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건 영화(<숏버스>)는 발기되고 젖은 남성 성기의 클로즈업, 여성 성기 클로즈업, 집단 성교, 혼음, 남녀 자위 등이 리얼하게 여과 없이 묘사되어 있는 등 성적 쾌락 추구를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사회의 건전한 성도덕 및 사회 윤리를 크게 해치고 음란성 등으로 인하여 건전한 가정생활과 아동 및 청소년 보호에 위해하고 미풍양속을 해하는 비윤리적인 내용이어서 일반 국민정서에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숏버스>는 2007년 제한상영가를 받았고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기까지 약 2년여의 재판 과정을 거친 후에야 2009년 3월 2일 정식 개봉할 수 있었다. 제5등급, 즉 열외등급이나 다름없는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영화는 ‘제한상영관’에서만 상영할 수 있는 고로 제한상영관이 운영되지 않는 국내 실정상 이는 상영금지 조치나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맘에 안 드는 앵커 정도야 쉽사리 떨구고 방송국에 검찰이 들이닥치는 요즘에 비추어볼 때 별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일일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숏버스>의 수입사인 스폰지는 정식 개봉 언론시사회 자리를 빌려 “마치 포르노물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영화사인양 매도당했다” 전언하며 흥행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이 영화에 대해 개봉의 의의만을 역설했다. 여기서 새삼스레 ‘표현의 자유’라는 거시적인 가치를 끌어와 되뇔 필요도 없다. 어차피 관객들의 외면을 받을 게 뻔한 이 영화를 정식으로 극장에 올리기 위해 법정투쟁까지 불사해야 했던 것부터 우선 불쾌할 뿐이니까. 결국 이 상처뿐인 영광을 안기 위해 영화는 법정에서 상영되고 법정에서 논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논의는 애초부터 법정이 아닌 극장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재미있는 점은 국내 개봉한 <숏버스>는 일종의 ‘아시아 버전’으로 존 카메론 미첼 감독이 직접 남녀 성기 부분을 뿌옇게 모자이크 처리한 ‘삭제 버전’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2007년 처음 공개됐던, 영상물등급 심사를 받았던, 그리고 법정에서 논의됐던 영화도 바로 이 ‘아시아 버전’이다. 물론 이 모자이크 버전조차 사실상의 상영금지 딱지를 붙일 수밖에 없었던 어르신들의 말마따나 <숏버스>가 보여주는 성행위는 꽤나 적나라하고 이질적인 게 사실이다. ‘국내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참으로 갖다 붙이기 편한 말로 애써 폄하하지 않더라도 혼음과 동성애를 즐기지 않는 내 경우에 있어서도 이는 분명 생소한 영역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영화를 보고 불쾌하다거나 성도덕을 크게 해치고 미풍양속(그런 게 있기나 하다면)을 해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할 수도 없었거니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도 않았다.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섹스의 의미는 침대 위에서 반전시위를 벌였던 존 레논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숏버스>가 말하는 섹스의 의미를 찾기 위해 멀리 갈 것도 없다. 영화는 거짓 오르가슴으로 일관했던 어느 섹스 테라피스트의 반성으로 문을 열며 꽤나 역설적이면서 동시에 직설적으로 그 ‘순수’의 의미를 아로새기려 한다. 오르가슴,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고? 영화가 누군가의 입을 빌어 말하는 대로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젊은 육신에 총알을 박아 넣는 일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고,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논의를 여전히 공공에게 맡기지 못하고 대신 고민해주는 제도권의 고매하신 배려심을 비추어볼 때 이는 또 꽤나 중요한 경지인 것도 같다.
