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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온 줄리안 무어

PEOPLE ON 2009/07/22 20:08 Posted by '미래

<세비지 그레이스>에 대한 평가는 엇갈려도 줄리안 무어의 신들린 연기에 대한 찬사엔 이견이 없다. 데뷔 이래 25년 간 독립영화에서부터 블록버스터, 로맨틱 코미디에서 SF까지 거의 모든 규모와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연기의 스펙트럼을 선보이고 있는 무어는 어느덧 할리우드의 든든한 중견 배우로 자리 잡았다. 50여 편의 영화 속에서 작품성과는 별개로 역할의 크고 작음을 떠나 오롯이 믿음직한 연기력을 발산해온 줄리안 무어의 다채로운 필모그래피를 따라가 본다.


<요람을 흔드는 손> The Hand That Rocks The Cradle, 1992

1984년 브라운관을 통해 활동을 시작한 무어는 1990년부터 영화로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고, 한 품은 여자의 스릴러 <요람을 흔드는 손>에서 신인 배우의 필수 코스인 ‘주인공 친구’를 맡았다. 복수극에선 예상치 못한 희생자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너무 똑똑하고 눈치가 빨라 진실을 캐내려하는 잘난 조연 말이다. 클레어(아나벨라 시오라)의 친구인 섹시한 워킹 우먼 마를린(줄리안 무어)은 가정부 페이튼(레베카 드 모네이)을 수상쩍어 한다. 결국 뒷조사를 통해 페이튼의 정체를 알아낸 마를린은 친구에게 진실을 알리려다 용의주도한 복수의 화신에게 당한다. 잠깐의 출연으로 도도하게 인상을 남긴 무어는 온실 천장의 깨진 유리 조각 세례를 받으며 처참한 최후를 맞았고, 그 뒤로 영화배우로서의 행보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정미래 기자



<부기 나이트> Boogie Nights, 1997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이고, 우아함과 퇴폐미가 공존하는 줄리안 무어는 혼을 빼놓는 미모라기보다는 개성 있는 아름다움을 지닌 배우다. 그리고 그녀는 몸을 사리지 않는다. 70년대 미국 포르노 영화 산업을 적나라하게 스케치한 <부기 나이트>. 마크 월버그, 헤더 그레이엄 등 생기 넘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줄리안 무어는 원숙하고 노련한 포르노 여왕의 자태를 드러냈다. 무어가 분한 앰버는 포르노 왕국의 국모로서 ‘33센티미터 물건’만 믿고 뛰어든 애송이와 롤러스케이트를 탄 명랑한 포르노 걸을 엄마처럼 보듬고 가르친다. 천박한 포르노 영화 속 주인공이자 관조적이고 나른한 배우, 포용력 넘치는 선배까지 강약의 리듬을 조율하며 자연스럽게 영화 속 한 부분된 줄리안 무어는 23회 LA 비평가 협회상, 32회 전미 비평가 협회상에서 여우조연상의 영예를 안으며 연기파 배우로 거듭났다. 정미래 기자




<매그놀리아>
Magnolia,1999

<매그놀리아>가 치유의 영화로 묵직한 자취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치유할 수 없을 상처를 품은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를 용서하는 그 불가해한 과정에 우연과 순리만이 아닌 용기와 참회가 아름답게 관여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 앞에서 오열하는 톰 크루즈가 누구보다 인상적이었던 이 작품에서 줄리안 무어는 남편의 돈만 보고 결혼한 젊은 아내 린다로 출연해 병상에 누운 늙은 남편에게 거짓과 가식으로 일관하는 차가운 여인을 연기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서야 자신이 진정 남편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동안의 허위를 반성하는 린다는 용서와 구원의 영화 <매그놀리아>에 가장 새하얀 목련 꽃잎을 드리운다. 강상준 기자




<한니발> Hannibal, 2000

이것은 누가 봐도 무모한 도전이었다. 팬들에게 스탈링 요원은 어디까지나 조디 포스터였고 앞으로도 조디 포스터여야 했기 때문이다. 결과 역시 극명했다. 조디 포스터가 각인시킨 스탈링이 나약한 내면을 딛고 강인한 의지력을 내세운 이지적 풍모의 여성 캐릭터였다면, 바통을 이어받은 줄리안 무어의 스탈링은 영화 제목처럼 식인귀 한니발 렉터(앤서니 홉킨스)를 비추는 꽤 괜찮은 조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무모한 승부에 응했다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도전을 한 건 분명한 사실. 비록 스탈링의 이미지를 줄리안 무어 자신으로 갱신하진 못했지만 누구라도 꺼릴 도전에 응해 궁금증 가득한 속편을 완성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하다. 조디 포스터가 전작 <양들의 침묵>에 먼저 출연했다는 불평등한 출발선만이 그녀의 뒤집을 수 없는 불행이었을 뿐이다. 강상준 기자



<에볼루션> Evolution, 2001

<엑스 파일>의 ‘멀더’ 데이빗 듀코브니 주연의 코믹SF로 알려진 <에볼루션>은 알려진바 그대로 줄리안 무어의 비중은 극도로 미미하다. 하지만 여주인공, 그것도 거의 유일한 여성캐릭터로 등장함에도 그녀가 묻히는 이유는 잔뜩 외계생물에 기댄 영화의 무게중심 때문만은 아니다. 애써 코믹함을 내세우려 발버둥 치는 그녀의 연기란 고작 유리문에 부딪치거나 괜스레 넘어지며 가터벨트를 보여주는 ‘덜렁녀’ 과학자 캐릭터를 정말로 연기하는 것처럼 연기하기 때문. 하긴, 거대 외계생물의 항문에 비듬샴푸를 찔러 넣고 구국의 영웅이 되는 이 영화에 대한 기대치는 관객도 그녀도 처음부터 딱 그 정도였는지도. 강상준 기자



