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트릭트 9>은 리뷰를 쓰기 어려운 작품이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할리우드 영화, SF, 액션이란 장르에 묶는다면 그 실체를 정확히 전시할 수 없다. 또 사전 정보 없이 보는 게 최상의 감상법인 작품이라 관객의 즐거운 감상을 위해서는 줄거리나 다양한 설정을 최대한 감추면서 써야한다(작품을 보지 않은 분은 여기서 창을 닫고 극장으로 향할 것을 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좋은 먹잇감을 두고 사냥을 멈출 수 없는 야수와 같은 습성 때문이요, 작품의 본 관객들과 작품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차이’에 얘기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디스트릭트 9>의 시작은 인위적으로 만든 '차이'다. 인간은 28년 전 지구에 온 외계인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인근 ‘디스트릭트 9’에 격리시켜 놓는다. 외모도, 언어도, 고향도 너무나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지구 도착 시 거의 죽을 지경이었던 외계인들은 인간의 지시에 따랐지만, 몸에 기운이 돌면서 자신들의 환경에 불만을 터뜨린다. 여기에 인간은 단호히 대처한다. 이제 말을 듣지 않은 외계인들은 ‘디스트릭트 10행 열차’에 타야 한다.
비커스(샬토 코플리)는 외계인 강제 퇴거를 이끄는 중책을 맡고 디스트릭트 9에 투입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비커스는 완벽한 인간이다. 외계인에게 사탕을 주고, 협상, 협박을 하는 그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똑같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외계 물질과 접촉하면서 그는 외계인의 모습으로 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점에서 인간과 외계인의 교감이 시작된다. 정착촌을 만들어주고, 인권단체가 외계인들의 권리를 지켜줘야 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생기지 않았던 교감이다. 하나의 종이 경계를 넘어섰을 때 비로소 교감의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비커스와 크리스토퍼(외계인)가 교감을 하는 것은 둘의 목표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비커스는 도로 ‘인간’이 되기 위해, 크리스토퍼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손을 잡지만, 이들의 교감은 불안하다. 그렇다면 공존은 불가능한 것일까. 작품 곳곳에 나타난 징후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비커스는 크리스토퍼와 협상을 하고, 크리스토퍼의 아들은 비커스를 삼촌처럼 따른다.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소통의 가능성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하네스버그라는 공간이다. 만약 우주선이 뉴욕이나 런던 상공에 떴다면 <디스트릭트 9>은 애초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개발한 신무기를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선방’을 날렸을 테고, 그럴 경우 <인디펜던스 데이>나 잘해봐야 <맨 인 블랙> 류의 영화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요하네스버그는 애초에 유색인이 살고 있던 공간으로, 백인 중심의 권력층은 유색인을 끊임없이 타자화하면서도 한편으로도 유색인과의 삶을 용인한다. 나라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차이가 인정될 수밖에 없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끊임없이 백인들로부터 고난과 멸시를 받아온 유색인들도 외계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백인은 흑인을 노예 삼고, 덜 까만 사람은 더 까만 사람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과정과 똑같다. 그 원인은 복잡하다. 백인중심의 문명에 기인한 것일 수도, 한정된 자원 속에서 치열한 생존 경쟁을 펼쳐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차이는 결국 가시화된 폭력으로 드러난다.
작품 속에서 이를 증명하는 캐릭터가 나이지리아 갱단이다. 이들은 MNU(Multi-National United, 외계인 통제를 담당하는 민간회사)와 외계인, 양자 간의 갈등을 다자화 시키면서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연출, 극적 긴장감을 높일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과 다른 모습의 사람을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때로는 불가능한지) 보여준다. 관객들은 외계인에 대한 인간의 폭력을 보며 ‘인간은 왜 외계인을 이해하지 않는가’ 의심한다. 하지만 시선을 돌려 나이지리아 갱단을 보자. 폭력과 샤머니즘적 원시성을 갖고 있는 그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나이지리아 갱단은 ‘인간이기 때문에 교감과 공존은 가능하다’는 휴머니즘의 환상을 산산조각 내는 중요한 기제이다.
