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야구하고픈 마음 누구나 굴뚝같다만 가을에 야구하도록 점지 받은 팀은 올해도 네 팀뿐. 고로 포스트시즌의 막이 올라가기 전까지 8개 구단 모두가 맞붙는 이 뜨거운 계절이야말로 진정한 야구의 계절이랄 수 있다. 특히나 올 여름 프로야구는 여느 해보다도 더욱 뜨거워 시즌 3분의 2를 소화한 현재까지도 1위부터 5위팀까지 가을 축제에 안착하기 위해 살얼음판 위를 내달리는 중이다. 베이징올림픽과 WBC를 거치며 전국민의 가슴 속에서 새로운 전성기를 누리는 야구. 그야말로 뜨거운 여름, 불타는 야구의 계절이다.
물론 두말할 것도 없이 야구의 참맛은 중계보다는 ‘직관’이 대세. 허나 TV로 보는 야구의 재미가 만만치 않듯 마찬가지로 만화로 가공된 야구, 야구를 소재로 한 야구만화 역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여름아이템이다. 그렇다면 만화의 본고장 일본, 그리고 일본의 국민스포츠 야구가 결합한 야구만화는 어떤 게 있을까? 애써 떠올릴 것도 없이 약 5천여 개 고교가 겨루는 전국고교야구 ‘고시엔(甲子園)’을 다루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시엔의 막강한 일본 내 인기에 더해 10대 야구소년들의 열정과 근성, 여기에 풋풋한 사랑까지 가미할 수 있는 고시엔 무대는 각본 없는 드라마면서 동시에 각본으로 가공하기에도 적합한 소재였을 테니 말이다.
그 덕분인지 프로야구를 택했다는 것만으로도 기존 야구만화와는 또 다른 세계를 일구는 만화들이 이따금씩 눈에 띄곤 한다. 우선 이들은 고교야구처럼 부러 열정과 근성을 강요하지 않는다, 강요할 필요가 없다. 풋풋한 사랑 역시 풋내 나는 소년들의 이야기일 뿐. 실력지상주의 프로의 세계에 흐르는 냉혈한의 야구 <원아웃>과 프로의 세계에 홀로 따사로운 온정을 흘리는 <사랑해요 배트맨>은 오로지 이기는 야구와 더불어 인생의 승리를 논할 뿐이다. 그러나, 그래서 특별하다. 정글의 법칙 속에 펼치는 냉혈과 열정의 이색 세계, 야구를 모르면 가르쳐주고 야구를 아는 이라면 더더욱 재미나게 즐길 수 있는 야구 이상의 영지가 이 뜨거운 여름 또 한 번 당신을 환호케 하리라.
냉혈한의 갬블 베이스볼 <원아웃>
“원래 야구란 갬블이야. 생각해봐. 160m의 장외홈런을 쳐도 주자가 없으면 단지 1점의 가치밖에 없지만, 평범한 안타라도 만루라면 그것은 2점의 가치를 갖지. 그것이 야구. 정직하게 1점씩 추가하는 축구 같은 스포츠와는 전혀 다르지. 원래부터 불공평하고 부조리해.”
야구는 일종의 도박이다. 가장 빨리 달린 사람이 이기고 가장 무거운 역기를 든 사람이 승리하는 그런 스포츠와는 처음부터 다르다. 시속 100km 이하의 느린공으로도 아웃을 잡을 수 있고 발이 느린 타자도 얼마든지 득점할 수 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빠르게라는 스포츠의 절대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경기, 그것이 야구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키나와에서 미군을 상대로 도박야구를 하던 투수 토쿠치 토아가 말하는 야구의 정의이기도 하다.
