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틀롤과 시놉시스로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하 <김복남>)은 복남과 해원 두 여자가 동일한 비중으로 끌고 가는 영화다.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부터 히트작 <추격자> <선덕여왕>까지 순박하고 박복하고 처량한 연기에 있어서는 일인자라 불려도 손색없을 만한 배우 서영희는 김복남 역할을 통해 어떤 정점에 다다른 듯 불타올랐다. 그런 복남과 대척점에 서서 냉담한 기운을 내뿜는 인물은 바로 해원이다. 시간이 멈춘 듯한 섬마을에서 묵묵히 학대받던 복남이 비로소 폭발한 뒤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자행하는 가운데, 해원은 유일하게 살아남아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화자(話者)임과 동시에 작품의 메시지를 명확히 하며 영화를 시작하고 마무리 짓는 인물이다. 차도녀(차가운 도시 여자)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이 사람은, 대체 누굴까?
해원을 연기한 지성원은 TV를 자주 보지 않는 이에게는 아마도 낯선 얼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2000년 S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후 줄곧 드라마에만 출연했기 때문이다. <김복남>은 지성원의 영화 데뷔작이다(먼저 개봉한 <하모니>는 <김복남> 이후에 찍은 영화다). 연기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이제야 영화를 찍은 게 의아했다. 당연히 TV 드라마만 고집했던 건 절대 아니다. “연기자 되고나서부터 영화를 굉장히 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생기지 않았어요. <김복남>처럼 단 번에 빨려 들어가는 시나리오를 만나지 못해서 본의 아니게 드라마만 하게 됐죠.”
어렸을 때부터 ‘주말의 영화’를 안 보면 큰일 나는 줄 알 정도로 지성원은 영화를 사랑했다. “할리우드 키드라고 해야 되나.”(웃음) 연기자가 되기 전 그녀는 플롯을 전공하던 학생이었다. <시네마천국>과 엔니오 모리꼬네 음악에 매료된 그녀는 플룻 할 때도 주로 영화음악을 연주했다. 영화에 대한 열망은 진로까지 바꿔놓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다니던 음악대학을 그만두고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들어간 지성원은 배우가 되는 것으로 영화에 대한 사랑을 완성하고자 했다. <김복남>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이거 안 하면 정말 후회하겠구나 생각 들었던 그녀는 비록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려서야 영화배우가 됐지만 <김복남>을 첫 영화로 만난 것만큼은 행운으로 여긴다.
“복남이가 절정으로 치닫는 연기를 해야 하는 반면, 해원이는 절제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됐어요. 제가 TV에서는 악역이나 쎈 역할을 많이 맡았었는데, 막 소리 내지르는 연기를 하고 나면 확실히 속이 후련해지는 게 있어요. 근데 해원이는 절대 오버해선 안 되는, 넘치기 일보직전의 물을 넘치지 않게 계속 유지하는 듯한 아슬아슬함을 표현해내야 했죠. 절제된 내면 연기의 맛을 알게 됐어요.” 지성원은 원래 복남을 연기길 원했다고 고백했다. 처음 찍는 영화에서 이 캐릭터를 통해 완전히 미쳐보고 싶었다. 하지만 제작진은 “넌 너무나 도회적이야. 딱 해원이야”라고 말했다.
서영희의 외모가 순박한 섬여자에 적역이듯이 지성원의 외모는 더도 덜도 없이 차가운 도시 여자다. 지성원이 연기한 이기적이고 냉소적이며 삶에 지친 도시 여성은 실감났다. “그런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가 경상도 출신이거든요. 지방에서 서울 온 사람들만이 느끼는 감정이 있어요. 잘 섞이지 못하는 듯한. 그리고 제가 더 큰 배우, 더 인정받는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듯이 자기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매진하다보면 불안하고 고독해질 때가 있잖아요. 서울이라는 큰 도시를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해원이라는 캐릭터에 너무나 공감하면서 연기를 할 수 있었어요.”
