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은 패션지 업계에게 중요한 시점입니다. 매년 9월이 찾아오면 뉴욕을 시작으로 다음 해 봄, 여름 시즌의 컬렉션이 공개됩니다. 한 해 패션 트렌드의 시작이 바로 이때부터 비롯되는 것이니만큼 패션지 업계의 9월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혈을 기울인 기사와 화보들로 가득 채워지게 됩니다. <셉템버 이슈>는 바로 세계 최고의 패션지 ‘보그(VOGUE)'의 9월호 제작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보그라고 한다면 우선 안나 윈투어라는 존재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안나 윈투어는 패션전문월간지 보그의 미국판 편집장으로서 전 세계 패션업계에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그리 낯선 존재가 아닙니다. 2006년 개봉해 전 세계적으로 3억 2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바로 그녀에 대한 영화입니다. 메릴 스트립이 연기하는 지독한 편집장 미란다는 바로 안나 윈투어를 바탕으로 탄생한 캐릭터입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안나 윈투어의 비서로 일했던 로렌 와인스버그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것으로 안나 위투어를 사치스럽고도 허망한 패션업계의 아이콘이자 지옥에서 돌아온 직장상사로 등극시키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작품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미국의 청교도적인 사고관이 패션산업의 화려함을 적잖이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셉템버 이슈>의 한 장면입니다. 안나 윈투어는 형제, 자매들에 대해 진술하면서, 그들이 그녀의 직업을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언급합니다. 안나는 그녀의 형제, 자매들이 패션 산업에 대해 ‘재미있어(Amused)’한다고 표현합니다. 아리송한 웃음을 띠고서 말이죠. 그녀의 웃음은 다분히 자조적으로 보이지만 본인 역시 부드럽게 웃어넘기는 덕분에 우리는 ‘재미있어(Amused)’한다는 표현의 행간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직업을 그 사람의 소명으로 생각하는 청교도 국가에서 특정 직업을 재미있어 한다는 것에는 다분히 어떤 시선이 녹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국제 봉사 활동에 투신하고 있는 안나의 언니나 가디언지에서 정치부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그녀의 남동생은 패션 산업을 적절히 무시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환기하자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식의 ‘패션계 깔보기’는 미국 사회의 주류적인 관점입니다. 외모와 치장에 대해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검소한 생활을 추구했던(오직 과거형이어야만 합니다) 미국 청교도관의 당연한 발현입니다. 물론 모든 분야에 있어 사치와 낭비의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그들이지만 어쨌든 그들의 생각은 그렇게 흐릅니다. 때문에 충분히 아름답고 늘씬하지만 적당히 옆집 동생 같은 앤 해서웨이가 메릴 스트립을 향해 상큼한 ‘No’를 외치는 것은 지극히 미국적인 안배와 선택입니다. 패션은 황홀한 산업임이 분명하지만 그 속은 허영과 사치로 가득 차 있고, 그 허영이나 사치에 대해서라면 그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부정적인 자세를 견지합니다. 그 산업을 통해 무한의 이익을 얻더라도 말이죠. 철저한 이중 가치관이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비하자면 한국에서 패션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무척이나 호의적인데다 그 작용 방식은 거의 완벽하게 일관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패션이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기업위주의 경제체제를 갖춘 한국에서 돈이 되는 분야란 곧 진리요 생명을 의미하나니 패션산업이란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청교도식의 종교적 윤리관을 내면화하고 있지 않은 한국에서 패션 산업에 대한 비판이란 그저 재료 대비 제품의 가격이 높다는 수준에서 마무리 되는 정도가 전부입니다.
따라서 <셉템버 이슈>를 바라보는 한국 관객의 입장은 호의를 넘어 거의 경외감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렇게나 뛰어난 산업에서 이렇게나 프로페셔널하게 일하는 그녀들이라니요. 가히 경탄에 경탄을 더할 일이지요. 사실 정말 그렇습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갈고 닦은 안나 윈투어의 안목은 필요한 요소와 과한 요소를 일별해 내는 데에 탁월한 기능을 발휘합니다. 가령 “모두 가발이군” 내지는 “치아가 너무 많이 보여”같은 심드렁한 한 마디가 상황에 대한 가장 지엽적이면서도 동시에 총체적인 균형을 내다보는 지적으로 작용하는 순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게다가 패션 에디터 그레이스 코딩턴이 찍어오는 화보들은 어찌나 근사한지 그 작업의 과정을 살피는 것마저 황홀할 지경이니 말입니다.
그레이스 코딩턴은 <셉템버 이슈>의 또 다른 주인공입니다. 그녀는 자칫 안나 윈투어의 독무대가 될 뻔했던 <셉템버 이슈>에 그녀만의 비전과 감성을 제시합니다. 뛰어난 모델에서 성공적인 에디터로의 전업에 성공한 그녀는 다소 전위적인 작업을 즐기는 예술가형 에디터입니다. 그녀는 입을만한(wearable) 스타일링에 주력하는 편집장 안나 윈투어와 대척점에 선 작업으로 말미암아, 아주 자주 그녀와 애증이 엇갈리는 공방을 벌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결국은 이 둘의 반목이 정반합이라도 되는 양 진일보한 결과물을 생산해낸다는 사실입니다. 막연하게 살펴보는 입장에서라도 눈치 챌 수 있는 부분인데 둘의 충돌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이 두 사람은 서로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약간은 느린 듯한 영화의 호흡은 패션지 만들기의 화려한 광경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겐 다소 실망스러운 부분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이겠지요. 모든 일은 고되고 어렵습니다. 안나 윈투어나 그레이스 코딩턴의 작업은 얼핏 휘황찬란하게만 비칠 수 있는 패션업계의 진정한 민낯을 보여줍니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약점을 묻는 질문에 “아이들”이라고 답하는 안나 윈투어의 모습이라니요. 정말 보여줄 건 다 보여주는 영화인 셈입니다. 유주하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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