타자와의 단타 승부, 즉 ‘원아웃’ 승부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은 도박야구의 기린아 토쿠치 토아의 일본프로야구 진출기 <원아웃>은 백전백승의 이단아가 펼치는 필승의 게임을 통해 야구의 기기묘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작품이다. 우선 이 만화의 근간이 되는 토아의 계약부터가 심상치 않다. 공식게임에서 아무런 기록도 없는 그가 프로야구 구단주와 맺은 계약은 일반적인 연봉계약이 아닌 ‘원아웃 계약’. 즉, 토아는 아웃 카운트 한 개를 잡는데 500만 엔을 받는 것을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한다. 반대로 그는 1실점할 때마다 구단에 5천만 엔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이 계약에 의하면 방어율 2.7의 시즌 최고의 성적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겨우 플러스마이너스 제로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고 토아가 160km의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의 구속은 최고 120km 내외. 그렇다고 변화구에 능한 것도 아니어서 던질 수 있는 구종은 오로지 직구뿐. 말하자면 투수로서의 토아는 고등학생보다도 못한 셈이다.
그러나 토아는 매 경기 널을 뛰는 난관을 맞닥뜨리면서도 리그 최하위 리카온스를 승리로 이끈다. 그의 강점은 뛰어난 제구력과 타자의 심리를 꿰뚫는 초인적인 심리전, 그리고 열 발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 이러한 토아의 장점을 뒤늦게 깨달은 구단주는 원아웃 계약서에 토아에게 불리한 사항들을 덧붙이며 시합마다 배율을 20배까지 변경하는 등 토아를 계속해서 압박한다. 하지만 우리의 토쿠치 토아, 매 경기 생각지도 못한 수를 전개하며 전리품으로 막대한 연봉을 챙겨나간다. <원아웃>은 일본야구 양대 리그 중 6개 팀으로 구성된 하나의 리그를 다루며 각 팀의 색채와 대표선수 캐릭터를 구체화함으로써 토아가 맞닥뜨린 게임의 형태와 상황을 현실감 넘치게 구현한다. 실제로 수많은 변수를 통제해가며 설득력 있는 단순화로 관전 포인트를 압축하는 만화의 구성과 흡입력은 상당하다. 또한 이제까지의 야구를 다룬 작품들이 그다지 눈여겨 다루지 않았던 사인 교환이나 사인 훔치기, 선수 매수, 반칙볼 등 정정당당한 스포츠라는 허울 아래 숨죽인 ‘오로지 이기기 위한 승부’에 초점을 맞추며 색다른 재미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물론 토아가 야구의 과학, 그리고 심리학의 미묘한 지점까지 탐구하는 가운데 자연히 발하는 승리를 향한 열정, 희생, 팀워크는 더더욱 빛나고 말이다.
그만큼 3경기 연속 선발등판하거나 상대팀의 득점권마다 구원투수로 동원되는 등 위기상황마다 등판해 120km의 공을 가지고 타자를 농락하고 연봉을 높여가는 토아의 지략은 무척 흥미롭다. 또한 팀내 선수를 괴상한 방법으로 독려하고 상대팀의 불화를 조장하며 이기기 위한 게임의 면모를 확인하는 과정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것은 좌로 우로 마구 휘던 ‘마구’가 담보하지 않은 지점인 동시에 불같은 강속구로 게임을 셧다운시키는 여타의 ‘히어로물’과도 전혀 다른 지점이다. 이런 규칙이 있었나 싶은 야구의 세밀한 규칙, 1점을 보태기 위한 작전과 작전의 싸움, 야구라는 판 위에 짤 수 있는 흥미로운 가정에 더해 프로야구라는 거대한 비즈니스 이야기까지. 토아가 프로야구라는 무대를 두고 펼치는 면모들은 곧 야구라는 스포츠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인 동시에 그 자체로 야구의 정수를 대변한다. 감히 말하건대 이는 야구장의 재미 그 이상이다. <라이어 게임>으로 또 한 차례 흥미로운 게임을 이끌어낸 카이타니 시노부의 대표작 <원아웃>은 19권으로 리그를 마무리한 가운데 최근 올스타전을 다룬 스핀오프격의 20권이 출간됐다.
열정을 전파하는 끝내기 홈런 <사랑해요 배트맨>
여기 괴짜 사내가 있다. 운동선수다운 거구를 하고도 취미는 독서에 특기는 지나치리만큼 철저한 정리정돈. 인기 프로야구선수지만 지하철로 출퇴근하고 누구보다 상대를 배려하는 자애로운 성격에 타협을 모르는 고지식한 남자. 자명종 시계가 단 5분만 늦어도 32타석 무안타를 칠 수밖에 없는 섬세한 남자. 그 누구보다 야구를 사랑하며 즐기는, 로빈즈의 4번 타자 카야마 유타로가 그 주인공이다.
