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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갈>의 시놉시스는 이렇다. “공장 지대 근처에 한 여자가 있다. 여자를 발견한 남자는 씻기고 먹인 후 매춘을 시킨다. 여자에게 배달 일을 하는 또 다른 여자가 나타나 호감을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돌아온다.” 김기덕의 영화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후반 30분에 대한 소문이 자자한 터였다. 제발 ‘낚시 바늘’ 같은 장면(김기덕 감독의 <섬>(2000)에 나오는, 낚시 바늘로 여성 성기에 상처를 내는 장면)만 나오지 말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영화는 생각보다 고요했다. 남자(박지환)도 여자(장리우)도 배달부(오근영)도 그렇게 끔찍하지 않았다. 슈퍼 8mm 카메라로 찍은 필름을 35mm 확대한 영상의 ‘헤진 느낌’과 홍철기(노이즈 밴드 ‘아스트로 노이즈’의 멤버)가 덧입힌 일상의 소음들은 기묘하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익히 들었던 대로 후반 30분에 들어서자 차마 눈과 귀를 가만히 열어놓고 있을 수 없었다. 귀를 막고 눈을 감느라 영화의 반은 보고 반은 놓쳤다. 극장을 빠져 나오면서 과연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을까,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고갈>을 만든 김곡, 김선은 쌍둥이 형제 감독. 비타협 영화집단 ‘곡사’를 통해 <자살변주>(2007) <정당정치의 역습>(2006) <Bomb! Bomb! Bomb! Bomb! Bomb! Bomb!>(2006) 등의 영화를 만들다 <고갈>로 2008년 서울독립영화제 대상을 차지하며 생애 첫 극장 개봉을 하게 됐다. <고갈>의 감독으로 김곡의 이름만 올라 있는 건 이번 영화에는 그의 생각이 더 많이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홍대 어느 카페에서 그를 만나 2시간 동안 열심히 묻고 답했다. 한데 어쩐지 그의 머릿속의 반의반의 반도 다 못 파헤친 것 같은 느낌이다. 김선 감독까지 같이 만났으면 반의반의 반의반도 다 못 들여다볼 뻔 했다. 장성란 기자(FILMON) | 사진 김주영


부뉴엘은 눈을 잘랐지만 우리는 다른 걸 잘랐다!

영화 보기 전부터 ‘후반 30분, 정말 무시무시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작년 부산영화제를 시작으로 1년 동안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하면서 그런 풍문이 생겼다.(웃음)

과연 소문대로 ‘후반 30분’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루이스 부뉴엘은 눈을 잘랐지만(<안달루시아의 개>(1929)) 우리(이하 김곡, 김선)는 다른 걸 잘랐다. 부뉴엘이 눈을 잘랐을 때 영화가 자를 건 다 잘랐다고 생각했겠지만 천만의 말씀! 아직 자를 거 많다.(웃음) 사실 나도 그 장면 눈 뜨고 다 못 본다. 보고 있으면 심장이 벌렁벌렁 거린다. 만든 놈도 그런데 관객들은 오죽하겠나. ‘악!’하고 소리는 안 지른다. 대신 ‘헉!’ 한다.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아, 왜~” “어머, 어떡해” “그걸 왜 잘라” 같은 식으로 넋두리를 한다. 당연한 반응인 것 같다.  

영화에 대한 반응이 극과 극이다.
말이 좀 오고 가겠구나 생각은 했는데 호평과 악평의 틈이 이렇게까지 벌어질 줄은 몰랐다. 특히 악평이 세다.(웃음)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후반 30분’에 대해 거의 상욕을 하는 분위기다. “불경스럽다”고도 하고 “쓰레기 같은 영화”라고도 하더라. “비위생적”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했을 때는 ‘후반 30분’이 시작되니까 관객들이 나가려고 줄을 섰다. 폴란드의 이어라 뉴호라이즌 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래머 에바가 그러는데 몬트리올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들한테 <고갈>을 추천했다가 “너 변태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다더라. 흐흐흐.

