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옥 감독은 뜸을 들이며, 말을 고르며, 계속 예를 들며 말했다. 듣고 있자니 점점 더 혼란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좀 더 듣고 있으니 박찬옥 감독은 천천히, 정확하게, 충분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비로소 안개가 걷히고 <파주>로 가는 길이 보였다. 장성란 기자(FILMON) | 사진 김주영
그에 앞서 지난 10월 16일 막을 내린 1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박 감독을 인터뷰한 동료 기자가 말했다. “박 감독은 굉장히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사람인 거 같아.” 질문에 대해 충분히 생각한 다음 낱말을 하나하나 고르며 말을 한다고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렇다, 아니다 답하는 대신 주로 자신의 경험이나 주변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고 했다. 기억을 더듬는 동료 기자의 표정이 오묘했다.
그 전에 부산국제영화제 비디오 룸에서 <파주>를 봤다. 조그만 컴퓨터 모니터로,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헤드셋을 끼고 작은 창을 통해 영화를 봤지만 이 영화가 단순히 처제와 형부의 사랑을 그리는 치정극이 아니라는 사실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화면을 뒤덮고 있는 희뿌연 안개처럼 처제 은모(서우)와 형부 중식(이선균) 사이에는 온갖 애증후박의 감정이 두텁게 얽혀 있다. 영화는 아스라한 안개를 가르며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그 발걸음은 예상 외로 반듯하고 또렷하다. 그러한 발걸음으로 <파주>는 은모와 중식 사이에 쌓인 온갖 복잡한 감정의 단면을 말없이 잘라 보인다. <파주>는 보여줄 뿐 떠벌리지 않는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자꾸만 더 상상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박 감독이 2002년에 연출한 장편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도 그랬다.
이토록 섬세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 고민 끝에 나도 솔직해 지기로 했다. 영화를 보며 떠올렸던 여러 개인적인 기억과 감상을 있는 그대로 털어 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날의 지극히 사적인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영화는 택시 안 풍경으로부터 시작한다. 파주로 가는 택시의 앞자리에 은모(서우)가, 뒷자리에 보스(이경영)가 타고 있다. 갑자기 택시 기사가 은모에게 뒤에 앉은 손님과 나는 아는 사이가 아니다, 둘이 짜고서 으슥한 데로 데려가 이상한 짓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고 말한다. 그 말로 인해 분위기는 당연히 더 어색해진다. 밤늦게 택시를 타본 적 있는 여자라면 그 장면에서 은모가 느꼈을 이상한 기분을 십분 이해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 장면에서 기사는, 손님들이 아무 말도 안 하고 분위기가 어색하니까 그냥 생각나는 대로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거다. 근데 그때 기사가 하는 말은 내 무의식에서 나온 거 같다. 내가 보통 합승을 잘 안 하는데 그건 집에서, 택시 기사와 합승하려는 손님이 한패일지 모르니 합승하지 마라, 이런 식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일 거다.
비슷한 장면이 또 있다. 은모가 중식과 함께 차(茶)를 팔러 나갔을 때다. 중식이 컵에 물을 부으려니까 남자 손님들이 은모를 힐끗 보고 키득거리면서 “기왕이면 예쁜 아가씨가 따라 줬으면 좋겠는데.”라고 말한다. 그러자 은모가 말없이 주전자를 든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대학 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맥주를 사려던 중년 남자 손님 둘이 계산하던 나에게 “아가씨 같이 예쁜 아가씨도 한 명 주세요.”라고 말해서 그 손님들과 크게 싸웠다.(웃음) 누군가가 나를 성적인 존재로 볼 거라고 전혀 생각지 못한 순간에 불현듯 누군가 나를 ‘여자’로 보고 있다는 걸 느끼면 굉장히 당혹스럽지 않나.
