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곰은 오래전부터 미련함의 상징이었다. 한 번쯤 안기고 싶은 퉁퉁한 뱃살, 느린 움직임은 그들에게 쓰촨성 대지진이 일어나도 절대 뛰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를 선물했다. 눈 깜짝하면 변하는 세상, ‘스피드’가 삶의 제1원칙이 된 현대 사회에서 그들의 ‘느림의 미학’은 여유와 오래된 것들에 대한 향수를 추억하게도 하지만, 아둔한 행동의 사람들을 보고 ‘미련 곰탱이’라고 명명하는 우리네 습관을 보면 곰의 이미지는 그들이 듣기에 썩 유쾌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물론 곰의 가공할 힘과 야성, 순발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우리가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동화나 만화는 그들을 점점 화석화시켜갔다. 곰들은 늘 주인공의 순한(혹은 미련한) 친구였고, 꿀단지 하나에 목숨을 거는, 심지어 팬티도 입지 않은 채 상의만 걸치는 녀석으로 등장했으니, 말 다한 셈이다. 그런데 여기 무림의 세계에 도전장을 내민 용감한 곰 한 마리가 있다. 순하기로 유명한, 대나무 잎을 주식으로 하는 팬더가 그 주인공이다. 살생이라고는 단백질 섭취를 위해 가끔 알이나 곤충을 먹는 게 다인 팬더가 악의 무리를 제압하는 전설의 ‘용의 전사’가 될 수 있을까. 일단 걱정은 잠시 미뤄두시라. <쿵푸 팬더>의 쿵푸 마스터 ‘포’(잭 블랙)가 당신 눈앞의 매트릭스를 거둬내고, 숨겨진 진실을 보여줄 테니.
주인공 포는 평화의 계곡이라 불리는 중국의 한 마을에 거위 아버지와 국수집을 운영하는 팬더이다. 쿵푸에 사로잡힌 그는 너구리 사부 시푸와 무적의 5인방(타이그리스, 몽키, 바이퍼, 크레인, 맨티스)가 수련을 하는 마을 정상의 쿵푸 수련장을 동경한다. 하지만 그의 이상이 높은 곳을 향하고 있는 것과 반대로 그의 몸은 바닥에 붙어 있다. 키 120cm에 몸무게 160kg이란 신체조건과 평균 수면시간 22시간, 이동속도 시속 30cm, 먹는 것만 좋아하는 그의 생활습관은 쿵푸의 ‘ㅋ’자와도 닮아있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20년 전 난동을 부리고 감옥에 갇힌 전설의 싸움꾼 타이렁이 탈출한다는 예견이 나오고, 그에 ‘용의 전사’를 뽑는 쿵푸대회가 열린다. 지상최대에 볼거리를 놓칠 수 없는 포. 그는 국수 그릇을 팽개치고 대회장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초고도비만 팬더 포는 ‘용의 전사’로 뽑히고, 살벌한 적 타이렁으로부터 평화의 계곡을 지켜야하는 운명의 짐을 안게 된다.
<쿵푸 팬더>는 최근 몇 년간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3D 애니메이션과 맥을 달리 한다. 다른 작품들이 인물의 털, 동선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묘사하면서 애니메이션 기술을 자랑했다면, 이 작품은 애초 리얼리티를 포기하고 역동적이고, 다양한 화면구성과 화려한 색감으로 애니메이션의 특장이 무엇인지 보여준다.(이는 최근 등장한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고도의 CG기술을 바탕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상황과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다. <트랜스포머> <아이언맨> 등의 블록버스터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을 눈앞에 생생하게 재현하면서 관객을 감쪽같이 속였다. 상상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은 더 이상 애니메이션 고유의 영역은 아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실사영화의 카메라워킹이라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의 레이아웃(배경설정, 인물배치 작업)이다. <쿵푸 팬더>가 만들어낸 영상은 감히 실사영화가 흉내 낼 수 없는 움직임을 선보인다. 마치 카메라가 인물들 주변 360도에 모두 배치된 듯, 쿵푸 마스터들의 화려한 액션을 사방에서 포착한다. 시선이 자유로워짐과 마찬가지로 거리 또한 변화무쌍하다. 멀리서 평화의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비추는가 싶더니 어느덧 팬더 포의 의뭉스러운 표정을 클로즈업하고 있고, 빠르게 움직이는 쿵푸 마스터를 따라 가며 1인칭 시점에서 액션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포, 타이렁, 무적 5인방 등 쿵푸 마스터들의 개성에 따라 최적화된 각도, 동선을 찾아가면서 그들은 진정한 액션 히어로로 만든다.
