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알고 있다. 가부장제에 근간을 두고 있는 커플지상주의라는 것이 일종의 사이비 종교라는 것을, 나이가 차면 마치 개학 전날 밀린 일기를 해치우듯 결혼으로 쳐들어가는 일들이 무척이나 한심해 보이지만 결혼이 원래 그렇고 인생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그리고 뜨거운 감정으로 만난 두 사람의 열렬한 사랑이 진부하고 따분한 대화에 쉽사리 권태로워 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이 고정관념, 권태로운 관습, 오류투성이 관계에서 벗어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홀로된 사람, 싱글들은 자주 혼란과 외로움, 그리고 위기감에 시달린다. 추위가 가슴팍을 에이는 것인지 외로움이 심장을 후벼 파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요즘. 홀로 우뚝 선 그대를 위해 여기 5편의 준작을 소개하려고 한다. 부디 상큼한 기쁨과 아릿한 슬픔, 터져 나오는 폭소를 만끽하며 잠시간 세상사 시름을 잊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유주하 기자(FILMON)
이유 없이 울고 싶을 때
<그녀에게> Hable Con Ella, 2002
먼저 울고 시작하자. 나중에 웃어야 좋으니까.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는 눈물 흘리는 남자들, 코마상태에 빠진 여자를 돌보는 남자들이 등장하는 영화다. 그들은 사랑하는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리고, 침대 맡을 지키며 책을 읽어준다. 기약 없는 기다림, 응답 없는 그리움에는 필연적으로 눈물이 따를 수밖에 없다. 결국 인생의 불가사의까지 접근하는 감독의 탁월한 이야기솜씨는 거의 비교가 불가능한 경지다. 올해 작고한 위대한 현대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작품 <카페 뮐러> <마주르카 포고>가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백일몽이라도 괜찮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rton, 2008
보통의 연인들은 쉽사리 변하고 나태해진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그렇고, 관계라는 것이 그렇다(물론 노력과 성의가 잠시 간의 환상을 만족시켜줄 수도 있다. 하지만 억지 긍정은 정말이지 위험한 감정이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젊어지는 남자,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에 대한 이야기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선해지는 연인이라니 이건 가히 SF영화적인 설정이다. 여하튼 그의 희한한 신체대사는 우리 모두가 관성적으로 생각하는 관계의 노화를 정반대의 방향으로 역전시킨다. 비록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의 육체는 늙어가지만 그 사랑만은 벤자민과 함께 젊어지고 어려진다. 백일몽이라 하더라도 달콤하다.
지독한 유머로 모든 것을 뛰어넘기
<잘 알지도 못하면서> 2008
그간 홍상수에 대한 평가는 숭배와 저주 사이를 오갔다. 거의 괴담수준이랄까. 그의 영화는 지독한 유머와 볼썽사나운 섹스신으로 악명과 유명세를 동시에 떨쳤다. 하지만 그의 코미디 감각을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다. 연애를 좀 아는 사람, 적당히 비겁하고 어줍잖은 연애를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뛰어난 상황개그와 코미디 감각에 박수를 보낼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로 말할 것 같으면 좀 더 편해진 홍상수를 느낄 수 있는 영화다. 황당하지만 현실적인 상황설정에서 실소가 터져 나온다. 잊을 수 없는 고현정의 명대사 한 자락. “심심해서 그랬어. 남자들도 그러잖아”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희망을 꿈꾸는 그대에게
<사이드웨이> Sideways, 2004
<사이드웨이>는 두 독신남이 주인공이다. 총각파티를 대신해 근사한 와인여행을 떠나는 나름 취향 있는 독신남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환상은 금물. <사이드웨이>는 적당히 능글맞고 추레한 늙다리 홀아비 두 명의 여행기다. 가는 곳마다 사고를 벌이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그저 한심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섣부른 예단 역시 금물이다. 정성을 들여 키워야 하지만 망가지기도 쉬운 피노(포도의 일종이자 포도주의 일종)를 사랑하는 주인공 마일즈(폴 지아매티)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피노 예찬론을 놓쳐선 안 된다. 그가 말하는 피노의 연약함이야말로 쉽사리 부서져버리는 세상의 모든 사랑에 대한 가슴저린 우화다. <사이드웨이>는 지나쳐버린 기회가 머리를 어지럽히고 마지막 희망마저 사그라든 패배와 좌절의 시간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 절망과 무기력에 빠진 모든 사람들에게 과장되지 않은, 하지만 한없이 낙관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역시 할리우드 최고의 이야기꾼이다.
마냥 행복해지고 싶은 순간
<마법에 걸린 사랑> Enchanted, 2007
<마법에 걸린 사랑>은 그냥 대놓고 만화 같은 영화다. 동화 속 공주님 지젤(에이미 애덤스)이 뉴욕 한 복판에 떨어진다는 설정도 그렇고 공주 의상을 입고 뮤지컬 식으로 노래하는 그녀의 본격적인 발성도 그렇다. 하지만 지젤의 떨리는 눈빛과 고운 목소리, 천진난만함 앞에서 우리는 결국 무장해제될 수밖에 없다. 지젤을 연기한 에이미 애덤스의 탁월한 연기력과 인간적인 매력은 가히 위력적이다. 그녀의 표정과 동작들이 관객을 꿈꾸게 하고 사랑하게 만든다. <마법에 걸린 사랑>을 보면서까지 현대적인 연애비관론을 들먹이는 사람이 있다면 심리상담가를 찾아야 할 것이다.
에이미 아담스, 아름답고 연약하고 불안한 얼굴
비인기 스포츠가 영화를 만났을 때
<친절한 금자씨>부터 <마더>까지 - 2000년대 한국영화의 ‘미친 어머니’들
<박쥐> 연관검색어: 렛 미 인, 밀양, 황혼에서 새벽까지, 헬싱, 데드 얼라이브, 핸콕 등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잘 알고 있는 ‘홍상수 장르’ 홍상수 신작
임신이 죄는 아니잖아요 - 10대 임신을 그린 영화
소설에서 영화까지, 벤자민 버튼의 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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