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부산영화제, 월드시네마로 초청된 <하얀리본>을 관람하기 위해, 상영관을 찾아들었던 관객들의 후끈한 열기를 기억합니다. <하얀리본>은 2009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으로 씨네필들의 관심이 유독 집중됐던 작품이었습니다. 더구나 감독은 미하일 하네케. 아시죠? 그분. 폭력에 대해서라면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작가이자 씨네아스트이며 <퍼니 게임>(1997) <피아니스트>(2001) <늑대의 시간>(2003) <히든>(2005) 등등 간단히 읊어만 보아도 치아 부딪치는 소리가(덜덜덜) 귓전을 울리는 작품들을 연출한 바로 그분 말입니다.
하지만 먼저 말해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괜한 걱정일 수도 있습니다만, 흔히 이러한 아트하우스 계열(사실 이러한 분류법에 반감이 있습니다만)의 영화들이 홍보 단계에서 관객에게 어긋난 기대감을 심어주는 경우가 있더군요. 누군가의 허풍이라든지 실수는 아니에요. 다만 관점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미하일 하네케가 폭력에 대한 여러 편의 수작을 완성한 것은 분명한 객관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폭력’이라는 키워드에 꽂힌 나머지 쿠엔틴 타란티노를 상상하고 극장에 들어섰다가는 크게 당황할 것입니다. 단언컨데 미하일 하네케의 시각 스타일은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그것과는 분명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굳이 끼워 맞추자면 <퍼니 게임>정도가 할리우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의도가 할리우드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으로 작용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네케 월드).
<하얀리본>으로 말하자면 더욱 그렇습니다. 영화는 1913년의 독일을 직접 명시하지만 흑백의 화면을 사용함으로써 애초부터 사건과 관객 사이의 영화적인 거리를 상정합니다. 조용한 내레이션으로 마을과 사건의 개요를 읊어가는 것도 그렇죠. 이것은 할리우드 장르 영화들의 폭력 묘사 방식과는 아예 근본부터가 다른 무엇입니다. 물론 영화는 스릴러의 구조를 빌리고 있습니다. 끔찍한 살인 사건이나 수상쩍은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그에 대한 단서가 하나, 둘 드러나기도 하고, 추리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사건의 해결보다는 그를 둘러싼 인간과 구조의 문제를 주목합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하네케는 얼핏 장원경제로 보이는 1913년 독일의 어느 마을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경제와 계급 구조, 그리고 얼핏 순박하게 보이는 사람들의 종교와 가족 제도가 사실은 폭력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해왔다는 데에 방점을 찍습니다. 낭랑한 중창과 함께 암전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나 평화롭게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나 무서운 일들을 키워왔다는 데에 관객은 전율하게 되는 것이지요.
너무 모든 것을 밝혀버렸나요? 하지만 하네케의 영화에 대해서라면 스포일러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영화는 거의 모든 장면과 대사에 걸쳐 인간에 대한 통찰과 의문을 담고 있습니다. 단편적인 정보가 관객에게 주어진다고 해서 영화의 가치가 변할 일은 절대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영화의 일거수일투족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기억하거나 분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넋을 놓고 따라가기만 해도 관객의 마음속에는 어떠한 의문과 두려움, 각성이 찾아들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닫게 되겠지요. “아!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과연 내가 예전에 알고 있었던 그곳이 맞나? 여기가 바로 지옥 아닌가?”하고 말입니다.
1997년 <퍼니 게임>에서 테이프 되감기를 통해 관객을 조롱했던 미하일 하네케입니다. 그런 그가 흑백화면에 고졸한 분위기를 얹어 완성한 <하얀 리본>을 보고 있자면 새삼 가장 영화다운 영화를 만들면서도 현실의 영역으로 끊임없이 돌진하려는 격정적인 아티스트를 확인하게 됩니다. <하얀리본>은 7월 1일부터 씨네큐브 광화문, 그리고 하이퍼텍나다에서 상영합니다. 유주하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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