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수 감독의 보폭이 넓어졌다. 히말라야로 향하는 여정을 다룬 <천상고원>(2006)은 한 개인의 내면을 깊게 응시하는 작품이었다. 곧이어 1986년 전방입소 반대 시위에 관한 다큐멘터리 <과거는 낯선 나라다>(2007)로 386세대의 부채의식을 다룬 바 있다. 개인에서 세대로 이야기 범위는 넓어졌지만, 감독은 일관된 화두를 던졌다. 두 영화의 공통분모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간다는 것. 부재한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현대사다. 감독의 발자취를 고려해본다면 신작 <물의 기원>은 숙명에 가까운 영화다. 이 작품에서 개인, 세대, 역사는 한 자리에서 조우한다. 마치 예정된 순서인 양. 작품의 모티브를 얻은 사연도 기구하다. 김응수는 고향인 충주댐을 산책하던 중,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시위 중 사망한 고 김중배씨의 무덤을 발견했다. 감독은 죽은 자 앞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체감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장면마다 죄의식과 회한 그리고 1965년 6.3사태를 영화화하겠다는 한 예술가의 사명감이 감돈다. 그러나 현대사를 다룬 작품이라고 해서 기록과 증언에 충실한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하면 오판이다. 영화는 연극과 신화의 형식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한 극영화다.
1부라고 할 수 있는 전반부에서 두 남녀가 대화를 나눈다. 여자는 남자에게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말한다. 남자는 1965년, 그때 그 사건을 회상한다. 헌데 두 사람의 표정은 석고 가면을 씌워 놓은 듯 얼어붙어 있다.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는 시선 처리와 독백식의 대사는 다분히 연극적이다. 이런 모던한 연출은 장 마리 스타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작품들만큼이나 급진적이다. 2부로 이어지면서 영화는 신화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한 남자가 30년 전 어머니가 그렸던 그림 속 숲을 찾아 떠난다. 전설에 의하면 평범한 남자가 나타나 파괴자를 물리친다는 곳이다. 초목이 우거진 숲, 거기서 먹이를 찾는 승냥이마냥 떠도는 남자, 그리고 남자를 무심히 쳐다보는 카메라. 어딘지 모르게 아핏차풍 위라세타쿤의 영화 <열대병>과 닮은 데가 있다.
곧이어 남자의 고행이 시작된다. 남자는 ‘순수’를 찾는 방랑자다. 그가 떠나온 세상은 오염된 곳이다. 오염의 주범은 과거 친일행적을 일삼고 지금은 호의호식하는 자들, 무소불위의 힘으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시민들의 지도자다. 반면 자연은 세계로부터의 도피처이자 마지막 남은 비상구이며 순수의 마지노선이다. 남자는 원류로의 회귀하듯 강을 끼고 있는 숲으로 들어간다. 충주 댐에 고인 물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평온함을 간직한 곳이며, 숲은 모든 생명이 약동하는 장소다. 그러나 숲은 남자를 거부한다. 그는 길을 잃고 한 자리를 맴돈다. 동물들은 그에게 적대적이다. 그는 상처를 입는다. 남자는 맹수에게 다리를 물려 거동이 힘들어지고 새에게 눈을 공격 받아 앞을 보기 힘들어진다. 그의 몸에 난 생채기는 인간의 만행에 대해 자연이 주는 응보의 결과물이다. 남자가 다리를 절룩거리는 것은 피 흘리며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던 예수의 육신, 새에게 눈이 찔려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은 코카서스 바위에 묶여 독수리의 공격을 받던 프로메테우스의 육신과 진배없다. 희생 없이 구원도 없다는 걸, 영화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물의 기원>은 숭고한 희생을 그리는 영화임에 틀림없을 거다. 이도훈(관객심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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