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에서 소설로, 소설에서 영화로
2008년 부산영화제를 통해 처음 영화를 공개한 이후 로테르담국제영화제, 프리부르국제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 상영을 거쳐 개봉에 이르렀다. 작년 부산영화제 공개 이후 모두 같은 편집본을 튼 건가?
그렇다. 편집이 약간 튀거나 하는 부분들이 눈에 보이는데 그걸 또 어떻게 만져야 할까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귀찮기도 하고.(웃음) 원래 영화를 한 번 완성하면 더 이상 손대지 않는 편이다. 영화를 보면 장면마다 만들 때 상황이 떠오른다. 그 장면들 모두 그 때 그 상황의 감정에 충실해서 만든 것들이다. 최선의 결과물이라고 믿는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할아버지의 외출>에서 소재를 얻어 중편 소설 <독 안의 노인>을 쓰고, 다시 그걸 바탕으로 <독>의 시나리오를 썼다. 다큐멘터리 <할아버지의 외출>은 어떤 내용인가?
학교 과제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 했다. 그 즈음 할아버지가 병원에서 앞으로 두 달밖에 살지 못 할 거란 진단을 받으셨다. 그때 어릴 적 할아버지한테서 들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때 할아버지는 사람이 죽으면 마치 꿈꾸지 않고 잘 때처럼 아무 것도 느끼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영원히 계속된다고 하셨다. 어린 나이에 그 얘기를 듣고 너무 무서워서 화장실에서 막 울었다. 죽으면 천국에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 것도 없는 캄캄한 무덤 속에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한다고 상상하니까 너무 불안했다. 차라리 지옥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죽음을 눈앞에 둔 할아버지는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까, 여전히 어릴 적 내게 말씀하셨던 대로 생각하고 계실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카메라를 켜고 할아버지에게 그 얘기를 물었다.
할아버지가 뭐라고 그러셨나?
당신은 그런 얘기 한 적이 없다고 그러셨다. 갑자기,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돼서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다고 하시는 거다.(웃음) 순간, 다큐멘터리 주제를 바꿔야 되는 건가 고민했다. 그렇게 할아버지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에 담은 건가?
할아버지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한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할아버지도 누군가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많이 그리우셨던 거다. 많은 얘기를 했다. 그런데 두 달밖에 못 사신다고 했던 할아버지가 그로부터 2년을 사시고 아흔 넷의 연세로 돌아가셨다. 진단을 받고 집에서는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시간이 길어지니까 묘한 분위기 같은 게 생겼다. 그런 것들을 다큐멘터리로 풀었다. 제목이 ‘할아버지의 외출’인 건 집에서는 혹시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해서 말렸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속 외출을 하고 싶어 하셨기 때문이다.
소설 <독 안의 노인>에는 어떤 이야기가 더해졌나?
할아버지와 이야기하면서 느꼈던 바를 가지고 ‘가정 내 노인의 문제’에 집중해 <독 안의 노인>을 썼다. 우선 할아버지를 할머니로 바꿨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는 정서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보다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가 좀 더 끈적거리는 느낌이 있지 않나. 사람들이 보통 잘 되면 “우리 어머니 용돈 많이 드려야지.” 그러지, “아버지한테 잘해 드려야겠다.” 그러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인 아들과 늙은 어머니와의 관계를 그리는 쪽이 좀 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공포와 스릴러의 요소를 더했다.
소설도 쓰고 영화도 찍는다. 영화감독 김태곤에게 소설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시나리오 쓰기 전에 소설을 쓰는 거다. 사실 시나리오 쓰는 게 너무 힘들다. 시나리오는 굉장히 계산적으로 써야하기 때문에 재미없다. 시나리오에 장면의 세세한 부분까지 풀어 쓰면 읽기 힘들다고 사람들이 싫어한다. 근데 소설은 당장 출판하려고 쓰는 게 아니니까—물론 시간이 지난 후에 묶어서 책을 낼 수도 있겠지만—머리에 있는 것들을 바로 뽑아 쓸 수 있다. 그래서 소설을 쓸 때는 결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생각 가는 대로 쓴다. 그러면 시나리오로 옮겼을 때 이야깃거리들이 훨씬 풍부해진다. 그러니까 내게 소설은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는 창구 같은 거다.
소설을 쓰면 주변 사람들한테 잘 보여주는 편인가?
사실 이번에 <독 안의 노인>을 출판할 계획이었는데 사정이 생겨서 못하게 됐다. 출판 한다고 해서 다시 읽는데 손발이 오그라들더라.(웃음) 내가 맞춤법에 약하다. 그래서 남한테 선뜻 보여주기가 좀 그렇다. 주로 어머니에게 처음 보여 드린다.
