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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영역’으로 질주하는 워쇼스키의 <스피드 레이서>
-<매트릭스> 떼고 보기
처음엔 급커브 코스를 드리프트로 물 흐르듯 헤쳐 지나가는 차량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와 싶었다. 하지만 <스피드 레이서>에 대한 기대치가 결단코 비디오게임에서도 쉽게 구사할 수 있는 드리프트 기술에 머물 리 없듯, <스피드 레이서>의 볼거리는 실사영화로서는 전대미문의 영역에서 활개칠 뿐만 아니라 7,80년대 애니메이션 기법을 미끈하게 재구성하여 실존 배우들과 함께 미지의 세계에 몸을 기댄다.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무려 16년 전부터 67년 작 TV애니메이션 <마하 고고고>의 실사영화화 프로젝트를 구상하며 군침을 흘리던 할리우드 영감들이 구스 반 산트, 알폰소 쿠아론, J.J 에이브람스 등의 쟁쟁한 감독을 꼬여내다 마침내 워쇼스키 형제의 손에 이 낡은 장난감을 쥐어주고 요리를 맡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스피드 레이서>는 철저히 세월의 때를 머금은 작품이며 추억의 산물이었으니 만화와 재패니메이션에 대한 동경으로 성장기를 보내고 그 철없던 시절의 경험을 상상력과 버무려 하나둘 스크린에 구현한 이들 워쇼스키라면 16년을 묵힌 프로젝트의 가닥도 낯선 빛줄기를 발견하며 예상치 못한 통로를 확보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워쇼스키 형제의 영상혁명 2라운드 <스피드 레이서>는 어쨌든 생경한 시각적 경험이라는 면에서만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인 색채를 선사한다. 듣도 보도 못한 이 낯선 신세기 향연은 원작 <마하 고고고>와도 다른 건 물론이고, 워쇼스키의 이름이나 <매트릭스>의 짙은 잔영에도 멀찌감치 벗어나 있다. <스피드 레이서>는 순전히 총천연색 롤러코스터를 목표한 영화로 질주의 짜릿함과 절벽 아래로 내리꽂는 스릴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다. 스스로를 옥죄는 <매트릭스>의 무거운 사슬에서 벗어나 신나게 달리는, 그것도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제로의 영역’을 향해 레이싱하는 워쇼스키의 8단 기어는 비탈길이든 자갈길이든 개의치 않고 그저 결승점으로 내달린다. <스피드 레이서>는 ‘마하6’(원작의 ‘마하5’를 업그레이드한) 그 자체를 체화한 영화로 처음부터 관람석을 향해 손짓하며 탑승을 종용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동안 느끼는 감흥은 짧고 경쾌하다. 그러나 여기에도 묘가 있다. 어느 코스든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안전벨트의 안전 유무마저도 염려하도록 이끄는 적절한 기복 설계는 필수요, 탑승자의 불안함을 스릴로 승화시켜 즐거움을 주는 원천의 목적에도 충실해야만 한다. 물론 롤러코스터를 즐기는 동안 스치는 배경들이 모두 뚜렷하게 보이는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굉장한 속도로 휘몰아치는 <스피드 레이서>의 세계가 실제세계와의 핍진성과는 저 멀리 떨어져 선악이분법의 단출함으로 피아를 나누고 있는 것, 그리고 주인공 스피드(에밀 허쉬)의 목표를 레이싱 경기 우승이라는 가시성 안에 단숨에 몰아넣고 있는 것도 같은 이치다. 형을 동경하는 소년의 성장은 곧 레이싱을 통해 각성에 이르고, 가족의 소중함을 지키며, 악의 섬멸과 세계의 모순된 논리를 걷어내는 특별하지만 익숙한 길을 그대로 되밟아간다.
