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추리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밀실살인’은 정확히 말하면 절대로 밀실이 아닌 곳에서 일어난 ‘밀실트릭’에 대한 이야기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중 가장 간단한 걸 꼽자면 이런 게 있다.
어젯밤 내내 얼굴을 볼 수 없던 한 남자가 있다. 아침이 밝아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가 묵고 있는 방 역시 인기척 없이 굳게 잠겨 있다. 그를 찾던 사람들은 급한 마음에 잠긴 문을 부수고 남자의 방으로 들어가는데, 그곳에는 간밤 내내 모습을 볼 수 없던 남자가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다. 이윽고 누군가 외친다. “방 열쇠가 여기 떨어져 있어요!” 그렇다면 이 방은 간밤 내내 안에서 잠겨 있었고 열쇠가 없는 밖에선 결코 열 수 없는 '밀실'이었단 말인가? 남자는 정녕 자살한 것인가?
해답은 사실 간단하다. 방 어느 구석 떨어진 열쇠의 존재를 모두에게 알린 그 사람이 범인. 사람들이 시체에 경악하고 있을 때 범인은 자신이 들고 있던 열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리기만 해도 순식간에 그 방은 감쪽같은 밀실이 되어버린다. 공황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한 아주 단순한 트릭인 셈이다.
사설이 길었는데, <88분>은 이렇듯 눈에 보이는 단순한(그러나 너무나 결정적인) 트릭과 권위 있는 범죄 심리학자를 끝내 살인범으로까지 둔갑시키려는 사형수 존 포스터(닐 맥도모프)의 과도한 욕심이 더해져 살인예고시각인 88분에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긴박감이 와해되어가는 치명적 우를 범하고 있는 스릴러다.
영화는 잭 그램이 자신의 주변인들을 차례로 의심하며 범인의 실마리를 쫓는 과정과, 잭의 증언이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어 연쇄살인범으로 낙인찍힌 존 포스터가 사형 당일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과정을 유심히 매치시킨다. 영화 중반부까지도 존을 연쇄살인범으로 지목한 잭 그램의 증언이 마치 사적 감정이나 혹은 전혀 다른 목적에 기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듯 주인공에 대해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는 분위기는 (알고 보면 별 것 아닌) 과거 잭의 여동생이 살해당한 사건마저도 입 꾹 다물고 수수께끼 형식으로 덧붙이며 독특한 밑바탕을 마련한다. 정의감에 불타는 척하지만 결코 윤리적이지 않은 것 같은 주인공, 그리고 주특기인 프로파일링조차 엉뚱하게 남발하며 외려 함정에 빠지는 잭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88분이라는 실시간 서스펜스보다도 더욱 흥미로운 지점들을 이룬다.
그러나 여동생 살해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며 어느 순간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리는 트라우마와 함께 윤리적 면죄부까지 획득한 잭 그램이 범인 찾기라는 단순한 목적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88분이라는 짧은 시간은 한없이 늘어지기 시작한다. 잭의 주변 인물들 모두가 그를 거쳐 가는 동안 전개되는 크고 작은 단순한 트릭들은 진범의 존재를 손쉽게 지목할 수 있을 만큼 단조롭다. 게다가 명망 있는 학자를 끝내 살인범으로 몰아가려는 진범의 이해하기 힘든 욕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등장인물들과 이를 그보다 더 진지하게 조명하려는 영화의 시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하고 허탈한 느낌마저 자아낸다.
잔뜩 피곤이 어린 잭 그램 박사의 분투를 그리는 알 파치노의 연기는 여전히 훌륭하지만 이를 직조하는 끈들은 느슨하기 짝이 없다. ‘88분’이라는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을 내세우면서도 그 시간을 면밀히 계산하지 않은 헐거운 연출에 지나친 욕심까지 우겨 넣은 <88분>은 좋은 소재와 좋은 배우를 살리지 못한 구성면에 있어서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잘 짜인 압축적인 스릴러와 장르영화의 만듦새에 대한 고민이 더욱 절실하다. 강상준 기자 (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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