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가로부터 도피한 듯한 백인 남자 다니엘이 혈혈단신 바닷가 마을 ‘라 바라’로 흘러들어 간다. 흑인들이 모여 사는 이 가난한 어촌엔 전통을 지키려는 촌장 세레브로, 휴양지를 짓겠다며 세레브로와 갈등을 빚는 마을의 유일한 백인 파이사, 일하는 것보다 목적 없이 노는 것에 취해 있는 청년들, 혼자서 힘겹게 아이를 키우는 여자 야스민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는 당찬 소녀 루시아가 살고 있다. 다니엘은 이곳을 떠나려 하지만 배를 구하지 못해 발이 묶인 상태로 마을 사람들과 인연을 맺는다.
“라 바라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장소로, 전기가 없을 때부터 여행 차 방문하곤 했습니다. 세레브로도 2002년부터 알게 된 친구입니다. 그런데 2005년 휴가 시즌 즈음에 도시에서 온 어떤 남자가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무언가를 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레브로는 굉장히 화를 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나는 세레브로와 그 공동체에게 영화를 한편 함께 제작해보자고 제안했어요.” 오스카 루이스 나비아 감독은 자신의 경험을 투영한 <크랩 트랩>을 통해 여행자의 눈에 비친 잔잔한 풍경과 일상 속에서 분쟁과 갈등이 휩싸인 콜롬비아의 시대적 상황과 콜롬비아의 아프리카계 공동체가 지닌 아픔을 건져 올린다. 정미래 기자 (FILMON) 주인공 다니엘이 ‘라 바라’로 간 이유가 정확히 설명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현실과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실제 현실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들이 현재 거기 있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일체감을 느끼지 못한 채 정처 없이 혼란스러워하는 다니엘의 감정이다. 즉, 다니엘이 분쟁과 갈등이 팽배한 콜롬비아의 시대적 상황에서 살고 있는 젊은 세대의 상징적인 존재로 보이길 원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인물이 왜 거기에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싶어 하는지 보다 더욱 중요한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관객들이 특정 흔적이나 징후들을 통해서 이러한 장면을 상상하고 또 그럼으로 인해 영화에 푹 빠져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바다에서 헤엄치던 다니엘이 여자친구의 환영을 마주치는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꿈이다. 하지만 그 꿈이 어떤 특별한 효과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저 논리적인 순서의 변경에 의해 발생한 기이함을 표현한 것이다. 다니엘은 자신의 기억을 그 장소에 살고 있는 것과 한데 섞는다. 나는 이 영화를 꿈과 허구 그리고 현실 사이에서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 장소에서 이 모든 것을 섞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바다 근처의 숲을 통해 그 장소가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표현하고 싶었고, 다큐멘터리와 같은 형식의 꿈을 표현하고 싶었다. 현실인지 현실이 아닌지 구분할 수 없도록.
라 바라는 흑인들이 모여 사는 가난한 마을이다. 그리고 이곳의 전통을 지키려는 촌장 세레브로와 휴양지를 건설하려는 백인 파이사가 갈등을 빚는다. 인종간의 대립뿐 아니라 전통과 현대화의 대립을 동시에 보여주고 싶었나?
그렇다. 사실 그곳이 바로 영화의 주요 모티브이다. 그 공동체가 당면한 모순적 상황과 발달 속도 차이의 충돌로 인한 문제점들을 묘사하고 싶었다. 예를 들면 젊은이들은 이제 더 이상 낚시를 하거나 나무를 하러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디어 매체를 통해 도시의 모습을 본 뒤로는 도시로 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어른들은 이러한 젊은이들을 더 이상 설득하지 못한 채 점점 늙어가고 있다. 그들이 살고 있는 땅 또한 위험에 처해있다. 이 공동체는 오랜 세월 동안 여기서 살았지만 법적으로 토지에 대한 권한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도시 사람들은 그 토지를 자신들 소유라 주장한다. 이것이 이 지역의 실제적인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갈등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황, 그리고 역사적으로는 우리나라 아프리카계 공동체에서 발생한 아주 심각한 분쟁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시도했다.
