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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우아한 사람이다. 종종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처럼 홀로 동네 커피숍에 나가 책을 읽거나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다. 갓 볶은 원두 향에서 피어오르는 그 산뜻한 기분이란. 하지만 밥값보다 비싼 찻값이 아까워 종업원이 째려볼 때까지 5시간 이상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건 기본이다. 어쩌다 머핀이라도 하나 시키면 마지막 부스러기까지 손가락에 침 발라가며 꾹꾹 찍어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이만하면 혓바닥으로 접시를 핥고 싶은 욕구가 마구 치밀어 오르는 걸 겨우 참은 거다. 

나 지적인 사람이다. 언제나 가방 속에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수시로 독서를 즐기고 친구들과 만나 인간과 사회, 나아가 인생과 우주의 운명과 철학에 대해 논한다. 날카로운 분석과 적확한 통찰이 맞물릴 때 느껴지는 그 지적인 희열이란. 하지만 아무리 지적인 대화가 고파도 ‘오늘의 운세’가 나쁘면 친구와의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기 일쑤다. 어디 ‘오늘의 운세’ 뿐이랴. ‘띠별 운세’, ‘별자리 운세’, ‘오늘의 타로점’까지, 인터넷 무료 운세 서비스를 샅샅이 조사해 삼위일체의 길운이 비치는 날로 다시 약속 날짜를 잡는다. 소개팅이라도 망치고 들어온 날에는 유료 연애운 서비스 페이지로 손길이 뻗는 걸 가까스로 억눌러야 한다.


그러니까 결론은 이토록 우아하고 지적인 내가 <추적! X-boyfriend>(Mnet), <유건의 러브파이터>(Mnet), <연애불변의 법칙 시즌 7 나쁜남자>(올리브) 같은 케이블TV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들은 실제 연애를 하는 혹은 연애를 했던 사람들이 출연해 자신들의 실제 상황을 보여주는 ‘리얼 연애 프로그램’이다.

헤어진 연인의 ‘사생활 찾기’, <추적! X-boyfriend>

<추적! X-boyfriend>는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는 의뢰인의 신청을 받아 그의 옛 연인을 찾아가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한다. 사람 찾아준다는 점에서는 <TV는 사랑을 싣고>(KBS)와 다를 바가 없지만 <추적! X-boyfriend>의 관심은 헤어진 연인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지 않다. 사실 의뢰인이 맘만 먹으면 굳이 방송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쉽게 옛 연인과 연락이 닿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작 눈 가리고 아웅 하듯 옛 연인을 찾은 이후가 관건이다. 그 사이 새로운 연인이 생긴 건 아닌지, 주인공(의뢰인의 옛 연인)이 어떤 친구들과 어떻게 어울려 노는지를 면밀히 조사하는 데 프로그램의 초점이 맞춰진다. 주변 친구들을 스파이로 섭외해 주인공의 사생활을 며칠 간 몰래카메라로 파헤치는 것. 여기서 종종 의뢰인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옛 연인이 매일같이 친구들과 술자리를 벌이고 모텔에 드나드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재회의 순간은 그 모든 과정 뒤에 따른다. 스튜디오에 나와 달라고 고백하는 의뢰인의 영상 메시지가 깜짝 공개되고 두 사람이 스튜디오에서 재회하는 과정은 하나의 ‘이벤트’처럼 꾸며진다.

치사스런 사랑 싸움, <유건의 러브 파이터>

<유건의 러브 파이터>와 <연애불변의 법칙 시즌 7 나쁜남자>는 목하 열애 중인 연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프로그램이다. <유건의 러브 파이터>에서는 서로에게 불만이 많은 연인들이 출연해 카메라 앞에서 상대방에게 마이크를 던져 가며 공개 설전을 벌인다. 그러다 말문이 막히는 쪽 머리 위 등에 불이 들어온다. 등 세 개가 먼저 켜지는 쪽이 패.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이다 보니 언제 어디서 누구랑 바람피웠네, 아니네 하는 실랑이가 벌어지고 약속을 어긴 것부터 거짓말한 것까지 연인의 허물을 있는 대로 들춰낸다. 여기서 그치면 양반이다. 대개는 상대가 코딱지를 여기저기 묻히고 다닌다느니,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있는데 문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온다느니 하는 하찮은 버릇을 까발리는 데까지 이른다. 프로그램 자체가 싸움이 치사스럽게 번지는 걸 반기는 분위기다.