지금껏 살펴본 차이, 교감, 공존 가능성 등 관계의 개념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더해보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비커스가 외계 물질에 감염되고 사건이 일단락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사흘 남짓이다. 30년 넘게 쌓아놓은 관계, 존재방식이 사라지는 시간이 채 3일도 걸리지 않는다.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2PM의 재범. 그가 한국사회에서 이방인(Alien) 취급을 받고 한국을 떠난 시간, 비커스가 외계인(Alien) 취급 받고 인간사회에서 사라진 시간 모두 3일이다.)
여기에 키포인트가 있다. 우리가 새로운 존재를 만나 교감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견딘다면 소통 가능성은 그만큼 커진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서둘러 판단을 내린다면 교감은 요원한 일이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공격성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우리는 끝내 높은 수준의(어쩌면 낮은 수준이라도) 교감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디스트릭트 9>에 나오는 외계인들의 모습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사실이다.
희생, 공존을 위한 유일한 방법?
물론 소통, 교감 없이도 공존은 가능하다. 힘의 균형이 완벽하게 이뤄지든가, 한쪽이 무조건적인 희생을 하면 된다. 작품 속에서 인간은 외계인들에게 끊임없이 희생을 강요한다. 디스트릭트 9에 있는 너희가 꼴 보기 싫으니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디스트릭트 10으로 꺼지라는 거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들이다.
굳이 88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쫓겨난 주민들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기업은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격하시키고, 정부와 건설기업은 도시 집값을 높여 서민들을 자신의 블록에서 쫓아내 버린다. 또 필요에 의해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면서도,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그것도 외계인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이토록 가슴을 치는 건 바로 이 이유이다.
<디스트릭트 9>인 인간과 외계인의 갈등을 통해 인간사회의 차이와 교감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때문에 작품에서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은 화려한 액션이 아닌 아내와 절규하듯 통화하는 비커스와 스크린 밖의 ‘나’를 바라보던 크리스토퍼의 슬픈 눈이다. 음악도 감동이나 액션의 쾌감을 증대시키는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인도나 아프리카 변두리를 연상시키는 제3세계 음악은 청각적 이질감을 형성하고, 액션장면에 등장하는 단조로우면서 구슬픈 현악 선율은 인물들의 비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놀라운 상상으로 인간의 한계와 현실 사회의 치부를 지독하게 드러내는 것, <디스트릭트 9>의 힘이다. 안효원 기자(FILMON)
ⓒ Key Creatives, QED International, WingNut Films
무시무시하다. 억! 소리가 절로 나온다. 힘이 넘쳐난다. 온몸이 저릿하고 들썩인다. 이게 다 무슨 소리냐고? 닐 브롬캠프와 피터 잭슨이 야심차게 들고 나온 신작 <디스트릭트 9>을 놓고 하는 수식어들이다. 분명 놀라운 건, 이 오만 가지 수식어가 각자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한데 뭉쳐 놀라움을 선물한다는 것이다. 페이크 다큐멘터리에서 외계인들의 사...
* 본 리뷰는 영화의 내용을 마음껏 이야기하며 풀어내진 리뷰입니다. 그러므로 흔히 말하는 '스포일러'의 가능성이 있는 리뷰입니다. 혹시라도 원치 않으신다면 나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디스트릭트 9'. 올해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문제작을 뽑으라고 한다면, 필자는 개인적으로 3가지 작품을 뽑고 싶다. 첫번째는 '마더'이다. 우리네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지독한 자식사랑을 비판하는 시선으로도 찬양하는 시선으로도 풀어내지 않고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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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대한민국 현실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듯한 느낌이 듭니다.
2009/10/22 12:52외계인 자리에 들어갈 대상이 우리 안에도 참 많죠..
저도 영화가 끝나고 쉽게 자리에서 뜨지 못한 게..
2009/10/26 10:33열린눈님 말씀하신 그런 측면 때문입니다.
좋은 작품을 만나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