그 장면에서 은모가 기가 살아 있었다면 “내가 무슨 다방 레지인 줄 알아요!”라고 했을 거다. 은모는 원래 그런 아이다. 그런데 그때 은모는 가출을 한 번 했다가 언니가 죽고 없는, 중식만 남은 집에 돌아온 상태다. 이제 중식과 자신은 아무 관계도 아니다, 형부 집에서 나가야 된다, 고 생각하고 그날도 새벽에 짐을 쌌는데 나가지 못하고 울기만 한다. 전에 가출했을 때 고생이 너무 심했던 거지. 그때가 바로 은모가 무장해제 되는 지점이다. 기가 꺾인 거다. 은모가 그 손님들한테 그야말로 ‘순순히’ 차를 따라 주는 장면은, 이 아이가 기가 꺾였다, 스스로 아무 힘이 없다고 느낀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거다. 중식의 집에서 비굴하게 살 수밖에 없겠다, 고 느끼는 상태라 장사도 따라 나간 거고. 큰 의미를 둔 건 아니다.
우연히 파주에 갔다가 안개 낀 풍경을 보고 영화의 공간적 배경을 파주로 정했다고 들었다. 과연 영화 내내 안개가 낀 것 같은 희뿌연 화면이 인상적이다. 특히 은모가 중식을 찾아 매캐한 연기에 휩싸인 철거 건물을 올라가는 장면은 이 영화 최고의 미장센으로 꼽고 싶다. 안개는 영화의 주제와 어떻게 연결 되는 건가?
음, <밀양>(2007)은, 햇볕이 연결 고리가 돼서 마지막 장면까지 모티프들을 쭉 이어 준다. 그것처럼 <파주>에서 안개나 파주가 각각의 모티프들을 연결해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지옥의 묵시록>(1979)의 축축한 밀림과 습한 날씨가 영화의 주제와 연관되는 건 아니지만 정서적으로는 작용하는 바가 크다. <파주>의 안개도 정서적인 거다. 원래는 마지막 장면 전에 은모가 언니 무덤에 가서 인사를 하는데 친구 미애(김예리)가 은모를 배웅해 주겠다고 온다. 그때 은모가 “너 파주에 왜 안개 많이 끼는 줄 알아?” 그러면, 미애가 “몰라.” 그러니까, 은모가 “육이오 때 여기서 사람이 많이 죽어서 그런 거래. 사람이 죽으면 인이 나오거든.”이라고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편집에서 뺐다.
왜?
그 대사가 영화에서 안개를 언급하는 유일한 부분이었다. 근데 막상 찍고 보니 안개가 잘 안 보여서 뺐다. 어디서 들은 건지 아니면 내가 지어낸 건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내가 파주에 가서 안개를 봤을 때 그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나 혼자 속으로 ‘그래, 영화에서 공동묘지 나올 때 보면 꼭 안개가 끼어 있잖아. 육이오 때 여기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고 생각해 보면 파주는 한강 근처니까 역사적으로 한강을 차지하려는 세력들이 여기서 끊임없이 전쟁이 벌였을 거야. 그러니까 이건 맞는 말 같아.’라고 생각했다.(웃음) 그래서 과학적인 근거도 알아보지 않고 대사로 썼다. 그럼 사람들이 이걸 영화에서 듣고 그렇구나, 하고 생각할 텐데 나는 또 그게 너무 재밌는 거다. 그건 주제랑 상관있다기보다 그냥 나 혼자 좋아하고 재미를 느끼는 부분이다. 그런 것들 하나하나까지 주제하고 딱딱 맞아 떨어지면 좀 민망하다.
