크를 쓰게 된 것과 비슷한 기저를 가진다. 여타의 슈퍼히어로들과는 달리 고작 마스크를 쓴 자경단에 불과한 <왓치맨>의 히어로들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으로 남들과 다른 게 있다면 나름의 자부심과 사회 정화의 사명감을 지녔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끝은 처참한 죽음이나 정신병원 수감, 초라한 은퇴, 그리고 어느새 늙고 병든 육신과 시민들의 비난뿐. 결국 히어로들의 활약으로 잠시나마 좀 더 나은 곳으로 향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사회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결코 돌이킬 수 없다는 듯 내리 절망으로만 치닫는다.

코미디언
이 절망은 곧 <왓치맨>에 등장하는 히어로 캐릭터들의 정신적 붕괴와 그대로 맞닿는다. 각기 다른 초능력으로 개성을 가름했던 여타의 슈퍼히어로물과는 달리 <왓치맨>은 인간의 영역 안에 존재하면서도 세계를 바른 길로 선도하고자 하는 이들의 깊고 깊은 정신세계를 파헤치는 데 주력하며 초인간이 아닌 인간의 뒤틀린 심연으로부터 인류 멸망 혹은 구원이라는 종착점을 내다본다.
가장 먼저 살해당하는 히어로인 코미디언(본명 : 에드워드 블레이크)은 무감정한 도덕 감각에 뿌리를 두고 그야말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코미디언이라는 별명과는 달리 그가 건네는 웃음은 결국 냉소와 조소. ‘세상은 조크’라며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게 아이러니하고 이 모든 것이 역설일 뿐이라는 그의 발언은 결코 구원할 수 없을 인간과 세계에 대한 절망을 형상화한다. 또 다른 히어로이자 <왓치맨>에 등장하는 유일한 초인인 닥터 맨해튼(본명 : 존 오스터맨)은 코미디언을 가리켜 “난 이제까지 그렇게 고의적으로 도덕과 거리를 두는 자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듯 그는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총으로 쏴 죽이는 등 극단적 범죄와 폭력으로 자기 파괴로 치닫는 반영웅이자 동시에 인간에 대한 절망으로 점철된 인물이다.

로어셰크
영락없는 하드보일드 탐정의 행색을 한 로어셰크(본명 : 월터 코벡스. ‘Rorschach’의 영어식 발음)는 로르샤흐 테스트(‘Rorschach’의 독일어식 발음. 로어셰크와 스펠링이 같다. 좌우 대칭의 불규칙한 무늬가 어떠한 모양으로 보이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이나 정신 상태, 무의식적 욕망 따위를 판단하는 심리학 진단법) 무늬를 가면 삼고 있듯 학대와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강한 폭력성과 강박적 정의감을 근간으로 하는 히어로다. 실제로도 하드보일드 탐정처럼 괴상한 수식어와 표현을 동원해 독백하는 로어셰크는 마스크 히어로를 불법으로 규정한 킨 법령이 발효된 후에도 범죄자에 강경히 대처하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코미디언의 죽음과 또 다른 마스크 히어로의 위기를 연결 지으며 인류 종착점의 모습을 추리해 나간다.
닥터 맨해튼은 실험실 사고로 육체가 분자 분해된 후 다시금 스스로를 재구축해 파란 몸의 초인으로 거듭난 완벽한 초자연적 존재. 그는 분자 단위를 초월해 공간은 물론 시간까지 초월한 신적 존재로 신체 크기를 자유로이 조정하고 여러 개의 몸을 운영하며 사물을 자유로이 분해/재구축하는 완벽한 ‘슈퍼히어로’다. 그렇지만 감정과 인간성을 잃어가면서 점점 무감각한 인류애와 그보다 더 무감각한 욕망을 드러내는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차갑고 또 음습하다. 첨단무기를 사용하는 나이트 아울(본명 : 댄 드라이버그, 다분히 배트맨을 모티브 혹은 패러디한 히어로) 역시 마스크를 쓰지 않는 한 매일 밤 그 옛날 전성기를 안주 삼아 곱씹는 소심한 패배자일 뿐이다. 이렇듯 <왓치맨>의 히어로들은 대체로 인간이거나 혹은 그 이하다.

