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학자 롤프 옌센이 정보화 시대 이후의 세계를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라 명명했다는 게 참으로 무색할 만큼 지금 우리는 역사에 유래 없던 ‘꿈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분야에 꿈과 감성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할 것이란 일류 미래학자의 예견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네 세상에서 꿈과 감성, 이야기나 문화, 다양성의 가치는 알고 있다시피 하향곡선을 그리다 못해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니까 말이다.
꿈을 함양하고 있노라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란 대체로 이러하다. 이를테면 아이들이 독창성과 창의력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사회의 최대 가치는 개개인의 다양성 함양과 그 존중이다, 기업은 창의력을 가진 젊은 인재를 원한다는 말들은 언제부턴가 공허한 선전 문구에 불과하게 됐다. 교육만 하더라도 겉으로 내세우는 저 우월한 가치와는 달리 여전히 독창성, 창의력, 다양성을 거세하는 작업에 매진 중인 것을 굳이 되짚을 필요도 없다. 또 21세기에 이른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기는커녕 여전히 획일화에 벗어난 인간을 단죄하는 사회인 것 또한 변치 않는 진실이다. 기업 역시 내세우는 바와는 달리 창의적 인재라는 개인의 불가시적인 잠재력에 의존하기보다는 충성심을 판단할 어느 소양에 여전히 큰 점수를 두고 있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꿈이 없는 세계의 현실이다.
덕분에 숨 쉬듯 향유해야 할 문화생활은 마치 개개인의 인생에 있어 가장 마지막에 추가해야 할 최종옵션 정도로 치부되는 듯하다. 삶의 질적 향상과 함께 ‘웰빙’을 부르짖던 얼마간의 신풍속도 역시 고작 먹거리나 건강에 한정지은 현실에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삶의 질을 높였는지 되묻고 싶다. 굳이 영화나 책, 음악 등을 향유하는 것이 얼마만큼 각박하고 헛된 행동으로 몰락했는지를 되뇌는 것조차 이제는 부질없다. 개개인에게 있어 영화는 ‘졸라 재미있어’ 내지는 ‘별로야’ 사이의 평가에서 마무리되는 게 고작이며, 매스컴 역시 백만과 천만이란 숫자 사이에서 모든 평가를 매조지 하는 것이 어느새 자연스런 풍경이 되어버렸다. 책을 읽는 사람이 없으니 개개인이 부담해야 할 책의 단가가 계속 올라가는 것은 당연하고, 넓디넓은 음악의 세계 역시 고작 유행가의 품안을 빙빙 맴돌 뿐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문제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이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현재진행형이란 사실은 때때로 오싹하기 짝이 없다. 언젠가 멸종에 이를지도 모를 취향을 가진 이들은 아직까지도 자발적으로 모이고 교류하며 자신의 문화생활을 발판으로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이들 각자는 개개인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대다수 ‘무취향자’들의 시선은 냉담함을 넘어 점차 폄하에 가까워만 간다. 이 세상에 자신만만하게 영화를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는 차고 넘치지만 ‘어떤 영화를 좋아하시나요?’ ‘어떤 음악을 좋아하시죠?’라고 물을 때 침묵하거나 당황하는 그들의 태도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제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 그 좋아하는 무언가를 즐기고 파헤치고 소통하고자 하는 것조차 이상한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갑작스런 일은 아니다. 한국이란 나라는 대기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가진 나라이기에 내세우는 그 숭고한 가치와는 달리 공교육 역시 대기업 위주의 인물을 양성하는 데 초점을 둘 수밖에 없었던 게 당연하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대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물이란 숫자로 가름할 수 있는 일련의 ‘스펙’이 뛰어난 인물이지 창조적이고 감성적인 가치나 개성과는 거의 무관하다. 오히려 이를 선호하는 것은 전혀 다른 분야인데다 소위 비주류라 불리는 곳에 가깝다. 문제는 대기업 맞춤인재를 양성하는 과정에서 ‘무취향’이 어느새 합리화된다는 데에 있다. 어찌 보면 고등교육을 받은 20대들이 우리 세계의 미래를 짊어갈 세대로 각광받기보다는 88만원 세대로 상징되는 저임금의 혹독함 속에 등수와 연줄에 연연하며 자연스레 무개성, 무취향을 함양할 수밖에 없는 작금의 세태는 이미 오래전 예견된 현실이었다. 어른들이 그 옛날 자신들의 7,80년대를 가리켜 비록 경제성장기이긴 했지만 나름의 청년문화를 가꾸며 살았다 자랑스레 읊는 것 또한 바로 그런 의미일 게다. 그에 비해 우리 세대를 대변할 수 있는 문화는 고작 인터넷뿐. 그러나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은 광활한 인터넷 문화는 애석하게도 굉장히 많은 것 또한 함께 사장시켰다. 그리고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겪고 더 많이 걷고 느껴야 하는 시기에 우리사회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무개성과 무취향의 인재만을 꾸역꾸역 양산하며 여전히 소임을 다했다 의기양양할 따름이고 말이다.