어머니의 반응이 궁금하다.
되게 냉정하시다. 이 부분은 어설프다, 이 부분은 말이 안 된다, 이 부분은 좋다, 이런 식으로 자세하게 말씀하신다. 어머니 외에 친한 사람들한테도 보여 준다. 여자 친구한테 잘 보이려고 책으로 만들어서 선물한 적도 있다.(웃음)
<독 안의 노인>에 공포와 스릴러의 요소를 집어넣은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공포영화를 찾아서 보거나 즐겨 보진 않는데 스릴러는 되게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지 글을 쓰면 주로 스릴러를 쓰게 된다.
왜 그런지 생각해봤나?
지금은 밝은 얘기가 좀 낯간지럽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약간 음울하고 침울하고 비관적인 이야기들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어려서 그런지 세상을 조금 삐딱하게 보는 면도 있는 것 같고. 음모론 같은 거 좋아한다.(웃음) 그런 것들이 스릴러의 형태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독>을 준비하면서 이전까지는 나 스스로 할 얘기가 별로 없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사회나 세상에 대해 크게 고민한다거나 사회 드라마를 찾아보거나 하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장르적인 재미를 쫓아 영화를 봤던 것 같다. 스릴러가 주는 쾌감 같은 게 있지 않나. 사건과 사건이 연결되고 마지막에 가서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이야기가 밝혀지는. 그런 게 너무 좋았다. 나 역시 그런 영화를 만들면서 즐거움을 느꼈다고 할까.
<독>이 첫 장편영화 연출작이다.
사실 <독>은 인생에 있어 계획에 없던 영화다. 원래는 중앙대 영화과를 졸업하고 충무로에서 연출부 경험을 쌓을 생각이었는데 학교에서 하는 제작비 지원 공모전에 시나리오를 냈다가 덜컥 당선이 된 거다. 거기다 KM컬쳐라는 상업영화투자제작사에서 투자를 더 받아서 총 1억 원으로 영화를 찍었다. 그런 점에서 완전한 독립 영화라고 볼 수는 없다.
장편영화를 연출해보니 단편영화를 연출할 때와 무엇이 달랐나?
시나리오를 고치는 데만 2년이 걸렸다. KM컬쳐 쪽에서는 귀신도 더 많이 나오고 좀 더 무섭게 찍기를 바랐다. 그런 부분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 결국 KM컬쳐에서 내 뜻을 많이 받아들여 줬다.
풍요로운 이야기를 타고 흐르는 분위기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이야깃거리가 굉장히 풍부하다는 점이었다. 낯선 도시 생활, 낡은 아파트, 계단, 고장 난 엘리베이터, 동생에 대한 질투, 치매 노인, 유산(流産), 돈, 죽음, 퇴마 의식 등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이 영화 곳곳에 녹아 있다. 그래서 다음 이야기를 쉽게 예측할 수 없다. 그로 인해 영화의 주제도 한층 폭이 넓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소설 <독 안의 노인>에는 종교나 임신 이야기가 없다. 사실 <독 안의 노인>을 그대로 영화화했다면 주제는 <독>과 같지만 이야기가 전혀 다른 영화가 나왔을 거다. 2년간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연출부나 작가들과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소재를 가지고 끝까지 가기보다 이야기 속에 여러 가지 것들을 잘 녹여서 유연하게 흘러가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관객의 입장에서 처음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대상은 영애다. 사업에 성공할 욕심 때문에 영애에게 가기 싫은 교회에 나가라고 강요하는 형국이 가해자고 임신한 영애가 피해자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애가 자취를 감추는 지점부터 점차 형국에게 감정 이입이 되기 시작한다. 의도한 건가?
이 가족은 평범한 가족이 아니다. 하지만 그에 관한 결정적 사연은 영화 마지막에 밝힐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면서 영화가 시작할 때 캐릭터를 어떻게 소개할지를 놓고 고민을 많이 했다.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내야하지만 그걸 다 보여줄 수도 없고, 반대로 아무 일 없이 마냥 행복하고 평온한 사람들인 것처럼 그릴 수도 없었다. 영화 속에서 가장 무거운 심리를 가진 인물은 형국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형국의 무거운 심리로 출발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임신한 영애와 아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었다. 그러다 점점 사건의 실을 밝히면서 형국을 극의 중심으로 끌어 왔다.
공포, 스릴러라는 게 결코 만들기 쉬운 장르가 아니다. 이야기에 충실하면서도 영화 끝까지 그럴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나. <독>을 만들면서 참고한 작가나 작품이 있나?