단 한부분도 소년만화의 수순에서 벗어나지 않는 <스피드 레이서>의 세계관과 그 이야기들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지나치는 풍경만큼이나 짧고 경쾌하게 처리되어 있다. 섬세하게 구성된 바깥 풍경에 눈을 뺏기고 나면 롤러코스터의 몰아치는 스피드와 기기묘묘한 코스 따위를 제대로 만끽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인지 복잡하고 골머리 썩힐만한 것들은 철저히 제거됐다. 이는 워쇼스키가 완전히 미래적이지도 또 그렇다고 현시점의 연장선상에 놓을 수도 없는 시대불명 정체불명의 세계를 창조한 의도와도 일치한다. 팝아트적 감각으로 알록달록한 색깔을 덧입힌 <스피드 레이서>의 세계는 진짜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워쇼스키가 선별한 것들을 함축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구현된 압축적인 공간이다. 부러 세피아 톤의 세련된 공간을 마련하지도, 또 이제까지 할리우드가 보여준 애니메이션 실사화에 걸맞게 현재의 진짜 레이싱 경기에 그럴듯하게 기대지 않은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좀 더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지 않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처음부터 너무나 명백했다. 그건 바로 사방팔방으로 튀어 오르는 차들. 공중에서 몸체를 비틀어 가까이 붙은 차량을 튕겨내고, 빙글빙글 차체가 회전하는 위험천만한 과정 속에서도 레이싱카의 질주는 계속된다. 철퇴를 휘두르고, 투석기를 사용해 벌통을 던지고, 뱀을 뿌리고, 기름을 흘리며 경쟁자를 낙오시키는 영화 속 일련의 카레이싱 장면은 철저히 만화적이다. 뱀처럼 약은 경쟁자 한 녀석이 뱀 형상을 한 차를 타고 또 결국에는 실제 뱀을 다른 레이서 운전석에 뿌리고야마는 이 만화적 풍경은 워쇼스키호 롤러코스터의 정체를 더욱 분명히 하는 것들이다. 워쇼스키에게 스토리란 처음부터 가족영화와 소년만화라는 익숙하고도 단순한 레퍼토리 위에 음모와 복수와 성장과 파멸과 승리가 놓일 자리만 분명하면 그뿐이었다. 스피드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너는 트랙 위의 예술가야”라는 간지럽고도 민망한 대사를 진지하게 날리는 영화일진대 네오의 고민과 스피드의 고민을 일치시키는 것이야말로 섣부른 기대다. 워쇼스키가 원한 것은 그저 7,80년대 애니메이션의 실사영화 재림이었고 그들은 여기에 만화적이고 게임적인 시각적 향연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며 자신들의 영상혁명 2라운드를 구축하려 했던 것뿐. 그리고 그 이상의 야욕을 부리는 포화의 우를 범하지 않으며 탈R등급 영화 연출의 목표를 충실히 완수한다.
<스피드 레이서>는 만화보다 더 만화적인 영화다. 이 영화의 핍진성이라고는 그저 실사 배우들이 등장하는 것뿐일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절벽을 기어오르고, 종으로 횡으로 튀어 다니는 자동차를 바라보면서 단 한순간도 “말도 안돼!”라고 외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철저히 원작에 대한 오마주와 영상혁명의 야심만으로 가득 찬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애들영화’ 혹은 ‘유치한 스토리’로 일컬어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유치를 의도하지 않은 영화도 유치함을 자아낼진대 이 의도한 유치함을 의식 못할 관객이 어디 있겠는가. 스토리만 두고 본다면 <스피드 레이서>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유치하고, 그 누가 봐도 유치하다. 하지만 워쇼스키가 매끈한 <매트릭스>의 세계로부터 일만 광년 이상 떨어진 곳에 <스피드 레이서>의 트랙을 만든 이유는 처음부터 전혀 다른 영역을 꿈꿨기 때문인 것만은 분명하다. 워쇼스키는 그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들어서지 못한 ‘제로의 영역’을 목표삼아 레이싱하려 했을 뿐이고, 그 작지만 큰 목표만큼은 확실히 달성하고 있다. 강상준 기자 (www.film-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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