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그들 각자의 영화관>의 많은 에피소드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세 편을 골라봤다. 물론 영화의 제목과 비슷하게 ‘영화관 속 나만의 영화들’인 셈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아니, 아직 시작도 안했는걸
<어느 좋은 날> (One Fine Day, 기타노 다케시)
<어느 좋은 날>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세월에 대한 원숙한 성찰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작품이다. 농부가 찾은 시골 극장에서 나이가 든 것은 비단 낡은 극장시설 뿐만이 아니다. 극장을 관리하는 영사기사도 그렇고, 극장을 찾은 농부도 그렇다. 영화가 늦게 시작되고, 중간에 오랫동안 끊겨도 극한의 인내심으로, 불평 한 마디 없이, 영화를 다 보겠다고 기다리는 농부의 모습은 영화에 대한 열정은 물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삶의 호흡을 깨달은 촌부의 여유가 느껴진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한참을 기다려 농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키즈 리턴>의 하이라이트 장면, 두 젊은이가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대화를 나눈다. “우리 이제 끝난 건가?” “아니, 아직 시작도 안했는걸.” 그 젊은이들을 보는 농부의 표정은 담담하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는지, 아니면 자신에게도 아직 남은 것이 많다는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해질녘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을 향해 길게 뻗은 길은 천천히 걷는 농부의 뒷모습은 쓸쓸하기보다는 자연과 어울려 보기 좋은 한편의 그림으로 보인다. 영사기사로 기타노 다케시의 감독이 직접 연기를 펼친다. 아주 짧게 지나치니 주의 깊게 볼 것을 권한다.
기억 속 나를 만나는 시간
<영화 보는 날> (Movie Night, 장이모우)
모 철강 CF에나 등장할 것 같은 중국의 한 시골 마을, 동네는 아침부터 축제 분위기다. 이동 극장이 와서 야외 영화 상영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동네 밖에서부터 이동차를 기다리고, 차를 따라 가며 달리기 시합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점점 지치기 시작한다. 해가 지고 영화가 시작되는 까닭에 아직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한참 남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해가 지고, 이동 극장에 모인 마을 주민들은 상기된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그 중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소년이 있으니, 하루 종일 기다리다 지친 탓에 잠에 든 주인공 소년이다.
<영화 보는 날>은 ‘영화 보는 행위’가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 잘 보여주는 영화다. 발전의 ‘발’자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시골 마을에서 가끔씩 오는 이동 극장은 말 그대로 꿈이자, 다른 세상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눈 내리는 강아지 마냥 폴짝폴짝 뛴다. 장이모우 감독은 이동 극장이 도착한 순간부터 영화가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는 아이들이 심리는 섬세하게 잡아낸다. 주인공 소년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해를 바라보지만, 냉정한 해는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지 않고 천천히 움직인다.
소년은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에 잠에 든다. 어린 아이가 하루 종일 긴장을 하고 있었으면 피곤하기도 했을 터.(순간 20년 전 <메칸더 V>를 보겠다고 한나절을 기다리다가 잠에 들어 울었던 필자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아이의 표정은 세상 그 누구의 것보다 평안하다. 다른 사람들이 눈을 뜨고 영화를 보고 있는 대신, 자신은 눈을 감고 영화 속 주인공들을 만나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이 작품은 순수한 소년의 모습을 통해 소중했던 무언가를 만나기 위해 간절히 기다렸던 과거의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 기억이라는 영화 속의 주인공은 바로 ‘내’가 될 것이고. 영사기사와 마을 처녀가 눈빛을 주고받는 수줍은 사랑도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세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숨소리
<이걸 주려고 9천 킬로나 날아왔어요>(I travelled 9.000km give it to you, 왕가위)
텅 빈 극장에 두 남녀가 있다. 극장 안을 가득 채운 정적과 같이 둘의 사이 또한 숨 쉴 수 긴장감이 형성된다. 남자의 손은 여자의 다리로 내려간다. 두 남녀만이 평생토록 잊지 못할 기억이 만들어지는 순간, 둘은 사랑을 나눈다.
<이걸 주려고 9천 킬로나 날아왔어요>는 왕가위 감독의 감각적인 영상과 소리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왕가위 감독은 두 남녀의 모습 뿐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내는 농염한 공기마저 카메라에 포착한다. 압권은 그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여자의 낮은 숨소리이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곳은 원칙상 ‘공공장소’인 극장이기 때문에, 누구하나 말을 하거나 큰 소리를 낼 수 없다. 하지만 입을 열지 않아도 서로 사랑을 느낄 수 있듯, 몸이 나누는 사랑의 흔적은 입을 닫는다고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최고의 흥분상태에서 최대로 절제한 음성. 근래 본 그 어떤 영화보다 관능적인 소리였다.
영화를 볼 때부터 고민이 됐던 것은 왕가위 감독이 스크린 위에 펼쳐놓은 영상과 소리의 향연을 어떻게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였다. 찰나의 표정과 그들의 작은 떨림, 소리를 글로 옮긴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기 때문에. 여튼 이 작품은 글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 가장 난감한 영화이면서, 만남 자체로 행복한 영화이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방법 밖에 없다.
Epilogue 또 하나의 그들 각자의 영화관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극장 안에 앉아 있었다. <그들 각자의 영화관>은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는 할리우드 영화와 달리 가슴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그 순간의 기억을 담고 싶어 준비한 카메라를 들고 상영관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그들 각자의 영화관> 스탠딩 배너가 있었고, 그것을 찍어서 기억에라도 남기고 싶었다. 그런데 배너 앞에서 두 연인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다렸다. 그런데 그들은 감독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직 영화가 끝나지 않은 셈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날 만난 영화관의 기억은 두 연인의 행복한 모습이었다. 부디 오래오래 행복하시길. 안효원 기자(FILMON)
'REVIEW 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통의 리얼리티를 획득한 <인크레더블 헐크> (0) | 2008/06/04 |
|---|---|
| <88분> - 88분, 이 억겁의 시간 (1) | 2008/05/30 |
| <그들 각자의 영화관> ② - 때론 순수하게, 때론 섹시하게 (2) | 2008/05/30 |
| <그들 각자의 영화관> ① - 가장 은밀한 33개의 사랑 고백 (2) | 2008/05/29 |
|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 - 고색창연한 영웅의 금의환향 (30) | 2008/05/23 |
| 눈이 시원해지는 영상의 힘,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 (0) | 2008/05/20 |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