상업적인 공포 영화의 특징을 따라가지는 않았다. 영화를 만드는 나 스스로 무서워하는 걸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난 귀신 영화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 그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스산한 분위기와 긴장감을 잘 살린 영화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준비 기간 동안 <악마의 씨>(1968)나 <회로>(2001) 같은 영화들을 많이 봤다. 참조하는 데 딱히 장르를 규정짓지는 않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미스틱 리버>(2003) 같은 영화는 사회 드라마지만 사건이 발생하고 그 결과가 나타나는 과정에 스릴러적인 요소가 많다. 그런 데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배우들의 연기가 굉장히 자연스럽다. 배우들과 어떻게 의사소통했는지 궁금하다. 27일 동안 26회차 촬영을 마쳐야했기 때문에 현장에서 연기가 틀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촬영 전에 배우들과 시간 나는 대로 만나서 같이 시나리오를 읽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보니 나와 배우들이 영화에 대해 갖는 생각이 점점 비슷해졌다. 그러니까 연기가 훨씬 자연스럽게 나왔다.
배우와 함께 대사나 장면을 만들어가는 편인가?
시나리오에 있는 대사가 배우 입에 안 붙는다거나, 배우가 생각하기에 장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면 과감하게 고치는 편이다. 난 꼭 시나리오에 있는 그대로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영화를 보면 티가 나서 그 순간 몰입이 안 된다. <독>을 찍으면서도 배우들과 같이 대화하면서 장면을 만들어 나갔다. 식탁 장면에서 말을 걸기 위해 냄비를 미는 것 같은 세부적인 동작은 원래 시나리오에 없었는데 배우들과 얘기하면서 만든 거다.
특히 형국 역의 임형국 씨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 속에 불안을 숨기고 있는 형국의 심리를 더할 나위 잘 표현했다. 그 모습이 마치 마음속으로는 가족에게 잘 하려고 하면서도 삶에 지쳐 때때로 버럭 짜증을 내는 우리네 아버지들 같았다.
빠듯한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형국 형과는 현장에서 이야기를 되게 많이 하고 여러 느낌으로 테이크를 굉장히 많이 가면서 촬영했다. 아마 그것 때문에 스태프들이 많이 지쳤을 거다.(웃음) 형국 형을 비롯해 모든 배우 분들이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연기를 보여줬다. 그래서 배우들 연기가 좋다는 얘기를 들을 때 제일 기분이 좋다.
일상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그런 작은 부분들이 모여 스산한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는 것 같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좋아한다. 그런 자연스러움이 관객을 힘들게도 하지만 결국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평소에 주변 사람들을 잘 관찰하는 편이다. 저 사람은 상대방의 말에 저렇게 동의하는구나, 저 사람은 술 마실 때 저렇게 취하는구나, 하는 것들을 기억했다가 소설이나 영화 속 캐릭터로 옮겨오곤 한다.
종교가 있나?
가족이 전부 기독교를 믿는다.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를 소재로 삼았다. 그것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난 <독>이 기독교를 비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 자체는 좋은 거다. 기독교 사회는 하나의 사회 공동체로서 순기능을 갖고 있다. 단지 잘못 믿는 사람들이 문제다. 영화 속에서 문제 삼고 있는 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이 영화를 싫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독>을 통해 정식으로 충무로에 이름을 알렸다. 꿈꾸던 영화감독, 돼보니 어떤가?
어릴 때부터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막연히 영화감독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미치도록 중앙대 영화과에 가고 싶었다. 거기만 가면 뭔가 될 거 같았다.(웃음) 근데 어느 순간 내가 거길 다니고 있는 거다. 영화감독도 그렇다. 단편영화 찍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태곤아”라고 불렀는데 작년 부산영화제 이후로 “감독님”이라고 부른다. 근데 “감독님” 소리를 듣는 게 그렇게 가슴 벅차지는 않다.(웃음) 어느 날 보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내가 그토록 욕망했던 대상이 되어 있는 거다. 사람 욕심이라는 게 끝이 없는 거 아니겠나. 결국 중요한 건 어떤 타이틀이 아니라 ‘내 인생을 어떻게 풍요롭게 가꿔갈 것인가’인 것 같다. 그렇게 살다 보면 또 뭔가가 돼 있지 않을까?
그 말 가슴 깊이 새기겠다.(웃음)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가?
작은 영화도 계속 하고 싶고 나중에는 <이티>(1982) 같은 큰 영화도 하고 싶다. 영화로 잘 먹고 잘 살고 싶다.
다음 작품은 구상하고 있나?
꿈꾼 이야기를 가지고 소설을 쓰고 있다.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라는 가제의 소설이다. 오로지 약국만 지키며 살던 약사가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세상에 나가는 이야기다. 역시 장편 스릴러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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