영화는 검게 그을린 복남과 완벽히 대비를 이루기 위해 해원의 하얗고 단정한 외모를 부각한다. 지성원과 장철수 감독은 심은하, 전도연 등 청순하고 도시적인 여자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를 다 찾아보며 해원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근데 깍쟁이 같은 겉모습과 달리 지성원은 청바지와 티셔츠를 즐겨 입는 털털한 여자다. 그녀는 스스로 “푼수 같은 면도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해원으로 분했을 때 처음엔 적응이 잘 안 되기도 했다. 안아하게 자른 단발머리를 한 올 한 올 드라이할 땐 무슨 CF를 기분이 들었다. “짧은 머리가 더 관리하기 힘든 거 아시죠. 썬크림 바르고 양산 쓰고. 해원이가 되려고 노력 많이 했어요.”
<김복남>은 비정한 세상을 향한 복남의 복수극임과 동시에 두 여자의 우정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해원을 향한 복남의 마음이 동성애로 읽히기도 한다.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해원이는 복남이를 따뜻하게 대해준 유일한 친구에요. 복남이는 그런 해원이를 인간적으로 사랑한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 인생을 구원해줄 메시아로 여기면서 말이죠.” 서영희는 지성원의 같은 과 후배다. 재학시절엔 각자 연극으로, 방송 활동으로 바쁘다보니 학교에서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같은 작품에 출연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호흡은 더 없이 잘 맞았다. “제가 보기보다 성격이 남자 같아요. 의리를 중요하시고 학연, 지연, 혈연끼리 으쌰으쌰 이런 걸 좋아하거든요. 물론 동문이기도 하지만 시나리오 읽을 때부터 복남이에게 연민이 많이 느껴져서 그런지 영희에게 절로 애정이 생기더라고요.”
후반부에 가까스로 섬을 탈출하고 유치장에서 복남과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장면을 찍으며 지성원은 나름 거친 액션 연기를 했다. “죽이는 사람이 더 힘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당하는 쪽이 더 힘들더라고요. 엎어지고 넘어지고 이런 걸 해야 되니까 만날 멍들고 파스 붙이고 그랬죠. 맞는 연기가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다음엔 내가 죽이거나 때리는 쪽으로 해야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밀라 요보비치나 안젤리나 졸리 같은 여전사 역할은 꼭 해보고 싶어요. <쉬리>의 김윤진 언니 같은 역할도 너무 좋죠. 꼭 도전해볼 거에요.”
영화의 초반, 폭행 사건의 목격자로 경찰서에 간 해원은 용의자를 선뜻 지목하지 않고 방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바쁜 일상이 피곤하기도 했고 혹시 모를 앙갚음이 두려웠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 시간을 뺏기기 싫었다. 아마 대단한 의협심을 지닌 여자가 아니라면 대부분 해원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이러한 해원의 불친절함은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며 <김복남>을 단순한 슬래셔 무비 이상으로 만든다. “복남이처럼 소외당하고 가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거예요. <긴급출동 SOS>나 <W> 같은 프로 보면 영화보다 더 심하게 학대당하는 이들이 있잖아요. 그들의 고통을 무시해선 안 돼요. 복남이 같은 사람도 없어야겠지만 해원이 같은 사람도 없어야 해요.” 시사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그녀는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다.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계획이며, 나중엔 복지재단 같은 걸 운영해보고 싶다고 한다.
지성원은 “혹시 상대방이 나 때문에 화난 건 아닐까 계속 신경 쓰며 스스로를 피곤하게 할 정도”로 친절하고, 아버지로부터 “넌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다”는 말을 들었을 만큼 씩씩하며,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김복남>으로 칸 영화제의 초대를 받은 그녀는 배우로서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원동력을 경험하고 왔다. 연기 잘 하고 성실하며 인간미를 잃지 않는 배우, 영화마다 자신의 이미지를 완전히 버리고 캐릭터에 몰입하는 공리 같은 배우가 되고 싶은 지성원. “다음 영화는 코미디에요. 해원이와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생각이에요. 아마 깜짝 놀라실 거예요. 지성원 맞나 싶을 정도로 바뀔 테니까.” 10년차 연기자며 신인 영화배우인 지성원을 영화에서 볼 일은 앞으로 더 잦아질 것 같다. 정미래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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