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부천영화제)가 7일째 순항중이다. 중반을 넘어선 영화제는 각 장르의 변화상을 대표하는 화제작들을 공개하고 있다. 그간 부천영화제를 대표하는 장르였던 호러 장르에선 서구권 영화들이 강세다. 이들의 공통점은 가족을 ‘낯설게’ 본다는 점이다. 톰 셍클랜드 감독의 <더 칠드런>(영국)에선 아이들이 살인마로 변하고 폴 솔렛 감독의 <그레이스>(캐나다)에선 아예 좀비 아기가 등장한다(그래서 <마더>의 좀비영화식 변용으로 불리고 있다). 16세기 러시아-스웨덴 국경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안티-주시 안닐라 감독의 <사우나>(핀란드)는 살인마 형과 그를 방관하는 동생의 이야기를 담았다. 아쉽지만 근래 몇 년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던 아시아권의 공포영화는 이렇다 할 화제작이 없다.
<초콜렛>
<메란타우>
부천영화제의 새로운 흐름 중 가장 큰 줄기는 아시아의 액션 영화다. <옹박: 무에타이의 후예>(이하 <옹박>)으로 이름을 알린 프라차야 핀카엡 감독의 신작이 눈에 띈다. 그의 작품 <초콜렛>(타이)에선 ‘자폐아 무술천재소녀’라는 독특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감독의 전작 <옹박>이 주연배우 토니 자의 기예에만 집중했던 반쪽짜리 작품이라면 <초콜렛>은 자폐와 무술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드라마의 동력으로 활용한 진일보한 액션 영화다. ‘뛰어난 무술실력의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하는 니시 후유히코 감독의<하이 킥 걸>(일본)은 진부한 캐릭터에도 불구, 실제 무술가 출신 연기자들의 호쾌한 액션이 돋보인다. 부천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되는 가렛 후 에반스 감독의 폐막작 <메란타우>(인도네시아)가 소문만큼 훌륭한 작품이라면 아시아 액션 영화의 약진을 점쳐볼 수도 있겠다.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
학대받던 소녀의 무서운 복수극을 그린 파스칼 로지에 감독의 공포영화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프랑스, 캐나다)이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다소 이질적인 작품이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전통적으로 호러가 강세였던 부천영화제임을 상기한다면 <바더 마인호프>에 대한 뜨거운 반응은 다소 뜻밖의 것이다. 울리 에델이 연출한 이 영화는 1970년대 서독을 들끓게 했던 좌익운동단체 ‘독일적군파(RAF: Rote Armee Fraktion, 이하 RAF)’를 소재로 한다. 특이한 것은 이 지독히 정치적인 소재의 영화가 감각적인 영상과 속도감 있는 편집으로 인해 ‘정치 블록버스터’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정치 관련 영화가 ‘정치적 공정성’에 촉각을 세우는 것과는 달리 <바더 마인호프>는 RAF의 1세대, ‘바더-마인호프’ 그룹 구성원의 모습을 근사한 영상과 화려한 음악으로 재구성한다.
<바더 마인호프>
<바더 마인호프>가 그려내는 서독의 길거리는 첩보영화의 그것과 같은 위험천만한 매력이 넘실거린다. 심지어 RAF 단원들이 벌이는 테러 행위가 액션 영화 못지않은 운동에너지를 보여주는 것이다.총격전 끝에 쓰러지는 여성 적군파 단원(페트라)이 등장하는 장면에 이르면 그 화려한 비주얼에 탄성이 나올 정도. 하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관객에겐 불경스러운 ‘스타일’이다. 민감한 사회주의자라면 이 영화의 근사한 외양이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교묘한 조롱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운동, 반제국주의운동이 한낱 구경거리일수는 없지 않은가(체 게바라를 스타일 아이콘으로 소비하는 요즘이라면 그리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엄격한 우파의 시선에서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던 ‘바더-마인호프’ 그룹의 테러 행위가 액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 지다니 모욕적인 일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지난해 독일 개봉 당시 테러에 희생당한 정부 관료 유족들과 RAF의 직·간접적 관계자들 모두로부터 대대적인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논쟁적인 부분은 스타일만이 아니다. <바더 마인호프>는 ‘불공정한 스타일’을 통해 공정한 이야기를 시도하는 작품이다. 영화는 인물들의 행동과 결과에 어떠한 판단도 유보하는 자세를 취한다. 제작자 베른트 아이힝거는 “이 영화는 교훈을 제시하기 위한 작품이 아니다”라고 밝힌바 있다. 얼핏 불가능해 보이는 이 시도는 일정부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속 바더-마인호프 그룹의 구성원들은 철없는 이상주의자들이며 위험한 극단주의자들인 한편, 행동을 미루지 않는 열혈운동가들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적인 요소와 픽션의 요소를 거리낌 없이 왕복한 덕분에 서사는 진실과 거짓을 모두 아우르는데 성공한다.
<바더 마인호프>
이런 혼란에도 불구하고 <바더 마인호프>의 완성도를 문제 삼는 의견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를 역동적으로 재현하려는 기획과 연출력이 지루하지 않은 정치 영화를 탄생시켰다. 물론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육체의 증거> <니벨룽겐의 반지> 등 다소 들쭉날쭉한 필모그래피를 보여준 감독의 이력을 생각할 때 <바더 마인호프>의 매력은 그의 작가적 역량의 한계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를 제외한다면 그의 작품들은 액션과 근사한 스타일 연출에 집중된다). 여하튼 관객이 혼란에 빠진 사이 영화는 생동감을 확보했다. 기이하면서도 매력적인 작품이다. 영화제 상영이 끝났지만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7월 23일, 일반 극장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유주하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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