또 빠른 화면 진행과 동시에 슬로우 모션을 사용하면서 긴장을 이완시키고, 웃음을 유발한다. 평생 국수 면발을 뽑던 팬더 포가 용의 전사로 전업을 선언하면서 좌충우돌 해프닝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그 때마다 포의 얼굴은 슬로우 모션으로 클로즈업 된다. 비딱한 고개에 한껏 확장된 동공, 길게 뻗어 나온 포의 모습을 모면 웃음을 참기 쉽지 않다. 또 화려한 쿵푸 실력 뒤에 감춘 무적 5인방의 유머 감각 또한 수준급이다.
이렇듯 실사영화나 다른 3D 애니메이션에 비해 표정의 움직임이 적은 <쿵푸 팬더>는 디테일한 표정연기가 아닌 속도 조절과 완급조절을 통한 코믹한 상황 설정으로 유머를 구사한다. 여기에 총천연색으로 무장한 동화 속 배경과 잭 블랙, 더스틴 호프만, 안젤리나 졸리, 성룡 등의 안정된 목소리 연기가 더해지면서 <쿵푸 팬더>는 완성도 높은 코믹 액션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된다.
<쿵푸 팬더>의 재미는 단지 눈과 귀의 즐거움만은 아니다. ‘평화의 계곡’의 현인 우그웨이 대사부(시푸의 사부)가 툭툭 던지는 대사는 실로 동양철학 서적에 나오는 명언들과 필적할 만하다. 특히 복숭아나무 아래서 펼쳐지는 우그웨이와 시푸의 선문답은 인상적이다. 그는 쿵푸의 자질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포를 용의 전사로 뽑아 놓고, “세상에 우연은 없다”라고 말한다. 또 제자 시푸가 타이렁과의 아픈 기억에서 헤매고 있을 때 “과거는 히스토리(History)요. 미래는 미스터리(Mystery) 그리고 현재는 프레젠트(Present)”(‘현재’라는 뜻과 ‘선물’이라는 다층적 의미를 내포)라며 지친 제자의 영혼을 위로한다.
우그웨이 대사부의 말이 뜬구름 잡는 얘기에 머물지 않는 것은 용의 전사 포가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그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포가 변한 것은 많지 않다. 사부 시푸의 ‘음식 수련’을 통해 쿵푸 실력이 몰라보게 좋아졌지만, 출렁이는 뱃살은 그대로이다. 또 용의 문서를 받기 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어린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는 등 촐랑거림은 성격은 여전하다. 결국 변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것, 마음가짐이다.
시푸가 높은 천장에서 ‘용의 문서’(용의 전사를 완성시키는 비법이 들어있는 문서)를 꺼내주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 문서를 갖게 위해 타이렁은 수많은 생명을 죽였지만 그는 그것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문서를 꺼내는 것은 작은 복숭아 잎 하나. 위대하고, 경건한 것으로 여겨지던 보물을 움직인 것은 작은 힘이다. 타이렁과의 힘겨운 싸움을 마친 용의 전사 포는 만두 하나를 씹으며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소중해. 믿기 싫음 말고. 하하”라고 말이다. 안효원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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