닥터 맨해튼
시공간을 재구축하다 슈퍼히어로의 몰락을 인류의 몰락과 결부시키는 이야기는 슈퍼히어로의 탄생이 아닌 히어로의 죽음으로 막을 올린 이후 시작은 핵전쟁에 대한 두려움이었지만 결국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이는 인간을 조망한다. 어느 흑인 소년이 길거리에 쭈그려 앉아 읽는 만화는 <왓치맨>의 시공간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지만, 시체를 뗏목 삼아 표류하는 만화 속 해적의 이야기는 실제 현실 공간과 상호 교차하고 대사들 역시 각기 다른 공간 속에 뒤섞임으로써 산 기러기를 베어 물며 죽을 고비를 넘어서는 해적의 극한 상황은 어느새 핵전쟁 직전의 뉴욕으로 효과적으로 소급된다.
만화 속 만화 이야기가 실제 이야기의 시공간과 병치되는 이 방식은 페이지를 넘기며 감상하는 출판만화의 형식을 거치며 평행세계를 토대로 한 절묘한 암시 기법을 효과적으로 발휘한다(이를 테면 기러기를 베어 무는 만화 속 해적과 닭다리를 베어 무는 댄 드라이버그의 모습은 페이지 넘어 하나로 합치된다). 닥터 맨해튼이 출연하는 토크쇼 장면과 나이트 아울과 실크 스펙터(본명 : 로리 저스페직)가 길거리 깡패와 맞닥뜨리며 내뱉는 대사들은 각각 다른 공간에 배치되지만 그 다른 공간 안에서 절묘하게 합치되는 대사와 그 부조리한 느낌은 정적 효과와 동적 에너지마저 하나로 구조화한다.
<왓치맨>의 서사는 과거와 현재는 물론 상징과 은유마저 넘나들며 이를 병치하고 교차시킨다. 히어로의 과거와 정신세계, 그리고 현재 그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일련의 미스터리는 다분히 산발적으로 진행되는 듯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오직 단 하나의 선 위로 수렴된다. 그것은 결국 그동안의 히어로들(이제까지의 슈퍼히어로물을 포함해서)이 부르짖던 세계평화라는 것이 얼마나 공허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마침내 달성하게 되는 ‘실질적 평화’와 수반된 그 반작용은 곧 영웅으로 대변되는 인류 전체의 구조적 모순을 겨냥한다. 세계평화와 전쟁, 이 가장 거대한 이야기를 단숨에 파헤치는 <왓치맨>의 값어치는 단순히 휴고상 수상이나 타임지가 선정한 100대 ‘소설’로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경지 위에 우뚝 선 가장 높고 가장 절망적인 바벨탑임에 틀림없다.
영화 <왓치맨>, 만화의 신화를 복기하다
그렇다면 원작이 지닌 특별한 아우라에 흠결을 내지 않고 이 몰락하는 영웅들의 이야기에 다시금 영화라는 힘을 실을 수 있었을까? 단적으로 말해 <왓치맨>은 161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비교적 효과적으로 영화화됐다. <새벽의 저주> <300>을 통해 스타일리시한 자신만의 스크린 화법을 과시했던 잭 스나이더 감독은 원작의 거의 모든 에피소드를 명쾌하게 정리하며 영화 <왓치맨>을 재구축한다. 그리고 만화가 세밀한 에피소드를 통한 다양한 상징과 은유로 인류의 당면 과제와 절망으로 점철된 세계의 단면을 완성했다면, 영화는 좀 더 구체적인 실제 사건들로 세계를 ‘실체화’한다. 이를테면 영화 속에서 코미디언(제프리 딘 모건 분)은 닥터 맨해튼(빌리 크루덥 분)과 함께 정부 편에 서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끈 보수적 인물로 그려지는 데 그치지 않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한 직접적 인물로 묘사된다. 또한 시대상을 명백히 드러낼 수 있는 사건들을 면밀히 배치함으로써 닉슨이 3선에 성공한 영화의 세계에서는 핵을 빌미로 한 3차 세계대전의 위협이 인류가 가진 근원 모를 두려움의 정체를 뚜렷이 구체화한다.
스타일리시한 면모를 과시하는 잭 스나이더가 히어로의 품새를 단순히 원작을 재연하는 데에 멈추지 않고 이를 근간으로 새로이 구축한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만화가 마스크를 쓴 히어로들의 행색을 직접적으로 희화화하며 그 원천의 의미를 파고드는 데에 비해 영화는 오히려 히어로들의 위상에 더 많은 힘을 부여하는 편이다. 단 1초의 시간조차 세밀히 쪼개 사방으로 튀는 핏방울이나 파편의 움직임까지 섬세하게 잡아낸 액션장면은 멋들어진 슈트를 입고 화려한 동작으로 격투를 펼치는 주인공들을 통해 매 장면마다 정제되고 짜임새 있는 액션으로 영화만의 오락적 재미를 부각시킨다. 또한 표현에 있어서도 하드고어적인 성격을 크게 내세움으로써 좀 더 리얼하고 때때로 과장된 움직임과 잔혹한 느낌을 배가시키는 것 역시 원작과 다른 영화의 새로운 면모다.
영화는 인류 멸망의 시계(Doom's day Clock. 자정을 인류 멸망의 시점으로 상징화한 시계로 <왓치맨> 세계에서 이 시계의 시각은 11시 50분에서 시작한다)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며 시시각각 은연중에 멸망의 시각을 조여오는 만화와는 달리 핵전쟁이라는 가시적인 위협을 더욱 전면에 드러낸다. 이는 영화가 원작의 결말에 대해 결과는 같지만 수단이 다른 기묘한 변칙수를 행사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뿐만 아니라 히어로들이 생활하는 세계를 상정하고 이를 상징화한 만화와는 달리 특정 사건을 기점으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 대체역사나 역SF적인 모습에 더욱 밀착하는 효과를 자아내기도 한다.
물론 ‘인간 콩국물’이 튄 스마일 배지가 암시하듯 인류 멸망의 시계가 가리키는 분침 50분의 방향이야말로 <왓치맨>의 가장 큰 줄기이자 메타포다. ‘감시자(Watchmen)는 누가 감시하는가?’라는 시민들의 질문, 그리고 시계(Watch) 수리공이었던 존 오스터맨이 원자학자가 되고 또 초인 닥터 맨해튼이 되어 재구축에 관한 근원적 물음을 대변할 때도 <왓치맨>의 본 함의는 점점 더 넓고 깊은 곳으로 향한다. 굳이 영화가 만화와 달리 코미디언과 실크 스펙터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흠집을 낼 필요는 없었지만 어쨌든 자정을 향하는 운명의 시계를 이만큼 조립해 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다크 나이트>를 거친 슈퍼히어로의 함의와 담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3월 5일 분명 다시 시작될 테니. 강상준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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