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세상은 넓고 잡지는 많다. 그런데 ‘잡지’ 하면 <보그> <GQ> 같은 패션지 혹은 <씨네21> <무비위크> 같은 영화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지당하다. 매일 지나가는 지하철 가판대에서 손 흔들고, 대형서점 잡지 코너에서는 떡 하니 제일 좋은 자리 차지하고 있으며, 미용실과 은행의 지루한 시간에 친절한 동행이 되어주니까. 게다가 잡지 본연의 의무 외에 여러 가지 쓰임새도 있으니 어찌 고맙지 아니한가. 몇 달 전 부록 때문에 구입한 엄청난 두께의 모 패션지는 내 노트북 받침대로 아주 잘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세상은 넓고 잡지는 많다. 광고 따윈 없고 독자가 단 한 명이어도 좋은, 거침없는 실험정신으로 사진과 디자인, 텍스트가 혼연일체 되어 마술을 부리는 잡지들이 찾아보면 수두룩하다. 대체 어디 있냐고? 일단 그래픽 디자인 계간지 <GRAPHIC> 6호를 펼쳐 보자. <GRAPHIC>의 이번 이슈는 ‘매거진’. 한국은 물론 전세계의 인디펜던트 & 이노베이티브 잡지들을 소개하고 발행인이나 편집장의 인터뷰까지 곁들였다.
먼저 등장하는 것은 한국 인디펜던트 잡지의 연대기. 1990년대 중반 이후 출몰한 한국의 독립 잡지를 주르륵 펼쳐 보인다. 격월간 세미 문예지 <sinclair>, 부산에서 발행되는 문화예술 전문 무가지 <Voila>,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생들이 만드는 펑크 스타일 문화 잡지 <칠>, 스트리트 페이퍼 <IN Seoul Magazine>, 시각 디자이너 안상수가 발행한 실험적 타이포그래피 전문지 <보고서 보고서>, 모 이동통신사가 만든 전설적인 스트리트 무가지 <ttl>에 발행부수나 판매량으로 볼 때 이젠 ‘인디 잡지’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성공한 <PAPER>. 그리고 나의 학창시절을 함께 했던 추억의 <lunch box>와 <팬진 공 GONG>까지 39개의 한국 독립 잡지가 저마다의 개성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발행인의 요구나 광고주의 압박에서 자유롭고, 독자가 원하는 것만을 좇기 보다는 스스로의 정체성과 스타일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여 한국 잡지의 다양성을 일궈낸 기특한 잡지들이다.
“요즘 잡지는 광고에 신경 쓰는 지 표지 디자인에 개성을 못 담는 듯하다. 표지만 보고도 사고 싶어지는 잡지가 많지 않다”는 <sinclair> 김용진 편집장의 인터뷰는 모든 ‘잡지쟁이’들이 상기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인디 잡지를 만든다는 것은?’이라는 질문에 <Voila> 강선제 발행인은 “내용과 형식은 자유로울 수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자유로울 수 없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인디 잡지도 아니면서 내용과 형식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속박되어 임금을 몇 달 째 안 주는 ‘F모’ 영화주간지는 대체 뭐란 말인가?
무엇보다 <PAPER> 황경신 편집장의 인터뷰가 가슴에 불을 지핀다. “창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편집 방향이 하나 있다.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재미있어 하는 것을 즐겁게 하자’는 것이다. 만드는 사람들이 재미없어 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기는 힘드니까. 마감에 묶여 허겁지겁 살다 보면 창조력도 상상력도 사라지기 때문에, 기자들에게도 늘 삶을 즐기라고 이야기한다. 출퇴근 압박을 없애기 위해 몇 년 전부터 재택근무 시스템으로 바꾸었다.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프로페셔널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편집장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침이다.”
한국 잡지를 쭉 살펴본 후 ‘해외 인디 & 이노베이티브 잡지는 지금’ 섹션으로 넘어가면 눈 돌아갈 광경들이 여럿 펼쳐진다. 독특한 편집과 형식으로 보는 이를 매료시키는 세계 유수의 잡지 61개를 소개하는데, 그야말로 별천지다. 텍스트 없이 이미지로만 채워진 일본 컬처 계간지 <FOLL>,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행되는 게이를 위한 잡지 <THEY SHOOT HOMOS DON'T THEY?>, 영국의 전위적 라이스프타일 잡지 <Karen>, 스웨덴의 전위적 문화잡지 <LOYAL>, 미국 언더그라운드 컬처 매거진 <Me>, 독일의 문화 교양지 <DUMMY>, 한 명의 게스트 디자이너가 한 호를 맡아서 만드는 형식의 패션 매거진 <A>, 발행인, 에디터, 아트디렉터, 디자이너를 혼자 다 하는 영국인 그레고리 아멜리아의 개인잡지 <Amelia's Magazine> 등 기존 잡지의 틀을 깨부수는, 단순히 ‘잡지’라 부르기엔 너무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한국에선 구입하기도 쉽지 않은 낯선 잡지들이지만, 편집장이나 발행인의 인터뷰가 곁들여져 이해를 돕는다.
<GRAPHIC> 6호 ‘Magazine Issue’를 보면 한국에 저렇게 독창적인 잡지가 많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상상을 뛰어넘는 외국 잡지의 파격미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광고지인지 잡지인지 구분 안 되는 패션지, 그 표지가 그 표지, 그 특집이 그 특집인 영화지는 잠시 잊고, 독창성과 리듬, 디자인과 질감까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조금은 별난 잡지 한 권씩 사보는 건 어떨까. 정미래 기자 (www.film-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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