무취향이 타당한 세상에서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무언가에 몰두하고 이를 향유하는 사람들을 ‘오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비단 건프라나 만화나 아니메를 즐기는 사람만이 ‘오덕’이 아니다. 바흐 마니아는 ‘바흐 오덕’이고, 하루키팬이나 나오키팬이나 그저 ‘하루키 오덕’이고 ‘나오키 오덕’이며, 밀리터리 마니아 역시 ‘밀리 오덕’일 뿐이다. 일본의 ‘오타쿠’를 토착화(?)한 단어인 이 ‘오덕후’나 ‘오덕’에는 오타쿠와 마찬가지로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마니아’란 단어로 치환해서 사용할 수도 있지만 굳이 구분하여 사용하는 까닭은 ‘오덕후’에 담긴 조금은 해학적이고 또 조금은 조소적인 느낌 때문일 것이다. 최근엔 ‘무엇무엇 오덕’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조차 스스로를 ‘오덕’이라 칭할 정도에 이르며 그 부정적인 의미는 많이 감쇠했지만 그럼에도 그 어휘에 담긴 자조적인 뉘앙스는 곧 취향을 가진 자들을 향한 누군가의 불편하고도 고까운 시선을 여전히 느끼게 한다. 물론 이를 대놓고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 것을 잘 안다. 그저 재미있으라고 혹은 아무 의미 없이 유행어를 남발하듯 써왔을 뿐이라는 것을. 진짜 문제는 이 과정에서 어느새 자신의 무취향이 합리화된다는 데에 있다. 그것이 크던 작든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면 ‘너는 무엇무엇 오덕이야’라고 내뱉는 사이 아무런 취미도 특기도 없이 그리고 아무 것도 즐기는 것 없이 사는 자신의 안온한 삶 또한 너무나 쉽사리 정당화되니까.
