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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 영화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REVIEW ON 2009/12/30 09:22 Posted by 이실직고

바로 오늘이다. 세계적인 명성이 아깝지 않은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귀도 콘티니의 아홉 번째 영화 <이탈리아>의 제작에 관한 기자회견이 열리는 날 말이다. 그런데 영화를 만드는 족족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영화처럼 살고 싶다”고 외치게 만드는, 매혹과 관능의 거장 귀도의 표정이 어째 이상하다. 설마 지난 두 작품이 전작들과 달리 엄청난 혹평에 시달린 것 때문에 풀이 죽은 건 아니겠지? 아니, 뭐라고? 며칠 후면 촬영에 들어간다고 발표해놓은 <이탈리아>의 시나리오를 아직까지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고?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도대체 어디서부터 영화를 시작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난다고? 말도 안 돼! 당신은 천재 감독이잖아. 천! 재! 감! 독!


귀도의 엄마
이건 너의 로마란다, 귀도. 세상은 네가 지어낸 대로 로마를 본단다.

아직 만들지 않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둥 자세한 것은 아직 밝힐 수 없다는 둥 궤변을 늘어놓으며 기자회견장을 간신히 빠져나온 귀도(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불안한 마음에 죽은 엄마(소피아 로렌)를 부르며 어린애처럼 도와달라고 외친다. 그러자 엄마가 나타나 귀도에게 속삭인다. 로마는 너, 귀도의 것이라고. 엄마는 찬란한 기억을 안고 있는 과거의 존재다. 그처럼 세상은 그가 만든 아름다운 영화들을 기억할 뿐이다. 세상은 귀도의 영화를 통해 이탈리아를 보고 그것을 믿었다. 이제 세상은 진짜 이탈리아보다 그 이탈리아를 더 원한다. 귀도에게 어서 빨리 그 이탈리아를 다시 내놓으라고 아우성이다. 당연히 세상은 귀도의 고민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스테파니

스타일은 새로운 주제에요! 그게 바로 우리 독자들이 사랑하는 거라고요. 그들은 이탈리아 영
화처럼 살고 싶어 하죠. 

<보그> 기자 스테파니(제니퍼 허드슨)의 말처럼 지난 영화에서 귀도는 매혹적인 이탈리아, 관능적인 로마를 만들어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세상이 그의 아홉 번째 영화에 기대하는 것 또한 그 스타일 아니겠는가! 그래서 비록 시나리오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지만 영화 스태프들은 하루 종일 그 스타일을 만들어내느라 정신이 없다. 그들은 하루에도 수백 번 귀도에게 다가가 묻는다. “배경은 몇 세긴가요?” “이 모자는 어때요?”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는 귀도는 위기의 순간을 벗어나고자 아무렇게나 내뱉는다. “여러 세기를 다룰 겁니다.” “그 모자는 안 돼요.” 이에 따라 스태프들은 제각각 자신이 짐작하는 대로 세트를 짓고 의상을 만들고 등장인물의 머리 모양과 화장 방식을 생각한다. 이 거대한 소란 속에서 귀도는 점점 더 숨이 막힌다.   


릴리
다 아는 것처럼 영화를 감독하는 일은 정말 과대평가됐어. 당신은 그저, 그래, 아니야 말하기만 하면 돼. 그 밖에 하는 일이 뭐가 있어? 없잖아. “감독님, 이건 빨간색으로 해야 할까요?” “그래.” “초록색은요?” “아니야.”, “엑스트라를 더 넣을까요?” “그래.”, “립스틱을 더 바를까요?” “아니야.” 그래, 아니야, 그래, 아니야. 그게 감독이라고. 

귀도는 오랜 동료인 의상 디자이너 릴리(주디 덴치)의 말을 반박할 수 없다. 지금 같아선 더더욱 그렇다. 지금 그는, 그의 뒤통수만 보일라 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의견을 묻는 스태프들에게 그래, 아니야, 이 두 가지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감독의 분명한 대답 없이도 스태프들은 전부 영화에 대한 준비를 끝낸 것 같다. 시나리오에서 피어나야 할 모든 것들이 오히려 시나리오보다 먼저 태어나고 말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시나리오 한 줄 쓰지 않은 귀도가 이미 만들어질 준비를 거의 마친 영화의 발목을 잡는 형국이다. 과연 <이탈리아>는 이대로 촬영을 시작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영화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란 말인가?  