<파 프롬 헤븐>
Far from Heaven, 2002

투명하리만치 하얀 피부, 그윽한 눈매, 온화한 미소. 무어는 ‘그림 속의 여자’ 같다. <파 프롬 헤븐>에서 무어는 ‘천국 속의 여자’, 케이시를 연기한다. 그 천국은 호황을 누렸던 1950년대 미국의 상류층 가정이다. 믿음직스런 남편, 사랑스런 아이들, 아름다운 저택 속에서 케이시는 더 없이 행복하다. 그러나 완벽할 것만 같던 케이시의 행복은 남편 프랭크(데니스 퀘이드)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산산조각 난다. 그 순간 무어의 하얀 피부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창백해지고, 그윽한 눈매에는 슬픔이 비치고, 온화한 미소는 서글프게 변한다. 무어는 그림 같은 우아함과 가슴 저미는 애달픔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그 연기는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트로피로 치하하기에도 모자랄 만큼 그야말로 완벽했다. 장성란 기자




<디 아워스> The Hours, 2002

1998년 발간된 마이클 커닝햄의 퓰리처 수상작을 <빌리 엘리어트>의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이다. 줄리안 무어뿐만 아니라 니콜 키드먼, 메릴 스트립까지 출연해 일대 화제를 몰고 왔으며,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경이로운 연기가 평단의 일치된 격찬을 이끌어 냈다. 처음 언론이 주목한 것은 특수 분장을 감행한 니콜 키드먼의 버지니아 울프였지만 극의 중심은 평범한 일상에 질식당하고 있는 주부, 로라를 연기한 줄리안 무어가 쥐고 있었다. 나른한 목소리와 몽롱한 눈빛 뒤로 숨겨놓은 자유와 자아에 대한 갈망을 위태롭게, 아슬아슬하게 연기한다. 그녀는 원작소설이 오마주를 바친 <댈러웨이 부인> 그리고 <디 아워스>, 그 자체였다. 이 작품과 <파 프롬 헤븐>이 공개됐던 2002년은 그녀 연기 인생의 정점이었다. 유주하 기자



<포가튼> The Forgotten, 2004

<디 아워스> <파 프롬 헤븐> 을 통해 작가주의 감독들의 뮤즈로 떠오른 줄리안 무어는 이후의 작품 선정에 연달아 실패한다. <사랑에 빠지는 아주 특별한 법칙> <마리와 브루스>같은 로맨스 영화도 그랬지만 2004년 공개된 스릴러 <포가튼>은 그녀의 이력에 또 하나의 오점을 남겼다. 그야말로 독한 아들 사랑을 보여주는 그녀의 연기는 여전히 뛰어났으나 작품의 허탈한 결말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현대 관객들에게 해피엔딩이란(더구나 스릴러에서) 금단의 열매나 마찬가지.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줄리안 무어에 대한 평가는 이 작품을 통해 다시 지상으로 내려앉게 되었다. 그래도 성과가 없지는 않았는데, 적당한 기획으로 적당한 흥행을 노리는 적당한 블록버스터에 출연하는 것, 또는 할리우드식 해피엔딩이 그녀에겐 독으로 작용한다는 교훈이었다. 유주하 기자




<세비지 그레이스> Savage Grace, 2007

무어의 얼굴에는 강인함과 연약함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각진 턱 선과 붉은 머리칼은 단단해 보이지만 창백한 피부와 고요한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처량하다. 무어 특유의 우아한 미소 위로 그 강인함과 연약함이 번갈아 떠오른다. 그래서 무어의 얼굴은 그대로 하나의 드라마다. <세비지 그레이스>는 그 드라마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영화다. 부유한 발명가 집안의 안주인 바바라(줄리안 무어). 세련된 옷차림, 화려한 명사들과의 만남, 뉴욕, 파리, 마조르카, 런던을 오가는 자유로운 생활. 우아하기 그지없는 바바라는 그러나 한순간,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신경질을 부리고 난폭한 말을 뱉는다. 남편이 아들의 여자와 함께 떠나고 무기력한 아들과 애증의 관계를 되풀이하는 그 불안한 세월을 바바라는 그렇게 강인하고 연약하게 견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무어의 연기는 다시 한 번 찬란하게 ‘우아하게’ 빛난다.
장성란 기자



<눈먼 자들의 도시> Blindness, 2008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모두가 맹인이 되어버린 도시. 유일하게 실명되지 않은 줄리안 무어는 남편을 돕기 위해 눈먼 척을 해 수용소에 들어간다. 갑자기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 이들은 사방에 쓰레기와 배설물을 쌓아놓고 혼란스럽게 나뒹굴며, 그 속에서 눈먼 폭군은 약탈과 폭력을 일삼는다. 차라리 눈이 멀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은 생지옥 속에서 줄리안 무어는 눈 딱 감고 눈먼 자들의 구원자가 된다. 그들의 손발이 되어 씻기고 먹이는 그녀의 모습은 모성애로 무장한 외유내강 여전사다. 눈먼 주제에 바람까지 피우는 남편을 묵인하고, 음식을 되찾기 위해 악당에게 몸을 바치는 줄리안 무어는 부서질 듯 아슬아슬한 심리와 담대하게 위기를 헤쳐 나가는 행동력을 탁월하게 소화해내며 묵시록의 한 가운데로 관객을 끌어당긴다. 정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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