영화가 과거와 현재를 오고간다. 그러한 구성이 은모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파헤치는 영화의 주제와 기능적으로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긴 시간에 걸쳐 벌어지는 굵직굵직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그 긴 시간을 영화 속에서 순차적으로 다 보여줄 수가 없으니 현재와 과거를 교차해서 시간을 자르고 생략해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또 내가 어떤 의혹을 추적하고 사건의 단서들을 조합하는 걸 좋아한다.(웃음) 이런 구성은 특별한 게 아니라 긴 시간에 걸친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취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영화에 각기 다른 세 명의 여자가 나온다. 중식과 각각 다 다른 관계를 맺는다. 자영(김보경)은 중식의 대학 선배이자 사회운동 동료이자 첫사랑이다.
자영은 남자들이 자기를 선망하는 데 익숙한 여자다.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 한두 명 달고 다녀야 성이 차는.(웃음) 중식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지만 남자라고 하기에는 어린 중식을 보며 대학 시절을 보냈고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근데 남편이 감옥에 가고 중식과 함께 한집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둘 사이에 성적인 긴장이 생긴다. 그러다 둘이 정사를 하는 중에 자영의 아기가 끓는 물을 맞는 사고가 벌어지는 거지. 그래서 둘은 자연스럽게 안 보는 사이가 된다. 그러다 다시 만나게 되는데 영화에서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때 자영은 이혼했다고 설정했다. 자영이 고등학생인 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중식을 보면서 이상한 자세로 “남들이 뭐라고 하지 않아?”라고 하는 건 자영이 원래 남자들이 자기를 좋아해주는 걸 즐기는 여자라 그런 거다.(웃음)
은모의 언니 은수(심이영)에게 중식은 ‘섬마을 선생님’ 같은 존재였을 것 같다.
그런 면이 있지. 심이영도 그렇고 관객들도 그렇고 나한테 “은수는 첫눈에 중식을 사랑한 거죠?”라고 묻는다. 난 그게 너무 재밌다.(웃음) 물론 은수는 어느 날 파주에 나타난 중식을 보고 동네에서 보던 다른 시시껄렁한 놈팡이들보다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은수가 중식에게 깊은 순정을 느꼈다고 볼 수만은 없다. 은수가 중식과 결혼한 데는 분명 이 남자와 함께 하면 처녀가장으로 힘들게 사는 데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식의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은모에게 중식은 첫사랑이다. 사춘기에 교회 공부방에서 학생과 선생님으로 처음 만난다.
은모한테 중식은 그냥 교회 오빠다. 교회 오빠 아니면 학교에서 처음 보는 총각 선생님. 중식을 통해 이성에 대해 눈을 뜨고 또 배워가는 거지. 나는, 그때 그런 식으로 만나면 은모가, 중식이 아닌 누구에게라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거라고 생각한다. 근데 은수가 죽고 둘이 같이 지내면서 좀 더 깊은 감정을 갖게 되는 거다. <길>(1954)의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와 잠파노(안소니 퀸)처럼. 세상에 단 둘만 남겨진 외로운 남녀 같이 서로 유일한 존재가 된다.
자영의 아기가 끓는 물을 맞는 장면과 중식과 은수의 신혼집에 불이 나는 장면을 굉장히 담담하게 그렸다. 아기가 끓는 물을 맞는다, 신혼집에 불이 난다는 사실만 깔끔하고 냉철하게 보여주고 넘어가는 식이다. 결코 인물의 감정을 스크린에 쏟아놓지 않는다.
이 장면은 깔끔하고 정확하게 연출해야지, 라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냥 시나리오 쓰면서 머릿속에 영상을 떠올릴 때 그 장면에서는 다른 그림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불이 나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집 내부로 들어가면 예산이 커진다. 하지만 이 영화의 예산이 30억이었다고 해도 그 장면은 한 커트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화재 장면을 예로 들면 은수가 안에 들어가서 라이터를 집고 불을 켜고 하는 장면은 필요가 없다. 중요한 건 불이 나는 게 중식과 관객이 보기에 느닷없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밖에서 찍는 한 커트면 된다. 그리고 그 순간에 은모가 뭘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줘야 하는 거지. 그래서 은모가 미애와 만나서 키득거리고 있는 장면으로 바로 넘어갔다. 그게 효과적인 연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판단은 본능적인 거 같다.