파이사가 바닷가에 설치한 나무 기둥들을 세레브로가 무너뜨리는 소리만으로 영화가 막을 내린다. 이것은 전통의 중요함을 말하고자 한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상징적으로, 그리고 음악을 통해 표현을 하고 싶었다. 전통은 필수요소이기는 하지만 현대화 역시 막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현 사회의 이 급박한 변화에 대해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세레브로가 “이 마을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간다”고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 대사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것들이 변해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한 많은 것들이 점점 사라져 간다는 사실도. 세레브로는 이러한 사실을 경계하고 있으며 관객들로 하여금 질문을 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외각 지역에서의 시간은 도시에서의 시간과 매우 다르다. 이러한 속도의 차이에서 오는 충돌을 현지인과 타지인을 통해서 표현하고 싶었다.
다니엘이 마을 청년들과 축구하고 술 마시며 노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 장면에서는 마을 청년들의 순수하고 걱정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나?
내 친구였던 이 젊은이들의 본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대본에 얽히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형식으로 제작을 했다. 그래서인지 이 친구들이 방향을 조금 잃은 듯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동시에 즐거움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젊음이 있는 곳은 언제나 흥미롭다. 젊은이들은 일하는 것에 관심이 없고 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많다.
야스민은 세레브로와 친밀하게 지내면서 파이사와 다이엘과도 관계를 맺는다. 그녀는 굉장히 욕망에 충실한 사람처럼 보인다. 야스민이란 인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야스민이라는 인물을 통해 싱글맘의 힘든 인생을 표현했다. 어떤 여자는 남편을 잃었고 또 어떤 여자는 단 한 번도 남편을 가진 적이 없다. 주도성을 잃은 여성은 도시에서 온 남성을 자신의 삶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야스민의 역할은 다른 마을 출신의 여배우가 맡았다. 야스민과 비슷한 처지에 있기에 야스민을 잘 이해하기는 하지만 야스민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이것은 배우가 어떤 특정지역을 대변하여 그 지역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이 생기는 걸 내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볼 때 야스민은 매우 비극적인 인물이다. 자신의 딸과 함께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도와줄 누군가를 계속해서 찾는 그런 인물이다.
다니엘에게 끊임없이 점심을 팔려고 하는 소녀 루시아의 캐릭터가 재미있다.
이 인물은 실제 존재했던 소녀를 토대로 했다. 루시아와 동일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소녀였다. 내가 조사 여행을 떠났을 때 만났는데 여러 날 동안 계속 나를 따라다니며 점심을 팔려고 했다. 게다가 내게 게 잡이를 같이 하자며 권하기도 했다. 루시아라는 캐릭터는 내 기억의 단편을 재창조한 것이다. 실제 소녀를 영화에 출연시키고 싶었지만 영화 제작비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끌다 보니 소녀가 훌쩍 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다른 배우를 찾아야 했다. 다행히 그 소녀와 비슷한 여자 아이 이셀라 알바레스(Yisela Álvarez)를 찾아냈다. 도시 출신의 사람들에게는 점심을 판다는 것이 좀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소녀에게는 삶이 걸린 중요한 문제이며 가족의 생계가 걸린 일이다. 이 소녀는 내게 길잡이 같은 존재로 여행의 동행자라고 할 수 있겠다.
정글과 해변 등 콜롬비아의 자연 환경을 담아내는 데 공을 들인 것 같다.
라 바라는 영화의 주요 배경이며 영화는 내 인생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표면적으로 영화에서 나타나는 자연경관은 관광적인 측면이나 풍경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를 통해 낙원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또 동시에 이러한 낙원이 위기에 처해있고 그렇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었다. 소외되어 잊힌 이 지역을 표현하기 위해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내리는 비와 습한 풍경을 강조했다. 내 실제 기억에 기반을 두고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다른 각도에서 제작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 바라는 콜롬비아의 또 다른 지역과 매우 흡사하며 그 모든 지역들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과 현대화 사이의 갈등은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각기 다른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공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시적이다.
나는 영화를 통해서 사회분쟁 문제를 묘사하고자 했다. 하지만 직접적인 묘사보다는 은유적인 묘사를 하는데 더 관심이 있다. 그래야 이야기가 감각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매우 잔잔하고 시적인 리듬을 통해 그곳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본래 시간을 묘사하고자 했다. 관객들은 영화를 감상할 때 발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단지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숨은 의미까지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영화는 한 여행자를 통해서 전개되지만 사실 나는 여행자가 방문하는 각 장소의 상황, 모순, 갈등들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가장 중점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방적으로 표현만 하기보다는 사람들이 그 장소의 상황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것을 공감하기를 원했다. 풍경의 아름다움 보다는 그 풍경이 나타내는 고통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태평양 부근 콜롬비아의 아프리카계 공동체는 아픔과 슬픔을 갖고 있고, 세계는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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