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향해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있는 편이 훨씬 좋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을 걸로 믿는다. 배우로서, 제작자로서, 영화음악가로서 그리고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영화감독으로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오늘날 영화에 큰 족적을 남긴 그야말로 대가 중의 대가다. 더욱이 여든이 된 지금까지도 계속 되는 그의 행보는 놀랍게도 여전히 정점을 갈구하는 현재진행형 시제. <그랜 토리노>를 통해 다시금 건재함을 확인시킨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의 한 세기에 가까운 장대한 ‘미완성’ 필모그래피를 성글게 더듬어본다. FILMON 편집부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1966)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달러 3부작’(<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건맨> <석양의 무법자>) 중 마지막 작품.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The Good, The Bad, The Weird)에 모티브를 준 작품이기도 하다. 현상금 사냥꾼 ‘금발 머리’(Blondie) 역할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좋은 놈’(The Good)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입 한쪽으로 시가를 물고 잔뜩 찡그린 얼굴,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를 압도하는 저음의 목소리, 사람들의 모자만 맞추는 훌륭한 사격 솜씨까지. 그가 쓰는 라이플만큼 날렵한 몸매 또한 눈에 띈다. 무덤 가득한 곳에서 펼쳐지는 마지막 장면은 돈과 전쟁의 허무함을 보여준다. 안효원 기자
<더티 해리>(Dirty Harry, 1971) 거대한 44구경 매그넘을 피 흘리는 범죄자의 머리에 대고 묻는다. 내가 여섯 발을 쐈을까, 다섯 발을 쐈을까? 샌프란시스코 형사 해리 캘러한(클린트 이스트우드)은 ‘더티 해리’라는 별명처럼 끈질기고 지독한 수사방법을 고집하는 저돌성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상관에게 밉보이면서까지 끝끝내 과잉수사를 감행하는 해리는 그의 별명이 사실은 온갖 더럽고 힘든 일은 다 도맡아 한다는 뜻의 냉소이듯 ‘고독한 총잡이’라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페르소나와도 정확히 맞닿는다. 무차별 살인범에 대항했던 이유 있는 마초, 정의감 넘치는 형사 이야기 <더티 해리>는 이후 감독을 바꿔가며 4편의 속편이 더 더해진 시리즈물로 발전한다. <더티 해리 4: 써든 임팩트>에서는 주연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직접 메가폰을 잡기도 했다. 강상준 기자
<버드>(Bird, 1988)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색소포니스트로 칭송받는 찰리 파커의 삶과 음악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 평소 재즈 광이며 음악에 조예가 깊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음악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찰리 파커(포레스트 휘테커)는 최고의 찬사를 받는 뮤지션임에도 불구하고 술과 마약, 복잡한 사생활로 인해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환호 가득한 재즈 바와 뉴욕의 뒷골목을 교차하면서 그 음악의 위대함과 인생의 비참함을 대조적으로 형상화한다. 눈물을 흘리며 연주하고, 금단 현상에 괴로워하는 포레스트 휘테커의 연기 또한 압권이다. 감독은 이 작품으로 골든 글로브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했다. 안효원 기자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 1992) <백 투 더 퓨처 3>에서 서부시대로 거슬러 간 마티(마이클 J. 폭스)는 미래에서 온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엉겁결에 가명을 말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라고. 이처럼 <용서받지 못한 자>는 그 자체로 서부영화의 상징과 다름없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스스로 쌓아올린 서부영화의 신화를 허물어뜨리는 작품이다. 황량한 서부에서 펼쳐지는 무법자의 이야기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은퇴한 늙은 총잡이가 창녀들의 복수에 걸린 푼돈을 위해 다시금 총을 드는 처연함에서 시작한다. 윌리엄 머니(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총을 뽑아드는 클라이맥스를 통해 총잡이의 진짜 신화를 소급시키는 동시에 수정주의 웨스턴으로의 큰 발걸음까지 더한 <용서받지 못한 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의 영광을 안기며 아카데미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강상준 기자