자영의 아기가 끓는 물을 맞는 장면은 어떻게 촬영한 건가? 그 장면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더 소름 끼쳤다.
아기한테 목욕물 정도의 온수를 뿌렸다. 미지근한 물이라도 갑자기 맞으면 아기가 울 테니까. 부글부글 끓는 거품이나 김은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었다. 근데 내가 모질지 못해서 촬영할 때 물이 정확하게 떨어지지 않았는데 다시 못 찍었다.
<질투는 나의 힘>과 <파주>의 정사 장면을 인상 깊게 봤다. 보통 정사 장면에서 카메라가 여자의 표정이나 상반신을 훔쳐보는 경우가 많은데 <질투는 나의 힘>과 <파주>의 정사 장면에는 그런 느낌이 없다. 대신 정사 중인 남녀가 있는 방의 문을 잘못 열었을 때 맞닥뜨릴 거 같은 그림을 보여준다.
정사 장면에서 여자를 대상화하지 말아야지, 하고 의식하지는 않는다. 내가 찍는 방식은 되게 간단하다. 풀 쇼트와 가까이 잡는 쇼트, 이렇게 두 커트로 찍고 편집한 거다. 느닷없이 방문을 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내가 정사 장면을 인물의 감정을 따라 조금씩 고조되게 표현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감정만 간단히 보여주기 때문일 거다. 나한테는 인물들이 옷을 한 장 벗기네 마네 하는 게 참 민망하다.(웃음) 그래서 보여줄 것만 빨리 보여준다. 그래서 갑작스럽고 부담스럽고 거친 느낌이 나는 거다. 개인적으로 영화 이론적인 평가를 의식하지 않는 편이다. 이미 그런 분석의 틀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의식할 생각이 없다. 정사 장면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연출한 거다.
영화를 찍을 때 무의식에 많이 기대는 편인가?
아무리 사소한 것 하나라도 억지로 지어낸 게 아니라면 그 사람의 내부에 있는 무엇과 연결돼 있는 거 같다. 내가 끌렸던 어떤 것, 인상 깊었던 어떤 것, 보고 들은 어떤 것, 경험한 어떤 것들이 영화 속에 쓱 들어온다고 할까. 무의식은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거니까 내가 영화를 완전히 의식하고 통제할 수는 없는 거다. 또 의도적인 건 잘 안 하려고 한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면 영화가 개념적이 된다. 난 마땅하고 정확한 영화는 재미없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자매 둘만 남겨졌기 때문이겠지만 은모가 은수에게 갖는 감정은 보통의 자매애보다 훨씬 강한 것 같다. 섹스를 거부하고 뛰쳐나가는 중식을 향해 울부짖는 은수에게 은모가 달려가 “언니, 울지 마. 내가 있잖아!”라고 말하면서 껴안는 장면에서 특히 그랬다.
은모가 은수에게 여느 자매보다 더 강한 애착을 갖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근데 그 장면은 서우가 서우의 방식으로 연기를 해서 강해진 거다. 서우가 성격이 강하다. 원래 내가 생각한 건 “언니, 울지 마~ 내가 있잖아~”, 이런 느낌이었는데 서우는 “언니! 내가 있잖아!”, 이렇게 진짜 내가 있으니까 괜찮다고 하는 아이처럼 연기했다.(웃음) 그 감정이 너무 튄다고 이 장면을 빼자고 하는 연출부 스태프도 있었는데 나는 너무 재밌어서 그냥 뒀다.
은모와 미애의 관계도 굉장히 각별하다고 느꼈다. 특히 가출한 은모와 미애가 카페에서 점퍼를 뒤집어쓰고 속닥거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건 내가 본 걸 집어넣은 거다. 고등학교 때 어떤 친구 둘이 만날 붙어 다니는 단짝이었는데 항상 뭘 뒤집어쓰고 속닥속닥 얘기하고 그랬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그게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런 건 그 나이 또래의 소녀들끼리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장면에서 배우들한테 점퍼를 뒤집어쓰라고 했다.