어찌됐든 여전히 이 땅 위의 섹스는 은밀한 무엇이어야 한다. 굳이 범죄의 영역까지 거슬러 오르지 않더라도 성인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이 섹스와 그 표현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곳이 겨우 법정이라니 말이다. 영화가 난교를 하랬나, 동성애를 종용하길 했나(또 하면 좀 어때). 결국 솔직하지 못해 어수룩해지길 강요한 한국사회의 분위기는 수많은 젊은 남녀들이 얼굴을 붉히며 약국 앞을 배회하도록 이끌었을 뿐이다. 덕분에 <숏버스>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성의식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지점들은 애초부터 희석되었고, 특히 여성의 열린 성의식에 적극적으로 기반을 둔 영화의 이야기 역시 별세계의 일처럼 관망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러니 겨우 <숏버스>의 정식 개봉에 무턱대고 기뻐할 일은 아닌 듯하다. <숏버스>의 정식개봉 과정이 남긴 상징성이나 판례 그 이상으로 우리는 극장이 아닌 법정에서 진행된 논의를 통해 이미 많은 것을 잃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퇴보할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이 땅의 분위기는 비단 이민만을 종용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어느 순간 머릿속까지 퇴화할 것 같은 두려움을 꾹 감내하고 내가 저속한 게 아니라고 내가 음란한 게 아니라고 끝까지 붙들고 늘어져야만 할 것 같은 요즘이다. 여성의 섹스어필에 대해 여전히 남성 중심의 끈적한, 혹은 모멸어린 눈빛을 던지는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도 아마 조금 더 조선시대와 가까워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여성조차 여성을(그리고 자기 자신을)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애써 숨기고 움츠러들 필요는 없다.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죄가 아니었듯, 섹스 역시 절대 죄가 아니다. 오히려 범죄는 침대보다는 법정에서 더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강상준 기자(FILMON)
선뜻 손 내밀고 싶은 그 쾌청한 낙원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렛 미 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하나를 떠올려보자. 이엘리와 오스칼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다. 이엘리는 문을 비집고 오스칼의 집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불행한 사실 하나, 이엘리가 온전히 오스칼의 집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오스칼의 의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가 들여보내주지 않으면 이엘리에게는 댓가가 따른다. 아니나 다를까, 이엘리의 피부 속 온갖 신경을...
성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 자체가 오염돼 있는 것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기성세대들의 과민 반응이 불러온 헤프닝이라고 생각함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구성애 선생님의 아우성이라도 열심히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에혀~
이렇게 일순간 사회적 관점이나 편견이 성장할 수 있는가? 라며 놀라워 했던 과거가 아프게 떠오르는군요.
뭐 그렇지요. 절대 그렇게 싑게 될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ㅠㅜ
조금만더 사회적인 편견을 벗으려면 10년 더 기다려봐야할듯 예전과 비교해보면 .
단지 영화는 영화일뿐 성인과 비성인을 분리해서 너무나 감추려고만 하는것도 문제가 있네요
조금씩 열어야 할때가 된거 같아요. 어차피 판단을 관객들의 몫이고 처음으로 부딪히는 이질감도
조금씩 엶어지겠죠. 단지 사회적인 것 때문에 아직도 관객을 비성인으로 보고 개봉을 금지한다는것은
아직도 관객의 수준을 조선시대의 관객으로보는 위원회의 상식적인 머리겠죠 ,, 지금은 2009년 곧있으면
2010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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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 자체가 오염돼 있는 것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2009/04/16 18:13기성세대들의 과민 반응이 불러온 헤프닝이라고 생각함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구성애 선생님의 아우성이라도 열심히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에혀~
이렇게 일순간 사회적 관점이나 편견이 성장할 수 있는가? 라며 놀라워 했던 과거가 아프게 떠오르는군요.
뭐 그렇지요. 절대 그렇게 싑게 될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ㅠㅜ
숨기면 숨길 수록 범죄가 되는게 성인 것 같아요. 우리 사회 조금더 섹스와 성에 대해 생활 속에서 쉽게 애기 할 수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ㅎ
2009/04/16 18:51꽤 슬픈 영화기도 한데 위의 밥통대가리들은 보이는게 그것 뿐인가봅니다. 알곤 있었지만 수준 떨어져서 아무 것도 못시키겠습니다. 작품성이 철철 넘치는데 말이죠.
2009/04/17 09:53조금만더 사회적인 편견을 벗으려면 10년 더 기다려봐야할듯 예전과 비교해보면 .
2009/04/17 10:02단지 영화는 영화일뿐 성인과 비성인을 분리해서 너무나 감추려고만 하는것도 문제가 있네요
조금씩 열어야 할때가 된거 같아요. 어차피 판단을 관객들의 몫이고 처음으로 부딪히는 이질감도
조금씩 엶어지겠죠. 단지 사회적인 것 때문에 아직도 관객을 비성인으로 보고 개봉을 금지한다는것은
아직도 관객의 수준을 조선시대의 관객으로보는 위원회의 상식적인 머리겠죠 ,, 지금은 2009년 곧있으면
2010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