<사랑해요 배트맨>은 검은 복면을 한 고담시의 음습한 영웅이 아니라 야구배트를 휘두르는 남자 카야마 유타로에 관한 이야기다. 작품의 전반부를 야구선수 유타로의 특이한 성격에 할애한 <사랑해요 배트맨>은 특출한 야구실력과는 달리 특이하기 그지없는 유타로에 의존해 매 에피소드마다 크고 작은 휴먼드라마를 이끌어낸다. 야구장을 무대삼아 세상에서 제일 잘난 듯 약삭빠르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유타로의 감당하기 버거운 정직한 성격은 정말로 좋은 드라마가 되고 또 좋은 위안이 된다. 갈등은 올곧은 유타로에 의해 자연스레 해결되고 승리와 패배의 드라마가 연일 톱니를 드리우는 그라운드에서도 특별한 드라마가 물씬 솟아난다.
허나 로빈즈 안에 섞여든 유타로, 아니 유타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로빈즈의 품을 떠난 유타로 역시 다른 사람들을 감화시키며 자신만의 색으로 물들일 수 있을까? 굳이 이 질문에 답하는 모험이 필요했을까 싶지만 전반부를 유타로의 주변부를 소재삼아 에피소드별로 소소한 드라마를 만들어내던 <사랑해요 배트맨>은 중반 이후부터 매년 리그 최하위를 맴도는 서던크로스 팀으로 유타로를 이적시킨 후 본격적으로 승부의 세계를 그려나간다. 물론 이 모험은 무척이나 성공적이다. 일본의 남쪽 카고시마에 위치한 서던크로스 팀은 로빈즈처럼 인기팀도 아닌데다가 변변한 선수도 없다. 선수들은 모두 패배주의에 찌들어 우승이란 단어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실소를 터뜨리기 일쑤다. 당연히 선수들간의 갈등은 배가 되고 유타로가 겪어야 될 난관 역시 부지기수. 그런 팀이 카야마 유타로 단 한 사람에 의해 조금씩 변화해 가는 과정은 전반부와는 다른 더욱 신묘하고 굴곡 있는 드라마가 된다. 모두에게 외면당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그대로 내달리는 유타로의 열정과 신념은 정확히 한 발짝씩 다른 선수들에게 전염되며 승리를 향한 도화선이 된다. 이는 로빈즈였기 때문에, 그저 환경이 좋았기 때문에 유타로가 그만의 색깔을 마음껏 발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는 삐딱한 반문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반박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야구라는 드라마 위에서 또 하나의 묵직한 길을 튼다.
야구라는 스포츠를 토대로 2군 생활이나 선수간 갈등, 프로야구 선수로서 가진 개개인의 고민과 인간적인 풍모를 펼쳐 보이는 <사랑해요 배트맨>은 프로야구라는 가장 현실적이고 치열한 공간을 무대로 인간의 다채로운 내면을 형상화한다. 어쩌면 야구란 때때로 이기기도 또 지기도 하는 그저 그런 스포츠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에 열광하고 또 이것에 밥줄을 건 사람들의 이야기 <사랑해요 배트맨>은 곧 연봉이나 이적과 같은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에서 꿈과 열정 같은 가장 스포츠적인 이야기에까지 이르며 끈끈하고 유려하게 이어진다.
카야마 유타로가 퍼뜨리는 해피 바이러스는 마치 좀처럼 터지지 않는 끝내기 홈런의 짜릿함과도 같다.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다 마침내 승리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득도의 경지에 이른 완성형 인간, 슈퍼히어로, 불패의 4번타자가 전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좀처럼 터지지 않는 끝내기 홈런처럼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부단한 노력과 피땀 어린 사투가 한데 뭉친 뒤에야 탄생할 수 있는 그런 드라마를 말함이다. 야구라는 드라마 위에 몸을 기댄 카야마 유타로의 우승도전기는 그래서 더 감미롭고 감동적이다. 이것이 야구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감히 각본 없는 야구에 각본을 덧댄 훌륭한 결과물이다. 강상준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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