시나리오의 인물이 배우들의 개성과 만나 원래 생각했던 것과 달라진 면이 있나?
은모는 훨씬 동물적으로 바뀌었다. 원래는 지금처럼 발산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감정을 도사리고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서우라는 배우가 감정을 터뜨리면서 연기하는 편이라 그렇게 달라졌다. 그래서 더 본능적인 인물이 됐다. 중식은 <포세이돈 어드벤쳐>(1972)에서 진 해크먼이 연기한 프랭크라는 젊은 목사처럼 감정 기복도 크고 약간 충동적인 인물이었는데 이선균이 연기하면서 훨씬 신실한 인물이 됐다. <포세이돈 어드벤쳐>의 프랭크는 배가 좌초되자 지금 배가 뒤집어져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한테 수면 위로 올라가려면 배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고 끈질기게 설득한다. 내가 사적으로 아는 이선균은 반골 기질이 있고 냉소적인 면도 있는 사람이다. 근데 그걸 표현하거나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믿음직스러운 데가 있다. 그런 느낌이 더해져서 중식도 애초의 원기 왕성함이 줄어든 만큼 더 신실해졌다고 볼 수 있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도 당시 소년 이미지를 발산하던 박해일의 뽀얗고 말간 외모 안에 숨겨진 비릿한 욕망을 끄집어냈다. <파주>도 마찬가지다. <미쓰 홍당무>(2008) <탐나는 도다>(TV, 2009, MBC)에서 천진난만하고 생기발랄한 매력으로 주목받던 신인 배우 서우로부터 비밀스럽고 위태로운 느낌을 뽑아냈다. 배우에게서 색다른 느낌을 보는 눈이 있는 것 같다.
글쎄. 배우가 감독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 건 되게 중요한 것 같다. 연애를 해도 금세 다 알 것 같은 사람한테는 쉽게 흥미를 잃지 않나. 같이 일하는 동안 어떤 배우가 이렇기도 하고 또 저렇기도 한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내가 어떤 배우를 보고 단번에 이런 느낌이다, 라고 한다면 그건 겉에서 내 마음대로 그 배우의 이미지를 재단하고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자세히 보면 사람이든 배우든 모두 다 이러 저러한 게 있는데 그때그때 내가 생각하는 어떤 인물과 관계가 있는 배우한테 끌리는 게 아닐까.
영화 말미에 두만(이대연)이 이제 그만 은수의 죽음에 관해 진실을 밝히는 게 어떻겠냐고 하니까 중식이 성경에 나오는 아흔아홉 마리 양과 길 잃은 한 마리 양 이야기를 한다.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서 목자는 중식이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은 은모다. 중식과 은모의 관계를 보면서 그 목자가 신적인 사랑, 그러니까 공명정대한 인류애를 실현하기 위해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목자가 원래 그 한 마리 양을 다른 양들보다 특별히 더 사랑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성경은 신이 쓴 거니까 그 이야기를 목자가 그 한 마리 양을 개인적으로 특별히 사랑해서 찾아 나선다는 뜻으로 성경에 쓴 건 아닐 거다.(웃음)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는 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목자가 그 한 마리 양을 특별히 더 사랑한 거 같지는 않다. 내가 그 이야기에 의미를 두는 건 이런 점에서다. <모리스> <인도로 가는 길> <하워드 엔즈> <전망 좋은 방>을 쓴 영국의 저명한 소설가 E.M. 포스터가 난 국가보다도 한 친구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가 사회의 지탄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내가 좀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중식도 그런 인물이다. 철거민대책위원회(이하 철대위) 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대의를 책임지고 있는데 은모가 그 일을 망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 상황에서 두만이 “너 철대위 어떻게 할래?”라고 물으니까 아흔아홉 마리 양과 한 마리 양 이야기를 하는 거다.