내 남자친구의 몰래카메라, <연애불변의 법칙 시즌 7 나쁜남자>

<연애불변의 법칙 시즌 7 나쁜남자>는 첫 번째 시즌부터 다른 남성 혹은 여성이 의뢰인의 연인을 유혹하는 상황을 꾸며 연인 간의 신의를 시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의뢰인은 몰래카메라에 찍힌 연인의 행동을 보고 계속해서 그를 만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게 된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일곱 번째 시즌은 평소 연인에게 불친절한 ‘나쁜 남자’를 주제로 삼았다. 술자리가 몰래카메라의 주 무대. 주인공의 이상형에 가까운 ‘작업녀’가 주인공에게 여자 친구가 있느냐고 물으면 보통은 대답을 얼버무린다. ‘작업녀’의 애정 공세가 계속되면 십중팔구 주인공이 먼저 스킨십을 시도하거나 진한 키스를 하기도 한다. 종종 주인공이 ‘작업녀’를 데리고 모텔로 향하기도 해 제작진이 이를 저지할 때도 있다. 

말초신경의 원리, 욕하면서 본다

이만하면 ‘욕하면서 보기’ 딱이다. 이른바 ‘막장드라마’의 대명사 <아내의 유혹>(SBS)의 시청률이 40퍼센트 넘게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평일 저녁 7시 15분만 되면 사람들을 TV 앞으로 모여들게 만드는 바로 그 이유. 케이블 ‘리얼 연애 프로그램’과 <아내의 유혹> 모두 시청자의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복잡다단한 현실을 잊게 만들만큼 자극적이고 화끈한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매운 음식을 먹고 스트레스를 푸는 원리와 비슷하다고 할까?

<일요일일요일밤에>(MBC)의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가상’ 연애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있긴 하지만 현실성 면에선 ‘리얼 연애 프로그램’을 따라올 수 없다. ‘리얼 연애 프로그램’의 밑바탕은 ‘가상’이 아닌 ‘진짜 현실’이 아닌가. 그 점이 자극성을 한층 극대화시킨다.

TV의 사랑과 현실의 사랑

지극히 우아하고 지적인 내가 “어머머”를 연발하며 ‘리얼 연애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제아무리 우아하고 지적이라고 해도 결국은 손가락 하나하나에 말초신경이 뻗어있는 인간이므로. 그렇게 욕하면서 보다 보니 뜻밖의 점도 눈에 띈다. 다소 거창하게 말해 ‘리얼 연애 프로그램’은 TV 속 연애와 사랑의 성역을 과감히 무너뜨렸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드라마와 광고에서 나타난 연애와 사랑은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위대했는가. 집안의 반대 속에서 꽃피는 불굴의 사랑. 불륜이라 말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 좌절을 모르는 해바라기 사랑……. TV의 사랑은 숭고하기만 했다.

그러나 ‘리얼 연애 프로그램’을 통해 드러나는 현실의 사랑은 그렇게까지 맹목적이고 숭고하지 않다. 어린 나이에 덜컥 아기를 낳아 결혼했지만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 구하지 못하는 남자에게 소리를 지르는 여자(유건의 러브 파이터)가 있는가하면 ‘작업녀’의 질문에 커플링을 우정 반지라고 하는 남자(연애불변의 법칙 시즌 7 나쁜남자)도 있다. TV의 사랑에 비하자면 현실의 사랑은 언제나 초라하고 불완전하다.

이런 사랑도 사랑이다

그러나 현실의 사람들은 이런 사랑, 이런 연애을 한다. 때론 치사하고 때론 비루하고 때론 변덕스러운 사랑. ‘리얼 연애 프로그램’은 그런 사랑을 하는 게 나 혼자만이 아님을 일깨운다. 변학도의 강압 속에서도 끝까지 이 도령에 대한 절개를 지켰던 춘향의 사랑만 사랑이 아니다. 이런 사랑도 사랑이다. 지금은 비록 보잘것없어 보여도 이들의 사랑에 세상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설렘이, 진정으로 서로를 위하는 마음 씀씀이가 단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어느 누가 딱 잘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리얼 연애 프로그램’은 그동안 천상을 떠돌던 TV의 사랑을 현실의 사람들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진흙땅 위로 끌어내렸다. 이로써 실은 너도 나도 초라하고 불완전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푸르스트는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간절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시는 볼품없는 건달 사내가 누추한 여관방에서 역시 볼품없는 하녀를 기다리며 쓴 것이라고. 여러 가지 뜻으로 읽을 수 있는 말이지만 나는 오늘 이 말을 볼품없는 사랑도 사랑이라고, 그것도 하나의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뜻으로 읽고 싶다. 그러면 남들에게 우아하게 보이기 위해 애쓰지 않고, 지적인 인상을 풍기려 노력하지 않고 좀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리얼 연애 프로그램을 실컷 보고 즐기면서. 장성란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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