<사선에서>(In the Line of Fire, 1993)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배우로서의 최대 미덕 중 하나는 다른 배우들처럼 영원한 젊음을 애써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늙은 면면을 배우로서 끈질기게 드러내는 것이다. 대통령 경호 차량 옆에서 뛰는 것만으로도 마냥 숨이 가빠올 뿐만 아니라, 대통령 암살이라는 초유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매번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대통령 경호원 프랭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지닌 노쇠한 몸과 노회한 경험이 그대로 응축된 캐릭터다. <사선에서>에서 프랭크로 분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존 말코비치가 분한 전직 CIA요원 출신의 암살범 래리와 대치하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어렵사리 임무를 완수하는 늙은 경호원을 통해 절묘한 서스펜스를 완성한다. 영화에 르네 루소와의 정사신이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아직 늙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늙은이의 몸부림이야말로 이 스릴러가 입고 있는 독특한 색채다. 강상준 기자
<퍼펙트 월드>(A Perfect World, 1993) 탈옥수 버치(케빈 코스트너)는 도피 도중 우연히 8살 소년 필립을 인질 삼아 자신의 도주에 동행시킨다. ‘여호와의 증인’의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 때문에 또래 아이들과는 달리 정상적인 즐거움을 전혀 접하지 못하고 자란 필립, 그리고 아버지 없이 자라 자연스럽게 범죄자가 된 버치는 어느새 인질범과 인질이라는 관계를 넘어 서로에게 결핍된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를 더듬는 여행으로 이 우연한 만남을 발전시킨다. 이들의 여행은 곧 완전한 세계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숨겨왔던 쓰라린 상처에 대한 치유기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버치를 쫓는 형사 레드로 분했을 뿐만 아니라 감독, 제작, 음악까지 담당하며 자신만의 완전한 세계를 설계하려 했다. 강상준 기자
<미스틱 리버>(Mystic River, 2003) 어린 시절 겪은 끔찍한 사건으로 엇갈린 인생을 살던 세 친구의 잔혹한 재회를 그린 미스터리 스릴러로,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을 영화화했다. 배우 출신 감독으로서 성공적인 평가를 받아 온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미스틱 리버>를 통해 ‘거장 감독’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말할 수 없는 비밀, 그로 인한 죄책감과 두려움, 약육강식과 인과응보의 부조리함을 비장하게 담아 낸 농익은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 25년을 관통하는 복잡한 상황 설정과 극단적인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매혹적인 비극이 비밀을 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처럼 느리지만 신경을 조여 오는 서스펜스로 한껏 빨려들게 만든다. 정미래 기자
<밀리언 달러 베이비>(Million Dollar Baby, 2004) 주로 범죄와 액션, 남자들의 이야기를 만들어왔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작은 권투 영화를 들고 나왔을 때 의아했던 건 사실이다. 늙은 트레이너와 늦깎이 여자 권투 선수가 전해 준 백만 불짜리 감동의 펀치를 맞고 나서야 비로소 “역시!”를 외치게 됐다. 고달픈 현실에서 자신을 믿어 줄 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수백억 달러보다 훨씬 값진 노장의 현명한 프레임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이스트우드는 배우를 ‘살리는’ 감독이기도 하다. 배우가 가진 최대치를 뽑아낼 줄 아는 감독에 의해 처절한 헝그리 복서가 된 힐러리 스웽크는 각종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명배우로 거듭났다. 정미래 기자
<아버지의 깃발>(Flags of Our Fathers, 2006) 제2차 세계대전 중 펼쳐진 미군과 일본군의 전투를 통해 전쟁의 허무에 대한 거장의 깊이 있는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 이오지마 섬에 상륙하기 위해 사지가 찢긴 수많은 젊은이들은 본토의 국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대신 병사들이 성조기를 꽂는 퍼포먼스는 각 신문의 1면을 장식하고, 그들은 ‘영웅’ 대접을 받는다. 국가가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이유는 단 하나. 전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들 가운데 인디언 출신의 아이라 헤이즈(아담 비치)는 국가와 언론이 만드는 ‘쇼’에 환멸을 느끼며 생기를 잃어간다. 전쟁의 화염 속에서 쓰러져가는 개인과 권력이 만든 영웅의 대비 속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극에 달한다. 안효원 기자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Letters from Iwo Jima, 2006) <아버지의 깃발>과 짝이 되어 세상의 빛을 본 작품. 하지만 한국에서는 개봉하지 않았고, DVD를 통해서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은 <아버지의 깃발>과 정반대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미군이 상륙 작전을 펼칠 때 대포와 자동 소총을 자비 없이 발사하던 일본군들. 하지만 그들 또한 전쟁의 피해자다. 이미 패배한 전투에서 병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집에 있는 가족들을 떠올리는 것뿐이다. 하지만 상상이 육신을 날게 할 수 있을 리 만무하고, 그들은 싸늘한 주검이 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시선은 두 작품은 전쟁을 치르는 주체 속에 나란히 들어가 전쟁에 진정한 승자가 있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안효원 기자