확실히 보기 편한 영화는 아니다. 보는 이를 불쾌하게 만들고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인천 남동공업단지에 이미지를 따러 갔다가 <고갈>을 구상하게 됐다고 들었다. 거기서 무엇을 봤나?
갯벌에 기계가 몇 대 서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남아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그냥 ‘없는 것’과 다른 거다.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것이 없어진 게 아니라 세상이 다 망해도 있어야 되는 것, 없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이 없어졌을 때의 느낌을 말하는 거다. 예컨대 스무 해 넘게 잘 살아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의 느낌이라고 할까? 존재의 뿌리가 없어진 것 같은 느낌. 거기서 출발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붉은 사막>(1964)에서 나랑 똑같은 짓을 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내 아이디어를 훔쳐간 거다! 이거, 농담이다.(웃음)

그래서일까? <고갈>의 인물들은 인간이라기보다 동물 같다. 남자, 여자, 배달부 모두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할 수 없다. 남자와 여자가 발길질을 하며 뒤엉키는 모습은 싸우는 건지 장난치는 건지 구분이 안 간다. 남자는 여자에게 성매매를 시키지만 단순히 여자를 착취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여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남자를 떠날 수 있다. 배달부 역시 여자에게 잘해 주는 것 같지만 ‘후반 30분’에 이르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짐승’이다. 여기서 ‘짐승’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있는 존재를 말하는 거다. ‘인간’도 ‘비인간’도 아닌, ‘몸’을 가진 존재. 법으로 따지자면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인 거지. 그들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아름답지도 않고 추하지도 않다. 그래서 이 영화가 불쾌하게 느껴지는 거다. 차라리 ‘동물’, ‘비인간’, ‘불법’, ‘악’, ‘추함’이 나오면 편하다. 욕하면 되니까. 하지만 이 영화의 ‘짐승’들에겐 뭐라 딱히 욕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그게 인간의 본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여자는 신음 소리를 내거나 소리를 지를 뿐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시장 장면 중에 멀리서 여자가 시장 아주머니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모습이 보인다. 여자는 말을 못하는 건가, 안 하는 건가?
그 질문 많이 받았는데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그건 말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듣는 사람의 문제다. 이게 내 대답이다. 그 시장 아주머니는 여자의 말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와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거다.

여자뿐 아니라 영화 자체가 말이 별로 없다. 대사나 이야기보다 이미지와 사운드를 강조하는 건 전작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게 특색인 줄 몰랐다. 다들 그런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우리 보고 “내러티브보다는 이미지네.” 그래서 그게 우리 색깔이 된 거다. 물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이미지다. 대사는 이미지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도 극영화를 찍는 한편으로 암실 작업을 계속 하고 있다. 순수하게 필름만 가지고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작업 말이다. 우리에게 그건 하나의 훈련 같은 거다. 

이토록 말 없는 영화의 시나리오가 궁금하다. 대사가 없는 대신 지문이 많은가?
아니. <고갈>의 시나리오는 전부 합쳐서 열 장 남짓이다. 지문도 아주 간단하다. ‘남자가 뛴다. 여자가 걷는다.’ ‘남자가 먹는다. 여자가 따라 먹는다.’ 이런 식이다. 대사와 지문을 합쳐 한 장면이 다섯 줄 정도?

그 다섯 줄만으로 배우들, 스태프들과 뜻을 맞출 수 있나?
시나리오는 암호 같은 거다. 배우들, 스태프들뿐만 아니라 나도 그 암호를 해석해야 한다. 그 해석은 머리가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하는 거다. 연주자들이 악보를 보고 연주를 하듯이. 프리프로덕션 때 같이 모여서 시나리오에 쓰인 말들을 우리의 감성에 맞게 번역해 계속 되뇌는 작업을 한다. 그렇게 영화의 주제나 분위기에 대해 집단 최면을 건다. <고갈> 프리프로덕션에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여자는 풍경이다. 남자는 여자라는 창문을 통해 그 풍경을 본다. 그런데 창문 밖으로는 잘 못 나간다. 보기만 한다.”는 거였다. 주로 술 먹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데 무의식중에도 영화에 대한 마음이 맞는지 확인하는 거다. 서로의 무의식을 막 주무르는 거지.

