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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부족, 일국의 지도자는 도덕적 정결함이 요구됐다. 나라에 기근이나 천재지변이 생기면 그들은 스스로 머리를 내놓고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왕의 권위가 강력해지면서 상황은 뒤바뀐다. 신의 자식임을 자처한 이들은 국가의 모든 일을 신의 뜻이라 여겼고, 뜻을 거부하는 이들은 형장의 이슬이 됐다. 다시 한 번 반전이 이뤄진 건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최근이라 할 수 있는, 소위 민주주의 시대가 열리면서다. 국민은 지도자를 선출하고, 동시에 그를 감시한다. 하지만 권력의 중심에 선 지도자들은 이제 순순히 민의를 따르지 않는다. 공권력을 동원하고 여론을 조작하면서 자신을 정결한 존재로 만든다. 대통령과 국민들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프로스트 VS 닉슨>에서 우리가 만나는 세계다.

<프로스트 VS 닉슨>은 닉슨(프랭크 란젤라)이 권자에서 물러나면서 시작한다. 재선 당시 상대 후보의 선거 캠프를 도청한 사건이 드러나면서 그의 도덕성은 도마 위에 오르고, 닉슨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다. 닉슨의 사퇴방송을 보던 영국의 토크쇼 MC 프로스트(마이클 쉰)는 높은 시청률을 보고 좋은 인터뷰 아이템을 떠올린다. 진실을 먹고 사라진 부정한 대통령을 호출하면서 기막힌 쇼를 펼치겠다는 것이다. 닉슨은 순순히 프로스트의 제안을 수락하고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다. 하나의 진실을 두고 공방을 펼치는 양측은 창과 방패, 방패와 창이 되어 서로의 폐부를 찌르고자 한다.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하지만 그 어떤 전투보다 치열한 싸움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닉슨과 프로스트의 인터뷰는 엇갈리는 욕망의 격한 충돌이다. 인터뷰를 통해 닉슨은 등을 돌린 민심을 되돌려 정계 복귀를 꿈꾸고, 프로스트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통해 쇼 비즈니스의 최고 자리를 탐한다. 하지만 둘 중 하나는 세인의 조롱과 비난을 받으며 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들의 절박한 상황은 두 선수로 하여금 전투력 게이지를 상승시킨다. 론 하워드 감독은 이러한 경쟁을, 감독 스스로 밝혔듯 ‘권투경기’처럼 가시화 시킨다. 예상치 못한 질문으로 초반부터 기선을 잡고자 하는 프로스트는 적극적인 인파이터, 질문의 핵심을 요리조리 피해가는 닉슨은 노련한 아웃복서다. 여기에 스포츠를 중계하듯 분주하게 움직이는 카메라와 중요한 순간에 인물의 감정까지 포착하는 클로즈업, 치열한 공방에 일희일비하는 참모진까지. 작품은 그 어떤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보다 긴장감 넘친다.

진실을 찾아가는 긴장감 넘치는 여정 이외에도 <프로스트 VS 닉슨>은 더 큰 미덕을 갖춘 작품이다. ‘(권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의문과 추한 얼굴을 한 미디어에 대한 고찰은 작품의 깊이를 한층 높인다. 사실 워터게이트의 진실 자체가 영화의 핵심이라 하기엔 너무 빈약하고, 흥미롭지 않다. 이미 사건의 전모는 대부분 밝혀지지 않았는가. 소재만으로 따지면 용산 참사를 두고 보여준 한국 정부의 모습이나 지겹도록 반복되는 한국 국회의 다툼이 더욱 섹시하다. 여기서 론 하워드 감독은 ‘(권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극중 닉슨은 프로스트와 자신의 공통점을 찾는다. 둘 다 ‘낮은 신분’으로 태어났다는 것. 성공과 권력의 중심부를 향해 숱한 전투를 벌인 닉슨은 프로스트에 연민을 느끼며, 동시에 늙어버린 자신을 돌아본다. 혹시 닉슨 또한 거대한 구조 앞에 무릎을 꿇은 희생자가 아닐까. 물론 닉슨에게 면죄부를 주고자 함은 아니다. 그의 선택으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 존재하는 가운데, 그 누구도 그를 용서할 수 없다. 다만 이미 만천하에 드러난 ‘진실(이라고 불리는 것)’ 이상의 영역에 질문을 돌짐으로써 한 차원 높은 고민을 하는 것이다. 순간 두렵다. 만약 일정 수준 우리를 보호하는, 하지만 결코 선하지 않은 권력이 있다면 우리는 모르는 척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까발려야 하는가.


작품에 드러난 미디어의 모습 또한 섬뜩하다. 애초 프로스트가 닉슨과의 인터뷰를 추진할 때 그의 편은 없었다. 그저 영국 촌뜨기가 벌이는 해프닝쯤으로 간주한 미디어 기업들은 프로스트에게 조소를 날린다. 하지만 인터뷰 게임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미디어는 프로스트에게 들러붙기 시작한다. 근원과 상관없이 득이 된다면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미디어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보다 무섭게 느껴진다.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미디어의 자장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작품의 오프닝 장면을 보면 관객은 카메라 속의 인물들을 먼저 만난다. 이는 우리 일상도 마찬가지. 미디어란 필터에 걸러진 세계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또 편집, 클로즈업, 현란한 카메라 워크 등이 사태 자체와 별개로 우리의 감정을 구워삶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여기서 지금 국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미디어법’이 떠오른다. 이토록 무서운 미디어를 ‘몰아주기’ 하자니, 답답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극을 이끌어 가는 두 배우 프랭크 란젤라와 마이클 쉰의 연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2년 동안 원작 연극에서 호흡을 맞춘 두 배우는 스크린에서도 환상의 호흡을 선보인다. 닉슨을 연기한 프랭크 란젤라는 가족 앞에서 피아노를 치고, 시민이 안고 있는 강아지를 쓰다듬는 온화한 지도자의 모습은 물론, 격정적으로 분노하는 한 권력자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특히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을 때 눈빛이 떨리는 장면에서 그의 연기는 스크린을 압도한다.

마이클 쉰은 가벼우면서도 중요한 순간에 예리한 질문을 날리는 프로스트 역할을 훌륭히 소화한다. 인터뷰 전날 애인과 영화 시사회에 참석하는 등의 그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미디어의 속성과 교묘하게 일치하기도 한다. <프로스트 VS 닉슨>은 1977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스크린 속에서 부활시킨다. 30여 년 전 벌어진 사건. 하지만 진실, 권력, 미디어를 향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안효원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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