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어제(6월 2일) 못 다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강원도 철원, 한 예비군 훈련장엘 갔다. 어느덧 예비군 5년차가 된 나는 예비군 훈련이 지겹다. 한 때는 그 날을 기다리던 때도 있었다. 대학 선후배들과 ‘재밌게’ 훈련을 받고 난 뒤 중국집에 가서 먹던 탕수육과 소주의 맛은 그 어느 때와도 비할 수 없던 것이기에. 하지만 겪은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5년차 예비군의 경우는 다르다. 훈련장에서 나이 어린 조교들과 농담 따먹기 하는 것도 지겹고, 바쁜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던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도 나라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나면 마냥 허탈해질 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살짝 달랐다.
이번 훈련을 달게 받을 결심을 한 것은 전날 KBS 뉴스에서 ‘광우병 쇠고기와 관련해 군대에서 정신교육을 한다’는 보도를 봤기 때문이다. ‘와, 이 정부가 미쳤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걸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비군 훈련장에 도착해 강당에 들어섰을 때 ‘광우병 괴담에 대한 10문 10답’이라는 문서가 벽에 떡하니 붙어 있는 게 보였다. 평소 언론의 관심을 받지도 못했던 농림수산식품부와 보건복지가족부가 ‘정성스레’ 제작한 10페이지에 가까운 문서였다. 뭐, 내용은 뻔했다.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고, 괴담은 괴담일 뿐이라는 것. 쉬는 시간에 갔던 화장실에도 역시 똑같은 문서가 붙어 있었다. 더더군다나 소변기 앞에 붙어있었기 때문에 안 볼래야 안 볼 수도 없었다. (눈 감고 소변을 보는 건 그리 쉽지도 않으며, 아름다운 풍경도 아니다.) 웃음이 나왔다. 역시 군대는 군대구나.
최근 미국산 쇠고기와 관련해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을 보면서 문뜩 떠오르는 한 다큐멘터리가 있다.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 이마리오 감독을 비롯해 16명의 감독, 미디어 활동가가 만든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라는 작품이 그것이다. 2006년 봄, 그러니까 2년 전 현시점에 완성된 이 작품은 16명의 독립영화인이 당시 한국사회 곳곳에 ‘숨어있던’ 병폐를 끄집어 낸 작품으로 한미FTA, 전략적 유연성, 새만금, 비정규직, 기륭전자, 대추리, 줄기세포, 화상경마공원, 카지노, 양심적 병역거부, 사학법, APEC, WTO, 여성농민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곳에는 노무현 정부와 맞서 한미FTA를 반대하던 사람들, ‘비정규직’이라는 딱지를 달고 고통스럽게 투쟁하던 사람들, 미군기지 이전으로 이해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눈물이 고여 있다.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가 작금의 상황을 예측했다’고 말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나는 전혀 과장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한미FTA, 새만금 사업으로 인한 환경파괴(지금은 대운하로 이어지는), 비정규직 문제 등이 미국산 쇠고기 보다 중요하면 중요했지, 소홀히 다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 별 관심을 안 가졌듯,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왜? 미국산 쇠고기의 피해자가 모든 국민이 되는 것과는 반대로 한미FTA로 어떤 이들은 이익을 볼 것이며, 비정규적 문제는 단순히 남의 문제일 테니까. 결국 이런 문제가 쌓이고 쌓여 오늘의 사태가 발생한 것은 아닐까? 마치 고름이 차고 차, 병든 몸이 스스로 터져버린 것처럼.
오늘(3일) 이명박 정부는 30개월 이상의 쇠고기 수입을 중단할 것을 미국에 요청했다. 일단 지난 한 달간의 시민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셈이다. 물론 야당에서는 4일 지방선거를 위한 ‘쇼’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것을 이끌어 낸 것은 시민이기에 그 결과에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없다. 촛불시위를 하면서 물대포와 전경의 방패에 맞으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제 결과는 둘 중 하나다. 미국과 쇠고기 재협상을 하든지, 아니면 어리석은 뚝심으로 민심과 정면으로 충돌,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든지. 그 결과가 머지않아 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면서 마음 한 쪽에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것은 ‘만약 미국산 쇠고기 문제만 해결되면 한국 사회가 정당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인가’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물론 아닐 것이다. 우리의 몸 속에 병든 곳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우리는 건강해질 수 없다. 이제 국민들의 관심이 한미FTA, 한반도 대운하, 비정규직 문제 등 한국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문제까지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하는 말인데, 한 달 전 광우병 쇠고기 문제가 불거져 나오면서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미국산 쇠고기를 먹을 텐데 이게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이번 사건이 이명박 정부의 허상을 깨주는 좋은 사례가 아닐까. 만약 이명박 대통령 집권 초기에 단기적으로 경제성장률이 올라가고, 실업문제가 조금이나마 나아졌다면 그의 인기는 더욱 높아질 테고, 그 때 이명박 정부는 진정 고장난 브레이크를 단 불도저가 됐을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조금이라도 일찍 장밋빛 환상을 깨버렸으니 한 가수의 로맨틱한 가요 제목처럼 그나마 ‘다행이다.’ 안효원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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