촬영도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보다 무의식에 맡기는 편인가?
그렇진 않다. 프리프로덕션을 통해 영화의 전체적인 주제에 대해 공감을 이뤘으니 현장에서는 그걸 기계적으로 연주한다. 감정의 굵은 줄기. 쇼트 분배 같은 뼈대는 다 사전에 계획을 세우고 촬영에 들어간다. 예를 들어 배달부가 쳐들어오기 전, 그러니까 ‘후반 30분’이 시작되기 전에 남자와 여자가 굴뚝 옆에서 싸우는 건지 춤추는 건지 모르게 드잡이 하는 장면이 한 10분 정도 나오지 않나. 우리는 그걸 ‘굴뚝 댄스’라고 부르는데 그 장면이 처음부터 끝까지 통으로 찍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섯 부분으로 나눠 찍은 거다. 반대로 이 장면에서는 즉흥성을 살려보자, 하는 것까지도 미리 정한다. <고갈> 같은 경우 마지막 장면이 그랬다. 모든 걸 우연에 맡길 순 없다. 난 우연을 믿지 않는다. 매혹적이긴 하지만 믿을 수 없다.

배우들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대사 없이 ‘몸’으로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을 넘나드는 연기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박지환, 장리우, 오근영 모두 <고갈>에서 무너지는 연기를 제대로 했다. 뭐든 잘 쌓는 것도 힘들지만 무너뜨릴 때 정확히 원하는 방향으로 무너뜨리는 게 진짜 어려운 거다. 연기도 무너지는 연기가 가장 어렵다. 연기 못하는 사람한테 무너지는 연기를 하라고 하면 무턱대고 지랄을 부린다. 사실 지랄하는 연기는 쉽다. 하지만 미친 것도 강박증, 편집증, 정신분열, 히스테리가 다 다르듯 무너지는 연기에도 수만 가지 종류가 있다. 그런 식으로 무너짐의 종류와 모양을 연구하려면 눈을 똑바로 뜨고 무너지는 고통을 끝까지 들여다봐야 한다. 그건 본능과 지성이 다 같이 필요한 작업이다. 자신의 무의식을 과감하게 꺼내 보이되 너무 앞서 나가도 안 된다. 딱 영화가 요구하는 지점까지만 무너지는 거다. 용감하면서도 절도 있어야 한다. 박지환, 장리우, 오근영은 그걸 할 줄 안다. 진짜 좋은 배우들이다.

인간은 아직까지 신이 필요 없다!

영화를 보기 전 시놉시스를 보고 김기덕의 영화를 떠올렸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니 김기덕 영화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기덕의 영화도 대개 동물 같은 인물, 이른바 문명의 잣대에서 벗어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하지만 영화의 시선은 굉장히 문명적이다. 그런데 <고갈>은 영화의 시선 자체가 문명의 잣대에서 벗어나 있는 느낌이다. 인물에 대해 끝까지 어떤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맞다. 김기덕의 영화에는 선과 악이 있다. 근본적으로 선과 악이 있기 때문에 그 경계가 생긴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다. 경계가 있기 때문에 선과 악이 생겨난 거고, 따라서 그 경계가 무너지면 선과 악은 언제든 섞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김기덕의 영화가 선과 악의 경계를 뛰어넘어 위로부터 구원을 얻으려 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그 경계가 무너져 선과 악이 뒤섞인 밑바닥을 향해 떨어지려 한다. 인간에게 구원은 필요 없다. 애초에 구원 받아야 할 죄를 지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에게 원죄를 덧씌우는 ‘비극적인 주체관’을 믿지 않는다. 내가 짓지 않은 죄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는 생각은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불만을 갖게 만든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그래서 항상 비극적이다. 그와 달리 우리는 더 밑으로 내려가 바닥을 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합법과 불법 그 모든 것의 경계선에 서서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봐야 하는 거다. 아직 밑바닥을 치지도 않았는데 구원이 웬 말인가. 그러니까 인간은 아직 신이 필요 없는 거다. 어, ‘인간은 아직까지 신이 필요 없다’, 이 말 멋있지 않나?(웃음)

