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비즈드래곤이라는 회사의 김유현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낯선 이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그는 비즈드래곤이 한국 기업의 아르헨티나 및 남미 진출을 도와주는 회사이며 최근 영상 관련 일을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지난해 <신부의 아들>이라는 영화를 EBS에 판매했고, EBS 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에 <탱고 이야기>를 출품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초 한국 단편영화 16편과 장편 7편을 남미 케이블 방송국에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남미영화 30여 편의 판권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 극장에 개봉할만한 영화인지 조언을 구하고 싶다고 했다.
‘남미영화’라는 글자가 이렇게 생경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그동안 본 영화의 대부분은 ‘할리우드’로 통칭되는 ‘북미영화’였다. 내가 남미영화를 본 적이나 있었던가. 다국적 프로젝트가 일반화되어 영화의 국적을 따지는 게 의미 없는 일이 되어 버린 지금, 무엇이 남미영화인지 조차도 감이 안 잡힌다. 그래도 단순히 라틴아메리카가 배경인 영화가 아니라 그들의 자본으로 그 나라의 감독이 만든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정의로 미루어 볼 때 내가 접한 남미영화는 가끔 영화제에서 어쩌다 보게 된 다소 지루한 영화들뿐이었던 것 같다. 지구 반대편이라는 까마득한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남미영화는 내게 미지의 존재로 여겨졌다.
잠깐의 갈등 끝에 답 메일을 보냈다. “제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영화를 보내 주시면 솔직한 감상평을 말해 드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며칠 후 DVD가 배달됐다. 두려움과 떨림을 안고 한 장의 DVD를 재생시켰다.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를 영어자막으로 더듬더듬 따라가며 본 첫 영화는 <텅 빈 보금자리>(El nido vacio, 2008). 유명한 극작가인 레오나르도(오스카 마르티네스)와 마르사(세실리아 로스)는 권태기에 접어든 중년 부부다. 딸 훌리아가 결혼을 앞두자 대학에 돌아가 학업을 시작한 마르사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달라진 아내의 모습에 소외감을 느끼며 쓸쓸해한다. 그렇게 무의미하고 고독한 나날을 보내던 레오나르도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 비올레타(에우헤니아 카피사노)를 만나 설레는 감정을 품게 된다.
<텅 빈 보금자리>는 <잃어버린 포옹>(El abrazo partido, 2003)으로 2004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며 ‘뉴 아르헨티나 시네마’의 기수로 떠오른 젊은 감독 다니엘 부르만의 최신작이다. 중년 남성의 권태와 성적 판타지를 그린 작품으로, 희끗한 머리의 아저씨가 주인공이지만 영화는 굉장히 발랄하다. 바쁜 아내의 소홀함에 섭섭함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지내던 남자가 젊고 매력적인 여인에게 첫눈에 반해 사춘기 소년처럼 변해가는 모습이 귀엽게 여겨질 정도다.
‘바람난 중년남’이라는 소재는 자칫 ‘불륜 영화’로서의 음습한 분위기를 풍길 가능성이 큰데, <텅 빈 보금자리>는 상당히 뽀송뽀송하다. 그것은 경쾌하고 감각적인 영상, 음악과 더불어 감독의 재기가 느껴지는 환상 시퀀스의 힘이다. 비올레타의 주변에서 맴돌던 레오나르도는 느닷없이 그녀와 키스를 하고, 관악대의 흥겨운 연주와 함께 종이 꽃가루를 받으며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환상으로의 전이가 너무도 갑작스럽고 자연스러워 기분 좋은 당혹스러움을 선사한다. 영화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무너트려 비올레타를 바라보는 레오나르도의 감정에 롤러코스터를 태우고 그것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시킨다.
두 번째로 <마라도나를 찾아서>(El camino de san diego, 2006)라는 영화를 봤다. 타티(이그나시오 베니테스)는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의 열혈 팬이다. 실직으로 우울해하던 그는 산 속을 걷던 중 마라도나의 모습을 닮은 나무뿌리를 발견한다. 때마침 마라도나가 심장질환으로 쓰러지고 타티는 자신의 영웅에게 나무뿌리를 가져다주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한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순결한’ 로드무비다. 가난하고 순박한 시골 남자 타티가 대도시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는 나무뿌리를 들쳐 맨 채 버스를 타고, 트럭을 얻어 타는 등 몇 번이나 교통수단을 바꿔가며 마라도나에게로 간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영화는 타티의 여정을 정직하게 따라가며 아르헨티나 소시민들의 삶을 비춘다. 그 속엔 가진 건 없지만 여유로움과 순수함을 간직한 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너무도 단순한 전개에 다큐멘터리처럼 장식적이고 극적인 장치를 배제했음에도 묘하게 긴장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타티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관객은 그가 위험에 빠지거나 시련을 겪을 것 같은 조마조마함을 갖게 된다. 차를 태워준 트럭 운전수가 나쁜 놈은 아닐지, 나무뿌리가 부러져버리는 건 아닌지 매 순간 초조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걱정을 하나씩 잠재운 타티의 여정은 너무도 순탄하게 흘러간다. 캐릭터나 전개방식에 있어서 극도의 순수함을 보이고 있지만 너무도 흥미진진한 영화다.
며칠이 지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타티는 마라도나의 그림자도 만나보지 못한 채 경비원에게 나무뿌리를 건넨 뒤 흐뭇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향한다. 타티의 순진무구한 얼굴과 ‘마라도나 닮은 나무뿌리’가 주는 기발하고 따뜻한 정서가 보는 이의 마음까지 흐뭇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알고 보니 <마라도나를 찾아서>는 2007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었다. 사회비판적 메시지의 다큐멘터리 <아메리카 타조의 시대>(La era del ñandú, 1986)로 데뷔한 카를로스 소린 감독은 ‘길’과 ‘서민’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에서 ‘로드무비의 대가’로 불린다고 한다.
올 여름, 우연히 만난 두 편의 영화를 통해 나는 아르헨티나 영화의 매력에 퐁당 빠져버렸다. 그리고 남미영화에 대한 편견과 낯가림이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재미있는 남미영화, 더 많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감상을 마친 나는 바로 메일을 보냈다. “개봉해주세요. 극장에서 한글자막으로 다시 보고 싶네요!” 정미래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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