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른 새벽 뒷산 약수터를 찾았을 때 칼을 든 두 사람이 피를 흘리며 사투를 벌이고 있다면,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쉴 새 없이 펼쳐지는 두 검사(劍士)의 몸사위, 귀를 찢는 듯한 칼의 굉음, 아마 낯선 광경에 자신의 눈을 의심할 지도 모른다. 이들은 왜, 무엇 때문에 싸울까. 여명준 감독의 도시무협 <도시락>(刀時樂)이 궁금하다.
<도시락>의 배경은 지금, 여기다.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1대1 결투가 법적으로 허용된다는 것. 경찰과 공증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전자(갑)와 도전받은 자(을)는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인다. 그들은 검명을 사용해 신분이 노출되지 않으며, 결투 결과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평범한 회사원 유영빈(이상홍)은 회사에서는 ‘무능력한 인간’이지만 1대 3 결투에서도 승리하는 이름난 고수다. 그는 이른 아침 결투를 벌이고 피로 물든 옷을 입고 회사에 출근해 샐러리맨으로 변신하는 이중생활을 반복한다.
영빈은 친구 진운광(여명준)이 운영하는 도장에서 검사(劍士)를 꿈꾸는 고등학생 최본국(유재욱)을 만난다. 결투에서 아버지를 죽인 이를 찾아 복수하기 위해 칼을 잡은 본국. 어린 검사를 보고 복수의 복수를 낳는 결투에 환멸을 느낀다. 하지만 수련에 정진하는 본국에게서 칼에 대한 열정을 본 영빈은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한참 수련을 거듭할 무렵, 결투 금지령이 국회를 통과하고, 본국은 결투 금지령이 시행되기 직전 스승 운광의 칼을 들고 도장을 나선다. 복수를 위한 단 한 번의 결투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도시락>의 중요한 모티브는 ‘복수’다. 칼이 피를, 피는 복수를, 다시 복수는 칼날을 쥐게 하는 무한의 순환고리. 영빈은 오랜 기간 결투를 벌임으로써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적을 만들었다. ‘결투 결과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어찌 맘처럼 되는가. 영빈이 죽인 사람들의 가족들은 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증오의 칼날을 갈고 있다. 하지만 영빈은 자신을 향한 복수심에 두려움이 아닌 환멸을 느낀다. 어느 한 지점에서 마침표를 찍지 않으면, 복수라는 것은 무한반복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결투는 법적으로 금지되고, 검사들은 과거의 유물이 된다. 영빈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이제 슈퍼맨 안경을 쓰고 회사 생활에 익숙해져 제법 칭찬도 받게 된다. 하지만 칼에 대한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는다. 전보다 원만한 회사생활을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무기력증에 빠진다. ‘몸의 활용’에 대한 원초적인 욕구가 거부되었지만, 영빈은 남 몰래 수련을 하며 자기 세계에 빠져든다. 온몸 가득 흐르는 칼의 피는 그리 쉽게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몸에 대한 관심은 작품 전체에서 드러난다. <도시락>은 목숨을 걸고 수련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몸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보여준다. 목숨을 건 결투는 치열한 자기 수련의 다른 이름이다. 상대방의 칼에 언제 자신의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검사들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상태까지 도달해야 한다. 결투에서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 그런 의미에서 영빈, 운광, 본국의 수련 장면은 유쾌하면서도 진지하다. 결투를 벌이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매순간 최선을 다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검사들의 모습은 그들이 겪은 고된 수련의 과정과 오버랩 되면서 비장미를 내뿜는다.
멀쩡한 해운대에 쓰나미가 밀려오고, 로봇이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현대 영화 기술을 감안해봤을 때 <도시락>의 볼거리는 그리 대단치 않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영화가 있다. 결투 장면에서는 감독, 배우들의 열정이 느껴지며, 그들이 훈련하는 장면은 진지하면서도 유쾌하다. 또 작품은 몸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란 곱씹어볼 만한 화두를 던진다. 몸에 대한 관심은 지극히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몸 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이 현대인 아닌가. <도시락>을 보면 음악에 맞춰 발을 구르고, 칼을 한 번 쥐고 싶은 충동에 빠질지도 모른다. 안효원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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