모든 가치들의 ‘경계’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균열, 틈새에 관심이 많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소시민들이 모여 깔끔한 척 하며 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다고 치자. 여기에 비닐봉지가 하나 배달된다. 보아하니 이 봉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사실 봉지에는 더러운 오물이 들어 있다. 이게 터지면 난리가 나겠지. 이 상황에서 우리는 봉지가 터지기 직전의 순간, 봉지에 난 작은 구멍에 관심을 갖는 거다. 그건 경계에 난 구멍이다. 그 구멍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다. 안과 밖이 뒤섞이는 지점이다. 때에 따라 그건 정치적인 관념 사이의 구멍일 수도 있고 선과 악 사이의 구멍일 수도 있고 합법과 불법 사이의 구멍일 수도 있다. 그 구멍을 어디에 대입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 있다.

사진을 찍으려는 찰나, <우리는 액션배우다>에 출연한 배우 곽진석이 잠깐 들렀다. '눈뜨고 코베인'의 공연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가 주고 간 '눈뜨고 코베인'의 리더 까막귀의 종이 가면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였다. 곽진석 씨께 감사드린다.


영화를 찍는 건 결국 그 구멍을 들여다보는 행위인가?
그렇다. 다른 말로 하면 언제라도 터질 것 같은 변화의 조짐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행위라고 할까. 위에 종양이 생기면 얼굴에 두드러기가 난다. 우리는 그 두드러기를 연구함으로써 종양의 크기와 위치, 성질을 파악하는 거다. 곧바로 종양을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고갈>을 통해서는 어떤 종양을 들여다본 건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경계, 그 균열을 하나의 덩어리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공기나 먼지처럼 부피와 무게를 가진 어떤 환경으로 말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벽이나 철조망 같은 물체로 나타날 수도 있고 인물이 느끼는 심리적인 압박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래서 <고갈>의 전반 1시간 반은 한가롭고 지루하게 흘러간다. 그렇게 균열의 증상들이 먼지처럼 쌓여가는 거다. 그러다 후반 30분에 이르러 드디어 폭발하는 거지. 긋고 자르고 찌르고 터지고 버리고 튀어나오고 울고.

영화에서 인물들이 계속 토하고 트림하고 사정(射精)하는 것도 같은 맥락인가?
그렇다. 신체에 압력이 차면 누구나 그러지 않나. <고갈>은 그 자연스러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다.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몸을 잊고 산다. 의식하지 않는 거다. 그게 바로 무의식이고 본질이다. 

우린 결코 특별하지 않다!

어릴 때부터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데이비드 린치, 루이스 부뉴엘, 로버트 알트먼의 영화를 봤다면서.
다들 보는 거 아닌가? 아닌가? 하하하.

보통은 어릴 때 <영구와 땡칠이> <나홀로 집에> 시리즈 같은 거 본다.
우리 어렸을 때가 비디오 대여점이 한창 잘 될 때였다. 초등학생, 중학생 때 거기서 크로넨버그, 린치, 알트먼 영화를 빌려다 새벽에 골방에서 몰래 봤다. 마침 시네마테크 끝물이라 대학생들이 담배 피우면서 영화 보는 지하실 같은 데 찾아가서 보기도 하고. 루이스 부뉴엘은 좀 더 나중에 접했다. <영구와 땡칠이>는 오히려 철들고 나서 봤는데 그거 예술이더라.(웃음)