교육이 그랬고 또 정말로 우선은 교육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의 취향으로 세상을 바꾸는 예술가도 있어왔고 또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로 스스로의 인생을 풍성히 가꾸는 사람 역시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한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라고 했던가. ‘오덕’도 함부로 부르지 마라. 함부로 부르기 전에 자신은 그 무언가에 단 한번이라도 뜨거웠는지를 먼저 돌이켜보자. 그게 건프라나 만화나 아니메여도 되고 또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것이 타란티노든 온다 리쿠든 조지 R.R 마틴이든 또 시드 마이어든 애니 디프랑코나 마일즈 데이비스든 그 무언가가 되었든 간에 그저 그 무언가를 즐겨라.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라. 자신의 취향을 깨닫고, 내세워라. 내일 자신의 일생 전부를 책임져줄 시험을 치른다 착각하는 소년들, 그리고 이미 그 시험을 치렀거나 혹은 패스했던 동시대를 사는 소년소녀들 모두. 더 나은 삶을 바란다면 그것이 초라한 현재 삶을 뒤바꿀 것을 확신한다. 소년이여, ‘오덕’이 되어라. 강상준 기자(FILMON)
심화학습서 3
<킹콩><반지의 제왕> 3부작으로 할리우드 영화판에 판타지 영화를 주류로 올려놓은 장본인 피터 잭슨의 꿈은 <킹콩>을 만드는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었다. 틈틈이 모은 돈을 밑천삼아 주말에 영화를 찍던 이 뉴질랜드의 영화광은 <고무인간의 최후(Bad Taste)> <데드 얼라이브> 등 기상천외한 B급 영화를 찍는 재기발랄한 감독에서 성장을 거듭해 오늘날 일약 주류 중의 주류로 자리매김한다. 티렉스와 킹콩이 맞붙는 장면을 고대했다던 그의 바람이 현실화된 피터 잭슨의 2005년작 <킹콩>은 꿈과 열정으로 자신의 취향을 밀어붙인 한 예술가의 거대한 꿈의 완성과 다름 아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오타쿠들의 결집체에 불과하단 평가를 받던 애니메이션 제작사 가이낙스를 굴지의 일본 대표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군림하게 한 TV시리즈. 1995년과 96년 방영 당시 일본 내에서는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대두될 만큼 그 파급력이 대단했으며, 이후 고전으로 자리할 만큼 각종 신화와 철학을 뭉뚱그린 이 로봇 애니메이션은 현재까지도 전세계 애니메이션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감독 안노 히데아키는 소년의 성장과 로봇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기본 토대에 가히 자신만의 색과 취향을 덧입힌 데에 성공한 케이스라 평가할 만하다. 이는 세계와 인류의 존망을 다룬 이 세기말풍 작품이 팬들로 하여금 방 안을 뛰쳐나와 더 넓은 세계와 소통하길 원하는 ‘오타쿠 왕’의 메시지란 해석이 그럴듯한 이유와도 맞닿는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 ‘리빌드 버전’ 극장판 4부작의 서막인 <에반게리온: 서>에 이어 두 번째 작품 <에반게리온: 파>도 12월 3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라인드 하우스>
쿠엔틴 타란티노와 로베르토 로드리게즈의 동시상영 합작품. 동시상영관에 대한 추억을 영화화하자는 기획으로 손발을 맞춘 두 악동은 역시나 자신의 취향을 한껏 반영해 B급 정서 물씬 넘치는 작품으로 영화광다운 영화사랑법을 과시했다. 피와 살이 튀는 건 예사요 피분수와 사지 절단은 옵션이다. 폭력과 선정의 극한을 달리는 작품으로 B급 영화관에 대한 향수를 현재로 소급한 두 감독의 재기도 대단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쓸어 담아 그야말로 취향이 뚝뚝 묻어나는 영화를 제작해냈다는 사실은 더욱 대단하다할만하다. 어찌됐건 참으로 부러운 작자들. 원래는 <그라인드 하우스>라는 한 지붕 아래 동시상영으로 선보여야 더 빛이 났을 테지만 국내에서는 <데스 프루프>와 <플래닛 테러>로 각각 개봉했다.
연관기사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 자비 없는 세상에서의 한판 승부!
<다 큰 여자들> - 왜 남의 기준대로 사냐고?
영화잡지 수몰 위기?
<플래닛 테러> - B무비, 완전체를 이루다
소셜웹 반응글
'ESSAY 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칼리 쿠오코가 노출한 게 그렇게 궁금하세요? (2) | 2010/06/01 |
|---|---|
| <바비> - 우리의 영웅이 죽음을 맞이할 때 (0) | 2010/01/31 |
| 소년이여, ‘오덕’이 되어라 (1) | 2009/11/10 |
| G-드래곤에게서 무엇을 보시나요? (30) | 2009/10/21 |
| <다 큰 여자들> - 왜 남의 기준대로 사냐고? (2) | 2009/10/07 |
| 박재범 다음은 누구인가 (2) | 2009/09/10 |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필름온의 영화리뷰 잘 보고 있습니다.
2009/11/12 00:08근데, 리뷰가 왜이렇게 늦게 올라오나요?
바쁘시더라도 영화가 공개되면 바로바로좀 올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