그럼 거기서 중식은 공동의 일보다 사적인 관계를 더 중시한 건가?
음, 이건 진짜 연출 코멘트 말고는 한 적이 없는 얘긴데, ‘그 이야기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왜 더 중요할까?’에 대해서 나 혼자 많이 생각해 봤다. 내 생각에 신은 이렇게 생각한 거 같다. ‘아흔아홉 마리 양은 안전한 길로 집에 잘 돌아가겠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좀 이상한 아이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까 더 중요하다.’ 철대위 위원장은 중식이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 대신 하겠지만 은모가 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면 앞으로 남은 삶을 두고두고 엄청난 혼란 속에서 살 게 될 거라고 중식은 생각하는 거다.
<파주>는 단순히 치명적 사랑을 그린 파격적인 멜로라기보다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복잡한 감정을 가질 수 있는지 탐구하는 인간 드라마 같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들여다봤다. 인간관계나 인간 심리에 관심이 많은가?
관심이 많은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런 생각은 한다. 어떤 사물이나 생각을 열이면 열 다 다르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이렇게 인터뷰를 하면서도 똑같은 질문에 대해 열 번의 인터뷰마다 열 번 다 다른 비유를 써서 답할 수 있는 거 아니겠나. 하나의 일에도 여러 가지 요소가 있으니까. 어떤 일이든 그런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한꺼번에 같이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근데 내가 이런 생각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게 답이 되나?(웃음)
<질투는 나의 힘>이나 <파주>를 보고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이렇게 세밀하게 그리는 감독은 인간관계에 도통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십 년 넘게 살았으면 사회성이 있어야 하는데 난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행동을 해서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한다.(웃음) 얼마 전에도 <파주> 무대 인사를 다니면서 배급차장님한테 “왜 이렇게 같이 다니세요?” 그랬다. 하하하. 내 생각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같이 다니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이 극장에서 저 극장으로 계속 같이 다니시기에 수고스러우실 것 같아 한 말이다. 그런 마음이면 다른 식으로 말했어야 하는 건데 그런 걸 잘 못하겠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거나 당황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게 걱정이다.
영화에서 두만이 교회 공부방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니까 중식이 술에 취해서 이렇게 말하지 않나. “저요, 애들한테 이상한 말 많이 해요. 해서는 안 될 말, 할 수도 없는 말.” 그거랑 비슷한 거 같은데.(웃음)
하하하. 내 친구가 부산영화제에서 있었던 관객과의 대화를 듣고 진짜 조마조마했다고 그랬다. 내가 거기서 “나도 사람들한테 좋아한다는 말 서너 번 들어보긴 했는데”, 그랬단다. 하하하. “누구를 좋아하는 건 그때 그 상황 그 분위기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하면서 그랬다는데 너무 사적인 말을 거침없이 하는 거 같아 지켜보면서 조마조마했다고 하더라. 사십 년 넘게 살았는데 내가 이렇게 미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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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댓글입니다
2009/11/06 11:44파주.. 꼭 보러갈께요
2009/11/06 12:30박찬옥 감독 작품이니...
좋은 글, 마음으로 읽고 갑니다
오늘도 향기로운 하루가 되시길... *^^*
전 "파주" 감독이 박찬"욱"이라길래 박찬"욱" 감독이 언제 이런 영화를 만들었는지
2009/11/06 23:22놀랬었는데 자세히 보니 박찬"옥" 감독님이셨더군요. ㅎㅎ.
말미쯤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 박찬옥감독님이 어쩌면 저랑 그렇게 똑같으신지 신기하네요.
2009/11/06 23:51저도 다른식으로 예의바르게 얘기해야 될 상황에 이상하게 말해서 상대를 당황하게
한적이 많았는데.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