<그랜 토리노>(Gran Torino, 2008)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열정은 어디까지일까. <체인질링> 개봉 두 달만에 선보인(미국 기준) <그랜 토리노>는 노장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연출과 주연을 동시에 맡은 이 작품에서 우리는 인생에 대한 거장의 농익은 시선과 세월의 흔적이 배어있는 관록 있는 연기를 만날 수 있다. 이번 연기는 <석양의 무법자>와 비교해 볼만 하다. 그는 똑같이 권총과 라이플을 들고 주변의 적들과 상대한다. 하지만 ‘금발 머리’가 부드럽고 강해보였다면, 이제 그는 강해 보이지만 곧 깨질 것 같다. 이 모습은 이 작품이 그의 마지막 연기가 될 것이라는 소식과 함께 가슴 한쪽을 허전하게 한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결코 식지 않으리라. 그는 지금도 맷 데이먼, 모건 프리먼과 함께 <더 휴먼 팩터>(The Human Factor)를 찍고 있다. 그저 세월이 흐를수록 멋스러워지는 거장에게 고개를 숙일 뿐이다. 안효원 기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자 배우로서 이스트우드의 모든 것에 대한 최종변론. <그랜 토리노>가 북미 지역에서 뚜껑을 연 이후 현지 비평가들이 쏟아낸 반응은 어느 새 이 한 줄의 문장으로 요약되고 있었다. 이스트우드의 모든 것에 대한 최종변론이라,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었다. 정확히 어떤 점을 들어 최종 변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시점은 왜 지금일까. 분명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끄트머리를 장식한다는 (<그랜 토리노>는...
* 영화 결말에 대한 암시가 있습니다.* 네이버 영화란에 올린 글을 손 봐서 올린 글입니다. (원문보기 : 네이버 영화리뷰 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소위 ‘성공의 기준’ 이란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서 성공의 기로에 섰다고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사회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무언가의 일을 한 후 자신이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사랑을 이루었다는 것으로 성공의 의미를 삼는 사람도 있을...
본 건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그랜 토리노] 뿐이네요. [석양의 무법자]는 작년 씨네바캉스에서 볼까 했는데 시간이 안 맞아서 T_T
이스트우드옹 특유의 분위기가 잘 묻어나는 작품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의 깃발 -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보고 싶어지네요 :D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정말 필견의 영화입니다. 영화에 확 몰입됐다가 영화가 끝났을 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죠. 특히 전쟁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놓쳐서는 안되는 작품입니다. 아쉬운 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스크린에서 보지 못했다는 거. 여튼 꼭 챙겨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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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건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그랜 토리노] 뿐이네요. [석양의 무법자]는 작년 씨네바캉스에서 볼까 했는데 시간이 안 맞아서 T_T
2009/03/23 14:33이스트우드옹 특유의 분위기가 잘 묻어나는 작품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의 깃발 -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보고 싶어지네요 :D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정말 필견의 영화입니다. 영화에 확 몰입됐다가 영화가 끝났을 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죠. 특히 전쟁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놓쳐서는 안되는 작품입니다. 아쉬운 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스크린에서 보지 못했다는 거. 여튼 꼭 챙겨 보세요^^
2009/03/23 14:50저에게 가장 영감을 주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은,
2009/03/23 17:43'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였어요. 어릴 때 우연히 봤는데,
노년의 사랑이, 그토록 애절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알고 정말 놀랍고 슬펐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