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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의 어떤 변화, <호우시절>

FEATURE ON 2009/10/05 04:36 Posted by 쥬하

<호우시절>


건설중장비회사 팀장 박동하(정우성)는 중국 청두로 출장을 떠난다. 현지 지사장(김상호)의 안내로 두보초당을 찾은 그는 미국 유학 시절 아련한 연애감정을 품었던 친구 메이(고원원)를 우연히 만난다. 관광 가이드를 하고 있는 메이의 따뜻한 눈빛은 동하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연애감정을 일깨운다. 곧이어 청두 지방을 두루 살피는 카메라가 두 사람의 만남을 밝은 빛과 상냥한 음악으로 가득 채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메이의 행동거지가 이상하다. 그녀는 동하의 조심스러우면서도 끈질긴 접근을 즐기면서도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무언의 거부를 암시한다. 그러한 메이의 반응에 동하는 자주 혼란에 빠진다. 다소 미스터리의 구조를 형성하는 메이의 비밀은 클라이맥스를 통해 밝혀지고, 허진호 감독의 영화에서 늘 그러했듯이 동하와 메이의 이별이 점쳐지는 순간, 뜻밖에도 <호우시절>은 헤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8월의 크리스마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허진호 영화의 결말은 <8월의 크리스마스>(1998) 이후 줄곧 죽음이나 이별로 마무리 되는 일관성이 있었다. 그의 작품들은 아련한 사랑의 감정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끝나버리거나(<8월의 크리스마스>), 가슴이 벅차도록 따뜻한 감정과 행복한 순간이 순식간에 식고 변하는 과정을(<봄날은 간다>(2001), <외출>(2005), <행복>(2007)) 그려왔다. <호우시절>의 밝고 희망찬 엔딩은 그간 운명적인 사랑보다 천변만화하는 인생에 역점을 두고 있던 허진호에게 모종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시사한다. 과연 그의 심경에 어떤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먼저 허진호의 영화적 스타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허진호라는 이름이 한국 멜로영화의 간판 격으로 불리는 상황이다 보니 그의 이름만으로도 왠지 센티멘탈한 감정이 느껴지는 요즘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그저 말랑하거나 멜랑콜리하기만한 연애영화가 아니다. 죽음을 앞두고 살고 싶다고 술주정을 부리는 남자가 등장하고(<8월의 크리스마스>), “라면 먹고 갈래요?”라고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봄날은 간다>), 불륜으로 배신당한 남녀가 저들끼리 만나 불륜으로 맞불을 놓고(<외출>), 여자를 이용해 먹는 치졸한 남자가 등장하는 것이(<행복>) 바로 허진호의 영화다. 그 대담한 대화나 어휘의 구성, 어처구니없는 상황들만 놓고 따지자면 홍상수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봄날은 간다>


하지만 진정한 허진호의 위력은 값싸 보이기 쉬운 자기연민이나 추레하기 십상인 이별의 뒷모습을 우아하게 감싸 안는 그만의 감수성에 있었다. 갈대밭에 선 유지태의 아리송한 표정이나 눈으로 뒤덮인 요양원을 향하는 황정민의 모습을 보면 깨닫게 된다. 그의 영화는 남세스런 진실 속에 이리저리 떠밀린 사랑이 어떠한 성숙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결코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감동적으로 담아내왔다. <호우시절> 역시 마찬가지다. 청두의 곳곳을 마치 관광이라도 하는 것처럼 돌아다니는 동안 동하와 메이의 야릇한 연애감정은 우아하게 그리고 섬세하게 전달된다.

사실 연애란 것은 두 가지 커다란 세계의 격전장이나 마찬가지다. 믿음과 의심의 전쟁이랄까. 사랑의 감정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우리의 사랑’이라는 것이 ‘유일무이한 그 무엇’이며, 어떠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성취되고야 마는 운명’이자, 우리들의 인생을 구원할 ‘위대한 무엇’이라는 믿음을 품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랑이 어떠한 이유 때문에 끝나가는 단계에 돌입하게 된다면(내지는 위기에 빠지게 되면), 안타깝게도 모든 애정은 가볍고, 충동적인 것으로 돌변하고, 무척이나 가치 없는 그리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다. 허진호의 멜로감각은 항상 그 사이에 위치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현실과 가장 낭만적인 사랑이 공존하는 동안 유려한 화면과 신랄한 대사가 사랑에 대한 믿음과 의심의 알레고리를 펼치는 것이다.

<행복>


<호우시절>은 그간 가혹한 현실에 무너지고 말았던 허진호식의 연애가 마침내 행복으로 귀결되는 보기 드문 결말을 보여준다. 연애의 현실과 인간의 내면을 깊숙이 파내려가던 감독이 관객을 위로하고 희망에 찬 응원을 보낸다. 어쩌면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어 보이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복에 대한 무한긍정과 사랑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일 수도 있겠다. 손해 보는 것 없이 경제적으로 연애하려는 요즘의 세태를 따져본다면 이러한 순진한 시선은 차라리 교훈일 것이다. 의심과 불신의 시대, 그의 변화가 반갑다. 유주하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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