클라우디아
누구 시나리오 가진 사람 없어요? 시나리오가 실종됐네요. 보상금을 후하게 쳐 드리죠. 잃어버렸어요. 시나리오 한 권. 제목은 ‘이탈리아.’ 시나리오 없이는 영화 못 만들어요. 역할이 뭔지도 모르는데 역에 맞는 머리와 화장을 하다니 참 재미있네요.  

아무리 귀도의 영화를 통해 스타가 됐다 해도 그저 그의 이름만 믿고 시나리오도 안 나온 영화에 출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름다운 의상과 탐스러운 가발, 근사한 화장으로 더 없이 찬란하게 꾸며주겠다고 해도 소용없다. 한순간 카메라 앞에서 매혹적으로 빛나던 클라우디아(니콜 키드먼)는 시험 촬영을 중단시키고 시나리오를 찾는다. 그러나 촬영장 어느 곳에도 시나리오는 없다. 심지어 귀도의 머릿속에도 단 한 줄 들어있지 않다. 클라우디아는 더 이상은 못하겠다며 촬영장을 걸어 나간다. 마찬가지로 한시도 촬영장에 더 있을 수 없는 귀도가 클라우디아를 쫓아 나간다. 귀도와 클라우디아가 탄 차가 나타나자 스튜디오 바깥에 진을 치고 있던 취재진이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쏟아 부으며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그들은 아직까지 <이탈리아>가 어마어마한 영화가 될 거라고 믿는 게 틀림없다. 이날 그들은, 대답 없는 미소로 스튜디오를 빠져나가는 귀도와 클라우디아의 뒷모습만 잔뜩 찍었다. 그 모습은 어쩐지 시나리오가 없는 영화 <이탈리아>와 꼭 닮았다. 

루이사
우리 남편은 영화를 만들죠. 영화를 만드느라 꿈같은 삶을 산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일은 항상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아요. 특별하고 낭만적인 주제를 찾고 있는지 모르죠.  

그 실상이 보이는 것과 다르기는 <이탈리아>나 귀도의 삶이나 마찬가지다. 겉보기에 귀도는 성공한 영화감독으로 더없이 훌륭한 아내 루이사(마리온 꼬띨라르)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귀도는 스트레스에 휩싸일 때마다 정부 칼라(페넬로페 크루즈)의 품을 찾는다. 루이사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루이사는, 칼라와는 이미 끝난 사이라는 귀도의 말을 믿었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루이사는 마지막 믿음을 저버린 귀도를 떠난다. 이로써 귀도의 문제는 극명해진다. 더 이상 시나리오를 쓰지 못하는 건 그의 삶 자체가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그의 삶이 잘 차려 입은 유령의 화려한 뒷모습 같아졌다는 걸 귀도는 루이사의 눈물을 통해 비로소 깨닫는다.


귀도
난 이 영화를 만들 수 없어. 난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카메라가 돌아가는 걸 보고 있을 수 없어. 문제는 작가가 자제력을 잃었다는 거야.

마침내 귀도는 자신이 이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걸 인정한다. 창작은 단지 스타일이 아니다. 그래, 아니야, 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창작이 그러하듯 영화는 스크린에 하나의 삶을 그리는 일이다. 그것이 뮤지컬이든 액션이든 SF든 삶은 진실이다. 귀도는 자신이 <이탈리아>를 만들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영화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를 둘러싼 그 모든 난리법석과 겉포장을 벗기고 그 안에 있어야 할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본다. 그것이 바로 귀도의 깨달음이자 뮤지컬 영화 <나인>이 보여주는 9개의 삶 그리고 단 하나의 진실이다. 장성란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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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yap21.com BlogIcon 이닥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를 만드는 고뇌보다는
    영화는 귀도의 카사노바적인 행각에 더 주안점을
    둔 것 같더군요
    그래서 귀도의 고뇌는 그리 맘에 와닿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마지막 모든 출연진이 나오지만 공연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귀도의 액션이란 말로
    영화를 끝낼때 여운보다는 아쉬움이 큰 건 우리가 공연의 흥에 취해있지
    귀도의 고뇌에 동참하지는 못했던 건 같더라구요

    2010/01/0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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