그들의 영화로부터 당신들만의 ‘특별한’ 감성이 생겨난 거라고 볼 수 있겠다.
만약 그 말이 우리들의 ‘특별한’ 상상력을 칭찬하는 말이라면 사양하고 싶다. 난 오히려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문명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상상력이 더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다. 크로넨버그, 린치, 부뉴엘의 영화가 아니라도 이 세상은 이미 엄청난 폭력과 포르노에 노출돼 있다. 신문을 보라. 이 세상이 어디 제정신인가? 포르노 동영상마다 달려 있는 그 높은 조회 수를 보라.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포르노를 본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결코 특별하지 않다. 현 세대는 알게 모르게 추락, 파괴, 소멸 같은 것을 굉장히 즐긴다. 단지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솔직할 기회가 많았던 것뿐이다.        


<고갈>은 인물의 행동 속에서 원인과 결과를 찾기 힘든 영화다. 그만큼 영화가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할 수 있지만 설명하지 않는 것인가, 원래부터 설명할 수 없어서 하지 않은 것인가?
후자다. 우리가 데이비드 린치, 루이스 부뉴엘한테 배운 게 바로 그거다. 실제로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뭔가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밑에는 반드시 비합리적인 것이 숨어 있다. 그것을 파헤치는 게 부조리극, 잔혹극의 정신이다. 

<고갈>이 ‘뷰티풀 호러’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호러라기보다 잔혹극이라고 하는 게 맞다. 호러는 공포를 다루지만 잔혹극은 불안을 다룬다. 공포는 주로 나보다 훨씬 센 놈이 나타나서 나를 해치려 할 때 느껴지는 감정이다. 그래서 호러에서 ‘나’는 순수하게 무고한 약자가 된다. 거기에 약간의 편안함이 숨어 있다. 하지만 잔혹극은 적이 내 안에 있을 때, 내가 약자인 동시에 강자고, ‘나’인 동시에 적인 상황을 그린다. 약자와 강자, ‘나’와 적 사이에 구멍이 뚫리는 거지. 그래서 잔혹극이 불안하고 불편한 거다.     

‘비타협 영화집단 ‘곡사’’란 이름으로 영화를 만든다. 무엇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건가?
우리 보고 ‘실험영화’ ‘독립영화’ 한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 말이 부담스럽다. 누구나 우리만큼 현실이 불편하다고 느끼고 세상 곳곳에서 경계 위의 구멍, 그 증상들을 발견할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걸 영화로 만들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 것도 실험한 게 없다. 근데 이상한 건 우리는 분명히 이 세상, 문명의 모습을 보고 영화를 만드는데 이 세상은 그게 자기 얼굴이 아니라면서 되레 우리를 특별한 사람 취급한다는 거다. ‘비타협’이란 말도 세상이 우리를 하도 신기하게 바라보기에 붙여놓은 거다. 사실 ‘곡사’ 앞에 ‘비타협’이란 말을 붙여놓아야 하는 현실이 슬프다. 굳이 말하자면 반들반들한 것과의 비타협이라고 할까? “반들반들한 게 어디 있어, 거짓말 하지 말고 솔직히 좀 보자, 거기 구멍도 있잖아.” 그러는 거지.(웃음)

‘반들반들하다’는 게 뭔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우리가 절대 관심 없는 것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어떤 해답을 제시하는 거다. 해답이나 대안은 영화가 아니라 정치적인 행동으로 찾는 거다. 이를테면 촛불시위 같은 행동.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촛불시위 같은 행동 말이다. 물론 영화가 그런 행동들을 예견하거나 그것의 고리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영화도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영화는 언어가 아니라 감각이다. 둘째는 마치 일기를 쓰듯 주관적인 마음을 묘사하는 일.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셋째는 아까 말했던 대로 ‘비극적인 주체관’을 그리는 거다.

그 말을 들으니 지금 찍고 있는 <방독피>가 더욱 기대된다.
하하하. 처음에도 말했지만 아직 자를 건 많이 남아 있다. 다음엔 배꼽을 잘라볼까 한다.(웃음) 기대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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